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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초축소판

이 기사를 읽기 전에 “이토록 인기 없는 자가 대통령직을 유지하는 게 과연 민주주의인가”를 읽으시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비상시가 아닌 평상시에 자본가 계급(이들이 권력자들과 함께 지배계급을 이룬다)의 이익을 가장 효과적으로 구현하는 국가 형태다.

그렇다고 해서 자본가 계급이 다른 국가 형태(군부 권위주의나 파시즘) 하에서는 번성하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다른 국가 형태에는 없는 이점을 자본가들에게 제공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최대 장점은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대립하는 두 주요 계급과 국가의 관계를 조직하는 방식에 있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본질적으로 불평등한데도 자본주의 국가는 이들을 각각 한 표를 행사하는 원자화되고 평등한 ‘시민’으로 보이게 하는 정치 영역을 창출한다.

그래서 자본주의 국가의 핵심 목표는 자본가의 생산수단 지배와 이윤 창출을 수호하는 것이지만,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통해 외관상 투쟁하는 양대 계급으로부터 국가가 자율적인 존재로 보이고자 한다.

가령 최저임금 수준을 결정할 최저임금위원회는 노동자위원, 사용자위원, 공익위원 각각 9명씩으로 구성된다. 형식적으로는 노-사-정이 동등한 비율로 공정하게 구성된 듯 모양새를 갖춘다. 그러나 노사 입장 차이가 첨예할 때 정부측 위원은 언제나 사용자위원의 입장에 유리한 결정을 내린다.

환상 민주주의는 의회라는 작은 섬에 갇혀서는 결코 만개할 수 없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지배계급에 두 가지 이점을 제공한다.

첫째, 4~5년에 한 번씩 국가의 공직들을 선출하는 과정을 통해 국가가 “중립적”이라는 환상을 퍼뜨리며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또, 국가 정당성 확보의 다른 일환으로 노동계급 조직들(노동조합과 정당 등)에 상당수 기본적인 권리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 노동자의 동의를 끌어낼 조건을 마련한다.(물론 오늘날 자본주의 시스템이 심각한 위기를 겪으면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도 강제력 사용이 늘고 있다. 지난봄 바이든 정부는 경찰을 투입해 대학생들의 팔레스타인 연대 점거 농성을 진압했다.)

동의에 의한 지배는 지배계급과 개혁주의 조직들이 모두 간절히 원하는 “정상 상태”를 유지하는 데에 매우 중요하다. 소위 “정상 상태”는 지배계급의 통치가 안정적으로 지속되는 상태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지배계급에 주는 두 번째 이점을 살펴보자. 상이한 자본가 계급 부분들은 각자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국가에 영향을 미치려 한다. 정당을 조직하거나 후원하고, 매스 미디어를 운영하며, 정치인들에게 로비를 하는 식으로 말이다.

자본가 계급은 노동계급 착취 문제를 놓고는 단결한다. 그들의 공통된 목표는 노동자에게서 더 많은 잉여가치를 뽑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잉여가치 분배를 둘러싸고 경쟁하는 다수 자본들로 존재하기 때문에 내부적으로는 분열해 있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이런 상이한 이해관계에 상대적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지배계급의 통치를 위태롭게 하지 않고 보증하겠다고 맹세한 이러저러한 (친)자본주의 정당들이 평화적으로 정권 교체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국에서는 공화당과 민주당이, 한국에서는 국민의힘과 민주당이 돌아가며 집권 세력이 된다.

유럽 나라들에서는 사회민주주의 정당도 합법적 집권을 위해 함께 다투는 주요 세력이다. 노동조합 관료층에 기반을 두고 있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노동계급의 불만을 일정 정도 대변하면서도 노동계급을 설득·억제해서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일에 온전히 헌신한다.

1973 칠레에서 벌어진 피노체트 쿠데타

그런데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지배계급의 통치를 보장하지 못하거나 위태롭게 만들면 어떻게 되는가?

지배계급은 자신의 통치권이 위협받는다고 여기면 스스로 정한 민주주의 룰을 깡그리 무시했다. 1973년 칠레에서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를 전복한 피노체트 쿠데타는 널리 알려진 한 사례일 뿐이다.

군부 쿠데타가 성공하면 지배계급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헌법적 장식 없이 강압 통치를 할 수 있다. 노동계급 조직들이 금지되고 표현(집회, 시위 등)의 자유가 심각하게 억압되고 반정부 인사들(심지어 공공연한 자본주의 정당 소속일지라도)이 체포되고 수감된다.

