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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혁명적 노동자 정당에서 국가 관료의 친자본주의 정당으로

올해는 중국공산당 창당 100년이 되는 해이다. 시진핑을 비롯한 중국 국가 관료는 공산당 창당 100주년이 되는 2021년에는 전면적인 샤오캉(小康) 사회(모든 인민이 안정되고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는 사회)를 완성할 것이고,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49년에는 부강한 민주 문명을 갖춘 ‘조화로운 사회주의 국가’를 달성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 약속에 포함되는 사람들은 중국 인민의 일부일 뿐일 것이다. 경제 성장으로 살 만한 사회를 완성했다는 중국 지배자들의 공식 발표와 창당 100주년을 기념하는 온갖 축하 행사의 이면에는 심각한 빈부 격차(지니계수가 0.5를 넘는다), 민주적 권리 공격(최근 사례는 홍콩 국가보안법이다), 노동자 투쟁과 이를 지원하는 학생들에 대한 탄압, 신장위구르와 티베트의 인종·민족 억압 등의 문제들이 존재한다.

중국 국가 관료는 중국 사회를 이끄는 근간이 바로 중국공산당이며, 이 당은 “중국식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하고 있다고 공언한다. 중국 바깥의 많은 좌파들도 중국공산당이 통치한다는 이유로 중국을 모종의 사회주의 사회로 여긴다. 하지만 중국 지배 관료의 공식 이데올로기와 현실 사이에는 커다란 모순이 있다.

처음에 볼셰비키 정당을 모델로 삼다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이 창당한 배경은 두 가지 요인들이었다.

하나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이었다. 서구 열강이 중국을 할퀴고 분할해 갈 때 신생 노동자 국가 러시아의 외무인민위원 카라한은 제정 러시아 국가가 갖고 있던 중국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노동자 국가 러시아에 대한 중국인들의 관심과 지지가 엄청나게 커졌다. 중국공산당 창당의 두 주역 중 한 명인 리다자오(李大钊)는 일찍이 볼셰비키의 존재를 중국에 소개했을 뿐 아니라 러시아 혁명을 옹호했다.

다른 한 요인은 점차 확대되는 중국 노동자·농민 투쟁이었다. 대표적인 투쟁은 제국주의와 이에 유착한 군벌에 반대해 일어난 1919년 5·4운동이었다. 이 운동도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당시에 외국인 조차지에서 상당 규모로 형성된 노동자들이 그 운동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홍콩 부두 노동자 파업이 대표적이었다. 중국공산당 창당의 또 다른 주역인 천두슈(陈独秀)는 5·4운동 당시 베이징에서 유인물을 반포하다 유치장 신세를 진 뒤 베이징대 교수직을 내려놓고 상하이로 가서 노동운동에 전념했다.

1921년 창당 당시 중국공산당의 당원 수는 50여 명뿐이었다. 그러나 1926년에는 5만 8000명으로 늘어났다. 1920년대에 노동자 투쟁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지주들에 맞서 농민 운동도 늘어난 덕분이었다. 1921년 49건이던 파업 횟수는 1926년 535건으로 10배 이상으로 증가했고, 같은 기간 파업 참가자 수는 10만 명에서 54만 명으로 5배 이상으로, 총파업 일수는 155일에서 2335일로 15배로 증가했다.

중국공산당과 중국 혁명에 특히 레닌과 트로츠키가 관심이 많았다. 레닌이 살아 있는 동안 소련공산당과 코민테른은 마링과 보이틴스키 등을 보내어 중국공산당의 활동과 진로 등에 대한 논의를 도왔다. 창당 초기에 선전 단체에 지나지 않았던 중국공산당을 국민당에 전술 입당하도록 해 노동자 투쟁에 관여할 기회를 붙잡았던 제1차 국공합작이 대표적 사례였다.

