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중국’의 실체는 한족 제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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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중국 지배자들은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중국의 국제적 위상을 드높이려 애쓰고 있다.
그리고 중국은 홍콩과 대만에 대해서는 일국양제를, 티베트
오늘날 중국은 제국주의 국가로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소수민족을 억압하고 분리 독립 움직임을 무력으로 제압해 왔다. 대표 사례는 1959년 라싸 봉기의 49주년을 기념해 2008년 3월 10일 티베트 각지에서 벌어진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한 일이다. 또, 2009년 7월 신장 위구르의 우루무치 시에서 벌어진 위구르족 독립 움직임에 중국 정부는 탄압으로 일관했다. 중국 정부는 위구르족 분리독립 운동의 배후로
중국 지배자들이 주장하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마오쩌둥은 중국이 1840년 아편전쟁 때부터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아 불평등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고, 중국 영토가 갈가리 찢겨졌지만 1949년에 식민지 해방을 이룩했다고 주장한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은 제국주의 지배로부터의 민족해방인 것은 맞다. 그렇지만 중국에 사는 모든 민족이

중화민족
중국 지배자들은 청 제국 말기와 장제스의 중화민국 시기에 형성된
민족 개념이 근대 사상의 산물임을 염두에 둔다면, 중국에서도 19세기 말 열강의 침략에 직면해 민족주의 개념이 형성되고 발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근대에 형성된 중국 민족주의는 양면적 성격이 있었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과 지배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저항적 민족주의라는 성격과 팽창적 민족주의의 성격이 함께 있었던 것이다.
1911년 신해혁명 때의 민족해방 혁명가 쑨원은
1921년에 등장한 중국공산당은 러시아 볼셰비키의 영향을 받아 처음에는 소수민족의 민족자결권을 옹호했다. 또한 국민당의 장제스가 주장한
사회주의 대가정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의 지도자가 된 뒤로
하지만 중국공산당은 집권할 즈음에는 제국주의 세력의 위협을 명분으로 연방제 공약을 일방적으로 취소하고
더욱이 중국 내 모든 소수민족이 공식적으로 소수민족 지위를 인정받은 것도 아니었다. 중국 정부가
국경선 문제
1951년 신중국 정부는 티베트 정부 대표단과
신장 생산건설병단
1958년부터 시작된 대약진운동과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으로, 소수민족들에게 제공되던 알량한 자치권마저 축소되거나 없어졌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는 마오쩌둥 시절에 만들어졌고 대부분 한족으로 구성된 준군사조직 신장 생산건설병단
마오쩌둥이 사회주의를 내세워 강제로 소수민족을 통합하려는 정책을 추진했다면, 덩샤오핑 이후의 소수민족 정책은 무력 외 경제력을 통해 소수민족을 고사시키는 정책이 추가됐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티베트 자치구와 신장 위구르 자치구는 지하자원이 많이 매장돼 있을 뿐 아니라 중앙아시아로 나아가는 관문으로 중국 정부에게 경제적
1991년 옛 소련이 붕괴하면서 소련 연방에 속해 있던 많은 소수민족들이 정치적으로 독립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중국 내 소수민족들도 분리 독립 움직임을 보일까 봐 두려웠던 중국 지배자들은
1997년 중국이 영국한테 홍콩을 반환받으면서 일국양제를 실시하고, 대만에 대해서는
2000년대 들어 중국이 세계적 경제 대국으로 부상하고 정치적
2009년 1월 4일 인민해방군의 기관지 〈해방군보〉는 아덴만 해적에 대한 대책을 명분 삼아 중국 해군 함대가 소말리아 해협에 파견된 것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