그러나 군부 독재는 지배계급 통치 보장에 대한 지속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지배계급이 특정 조건에서 쿠데타를 유일한 안정화 대책으로 여겨 지지할 수 있지만, 장차 노동자들뿐 아니라 일부 자본가들도 군부 독재를 꽉 끼는 코르셋으로 여기게 되면 그 구조에 균열이 생기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후반에 한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권위주의

군부 쿠데타는 그 결과가 자칫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지배자들에게는 덜 매력적인 시나리오다.(얼마 전 제기된 윤석열 정부의 계엄령 모의 의혹은 국가 형태를 권위주의로 되돌리려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그런 시도가 성공할 수 있는 계급 세력 균형도 아니다. 아마도 윤석열 정부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속에서 유사시 군부에 의한 친위 쿠데타를 고려 사항에 포함시킨 듯하다.)

서구에서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응해 기층에서 파시즘이 성장하는 한편, 기성 보수 정당이 극우적으로 변하고 있다. 트럼프가 이끄는 공화당은 극우 정당으로 급진화하고 있다. 또,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스트가 총리이고, 프랑스에서는 마린 르펜이 이끄는 파시스트 정당 국민연합이 집권을 넘보고 있다.

파시즘은 군부 권위주의 정치 체제와 유사한 점들이 있지만 둘은 같은 게 아니다. 파시즘은 특별한 극우다. 파시즘 국가는(이탈리아에서 파시스트가 총리가 됐지만 아직 파시즘 국가가 수립된 것은 아니다) 모든 민주적 권리를 폐지하고 노동계급의 모든 조직을 완전히 해체한다. 심지어는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인 홀로코스트조차 자행했다.(파시즘을 더 자세하게 알려면 최일붕이 본지 514호에 쓴 ‘민중전선 ─ 파시즘에 맞서려면 반드시 필요한 연합인가?’를 보시오.)

민주적 권리를 위한 투쟁은 중요하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본질이 “자본가 계급의 독재”이기 때문에 지극히 제한적이고 대중을 정치로부터 소외시킨다.

지배계급은 의회 제도를 내세워 대중이 권력을 통제할 수 있는 듯한 환상을 만들어 내고자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의회라는 작은 섬에 갇혀서는 결코 만개할 수 없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자와 자본가들이 대양(산업, 금융, 군대, 경찰, 검찰, 법원, 언론 등)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대중의 실생활에 훨씬 더 크고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의회에 한정된 민주주의와 권력자·자본가의 무한한 비민주적 권력은 도저히 경쟁이 될 수 없다. 후자가 승리해 왔다.

대선(2017년)과 총선(2022년)에서 모두 승리한 바 있는, 당시 슈퍼 여당 민주당 정부는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신자유주의 정책들과 노동개악을 추진했다.

이재명이 당선되면 다를까? 대선 후보 이재명의 행보는 대통령 이재명을 예시한다. 윤석열 정부의 위기가 심화되자 이재명은 거리 시위에 나서면서도 동시에 우클릭도 활성화하고 있다(금융투자소득세 폐지와 가상자산 과세 유예 찬성).

그래서 진보당이 민주당과 전략적 제휴를 맺는 전략(민중전선)은 진보당의 사회 대개혁 목표를 실현시켜 주지 못할 것이다.

민주당이 아닌 좌파 정당이 집권하면 다르지 않을까? 대답은 아니오이다. 그리스의 좌파적 개혁주의 정당 시리자는 반긴축 강령을 내세워 2015년 1월 총선에서 이겼지만, 6개월도 안 돼 은행가들과 자본주의 국제 기구에 굴복했다.

역사적·국제적 경험을 보면, 의회의 힘에 의존하게 될 때 노동자들은 자신감을 잃게 되고 방어 수단은 약화됐다. 의회 중심주의의 핵심은 평범한 사람들이 자력 해방을 이룰 수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5주 연속 주말마다 10만 명이 넘는 규모로 이어진 반윤석열 집회 ⓒ조승진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하에서 민주적 권리를 지키기 위해 투쟁할 가치가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언론·출판의 자유 덕분에 〈노동자 연대〉도 발행될 수 있다. 잡담 장소일 뿐인 의회도 주관적·객관적 조건이 충족되면 혁명가들이 반자본주의 사상을 선전하는 연단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파시스트나 군부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나 특정 민주적 권리를 파괴하려 든다면 이를 수수방관해서는 절대 안 된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파괴되면 노동계급의 조직도 파괴되고 민주적 권리가 침해되면 사회주의자들의 활동도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적 권리를 지키기 위한 투쟁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때조차 혁명가들은 의회 민주주의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재작동 자체가 혁명가들의 목표는 아니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자본가 계급이 좀 더 안정적으로 착취할 가능성을 열어 줄 뿐, 노동계급의 해방을 열어 주지는 않는다.

민주주의를 확대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의 삶을 옥죄는 자본주의적 경제·정치 권력을 우리 손으로 패퇴시키기 위해 부단히 투쟁하는 것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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