1925∼1927년 중국 혁명의 비극

레닌 사후 스탈린이 소련공산당과 코민테른을 장악하면서 중국공산당을 민중주의(중간계급들 쪽으로의 타협) 전략으로 몰고 갔다. 스탈린은 중국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이므로 중국공산당은 부르주아지(구체적으로 국민당)를 지원하는 구실에 그쳐야 한다고 했다. 이런 생각을 정식화한 것이 ‘네 계급 블록’론이었다. 국민당을 노동자, 농민, 지식인, 민족자본가 등 네 계급의 ‘혁명적 연합’으로 규정하고, 중국공산당은 국민당에 충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27년 상하이에서 노동자들의 총파업과 무장 봉기가 벌어졌다. 하지만 이제 스탈린이 지배하는 코민테른은 파업 노동자들이 장제스의 군대에 무기를 넘기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장제스 군대는 파업 노동자들을 가차없이 학살했다. 이런 학살이 벌어지기 몇 달 전 스탈린은 장제스를 코민테른 상임 간부 회의에 포함시켰다! 중국공산당은 1927년 7월 우한의 국민당 좌파에게서도 똑같은 배신을 당했다. 중국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어야 한다고 강변하며 공산당의 구실을 부르주아지의 보조기구쯤으로 제한했던 스탈린의 지시를 따른 결과였다. 트로츠키는 이 문제에 대한 이론적·실천적 대안을 제시했는데, 그것이 바로 연속혁명론이었다.

상하이 혁명 패배 뒤 스탈린은 중국에서 저지른 범죄적 과오를 덮으려고(그리고 소련 국내에서는 부하린의 당내 우파를 숙청할 목적으로) 이번에는 크게 약화된 공산당에 의한 무력정변을 도모하는 초좌파주의로 나아갔다. 이런 초좌파주의 노선은 단지 중국에만 적용되지 않았다. 1928년 코민테른 제6차대회는 사회민주주의를 사회파시즘으로 규정했다(사회민주주의 정당도 파시즘 정당의 변형태일 뿐이라는 주장).

리리싼주의로 불리운 중국의 초좌파주의는 객관적 조건도, 주관적 준비도 없이 소비에트 건설과 무장 봉기를 시도하는 정책으로 나타났다. ‘광둥 소비에트’(님 웨일즈의 《아리랑》의 배경이 된 사건), ‘해륙풍 소비에트’, ‘추수 봉기’ 등이 시도됐지만 어느 것도 소비에트나 봉기가 되기는커녕 성공하지 못했다. 공산당을 지지하는 노동자들에게는 무턱대고 파업이나 무장 투쟁을 벌이도록 하여 고립과 탄압을 자초했다.

장제스가 공산당을 근절하기 위한 공세를 강화하자 공산당은 도시를 버리고 농촌으로 피신했고, 아예 서북부의 오지로 도주했다. 이 과정에서 국민당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 일시 존재했다. 중국 지배자들은 1931년에 등장했던 장시성의 루이진 소비에트를 최초의 중화인민공화국 소비에트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권력의 형태인 진정한 의미의 소비에트가 아닌 일단의 무장 집단이 통치하는 지역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공산당은 장제스의 공세를 피해 옌안으로 도주했다. 중국 지배자들은 이를 “대장정”이라는 그럴듯한 명칭으로 부르지만, 마오쩌둥 자신도 그것이 자신이 원한 바가 결코 아니었다고 시인했다. 중국공산당이 지지 기반이던 노동자들을 버리고 산간벽지로 들어가면서 당의 성격도 노동자 정당에서 중간계급 지식인들이 이끄는 농민 게릴라 부대로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스탈린을 추종하던 왕밍(본명 진소우)과 그 후원자 미프의 세력은 위축되고 마오쩌둥의 영향력이 확대됐다. 1935년에 열린 쭌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이 실권을 쥐게 됐다.

1949년 중국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지식인들이 이끈 농민 군대의 민족해방 혁명이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는 마오쩌둥 ⓒ퍼블릭 도메인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도시 중간계급 출신 지식인들이 지도하는 농촌 게릴라 부대는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1949년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했다. 1949년 혁명을 통해 소련과 같은 사회 구조를 지닌 중화인민공화국이 (몇 해 동안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탄생했다. 중국공산당은 국가 기구의 핵심이 됐다.

