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셰비키를 모델로 했던 중국공산당이 어떻게 한족 민족주의 정당이 됐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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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1921년에 창당됐다. 창당 당시에는 레닌과 소련공산당, 코민테른의 지지와 후원을 많이 받았다. 중국공산당도 볼셰비키처럼 되려는 목표를 갖고 노력했다. 러시아 혁명을 옹호했고, 국제주의를 견지했으며, 피억압 민족의 자결권을 지지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를 저버렸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소수민족을 억압하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중국공산당은 왜 이렇게 변질됐을까?
1927년 상하이 노동자 혁명이 패배한 뒤로 중국공산당은 장제스의 국민당에게서 모진 탄압을 받았다. 그리고 1934년에 지지 기반이 있던 도시를 버리고 시골 벽지로 가는 대장정을 시작했다. 이때 중국공산당의 성격이 노동자 정당에서 농민에 기반을 둔 도시 엘리트들의 정당으로 바뀌었다.
이제 중국공산당은 농민을 결집시키는 이데올로기로 중화민족주의를 적극 활용했다. 이런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는 당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 행세를 했던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과 전혀 충돌하지 않았다.
1949년에 권력을 장악한 중국공산당은 당원 중에 소수민족 출신들이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한족의 정당이었다.
권력 장악 직후에 중국공산당은 자신들이 주도해서 소수민족인지 아닌지를 판별했는데, 이것을 ‘민족 식별’이라고 한다. 그 결과 중국에는 55개의 소수민족이 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200개 이상의 소수민족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공산당은 좡족, 후이족, 티베트족, 몽골족, 바이족 등 55개의 소수민족과 한족이 모여서 중화민족을 이루어 사회주의 대가정을 꾸린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중화라는 단어는 한족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그래서 중화민족주의는 바로 한족들의 민족주의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을 포함한 중국 지배자들은 강력한 중앙집중적인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이때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소수민족들을 방치할 수 없었다. 소수민족 거주 지역이 지정학적·경제적으로 중요했던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것이 강력한 국가자본주의 국가 건설에 해악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중국 지배자들이 소수민족들의 자결권을 짓밟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