스탈린주의자들은 중국에서도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했다고 환호하는 한편, 당시 세계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격과 그 체제의 주역인 중국공산당을 어떻게 이해할지를 두고 혼란에 빠졌다. 당시 중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민족해방 혁명으로 등장한 중국 국가를 노동자 국가로 보고 중국공산당의 구실을 혁명적으로 본 다수파인 펑수즈 그룹과 중국을 모호하게 관료 집산주의로 본 소수파인 왕팡시 그룹으로 분열했다. 하지만 어느 쪽도 올바른 분석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1949년 이후 중국공산당은 저항하는 노동자와 농민을 탄압하고 체제를 지키는 반혁명적 조직으로 바뀌었다.

중국 현대사에서 노동자 저항이 거대하게 벌어질 때마다 중국공산당은 투쟁의 대상이 됐다. 1966년 후난성의 노동자들로 이뤄진 성무련(省無聯; 후난성무산계급혁명파대연합위원회)은 중국공산당과 중국 체제를 비판하며 “관료 부르주아지의 타도”와 옛 국가 기구의 철저한 파괴를 주장했다. 그들은 반동 지지 세력으로 바뀐 ‘인민해방’군을 대체하는 노동자들의 무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89년 톈안먼(天安门) 항쟁 때도 노동자와 학생들은 당시 중국공산당 지도자 덩샤오핑 타도를 외쳤다.

정치와 경제의 매우 밀접한 관계

오늘날 중국 대학생들은 중국공산당의 이데올로기를 공부하는 데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물론 중국공산당원은 되고 싶어 한다. 일자리를 구하는 데 당원증이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공산당이 정치적·사상적 측면뿐 아니라 경제적 측면에서도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반영한다. 국가가 경제에 대한 통제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국가자본주의).

국가자본주의 하에서는 정치와 경제가 통합돼 있기 때문에 경제 정책의 추진 속도나 방향을 두고 형성되는 이해관계의 대립이 정치적 갈등으로 쉽게 이어진다. 그래서 중국공산당은 일치단결돼 있고 한몸처럼 움직이는 조직이 아니라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분파를 형성하면서 종종 서로 갈등을 빚는 집단이다. 1958년 대약진운동을 두고 벌어진 마오쩌둥과 펑더화이(와 덩샤오핑, 류샤오치)의 대립, 1978년 개혁·개방을 두고 벌어진 개혁파와 보수파의 대립 등이 그 예들이다.

지배 관료들이 분열해 서로 갈등을 빚는 상황은 아래로부터 저항이 벌어지기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1966년 문화혁명과 1989년 톈안먼 항쟁은 지배 관료가 날카롭게 내분하는 상황에서 일어났다.

최근 국가주석 시진핑과 총리 리커창 사이에 미묘한 긴장이 형성되기도 했는데, 일각에서 관측한 ‘국가 주도냐, 시장 주도냐’ 하는 갈등 구도가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중국 정부가 알리바바의 마윈을 길들이려 한 일은 분명 “국진민퇴”(국유 기업은 전진하고 민간 기업은 후퇴한다는 뜻으로, 국유 기업 확대 정책을 가리키는 용어)의 방향을 분명하게 보여 준 사례다.

비록 지금은 시진핑의 통제력 아래에서 숨죽이고 있겠지만, 미·중 갈등이나 국내 정책의 실패로 통제력의 위기가 나타나면, 경제 정책과 아래로부터의 저항에 대한 대응을 두고 지배계급 내 갈등이 불거질 수 있다.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를 중국 현실에 창조적으로 적용했다”고 자랑한다. 그들은 그 결과를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고 부른다. 그러나 중국공산당 식 ‘마르크스주의’에는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인 노동계급의 자력해방이라는 사상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오히려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노동조합을 조직하려는 시도조차 억압해 노동자를 더 효과적으로 착취하는 체제를 옹호하는 면만 있을 뿐이다.

중국 사회가 서방 사회들에 비해 더 나은 사회라고 보는 경향이 있는 그런 좌파들은 중국공산당에서 뭔가 가치 있는 요소가 있지 않을까 찾아보려 할 것이다. 과거에 많은 좌파들이 이런 시도를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미 오래 전, 마오쩌둥이 통제했던 중국공산당에게도 고전적 의미의 계급의식 같은 것은 없었다. 이미 도시 중간계급과 농촌 농민의 정당이던 중국공산당은 1949년 신중국 등장 이후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핵심이었다.

중국에서 미래의 노동자 투쟁은 중국공산당과 그 국가 체제를 무너뜨리고 자신들의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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