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중국 혁명 70주년:
마오쩌둥의 중국은 사회주의 사회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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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전 중국 혁명은 지주 지배를 종식시키고 서구 제국주의에 타격을 줬다. 그러나 토마시 텡글리-에번스는 이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었고, 민중 권력을 목표로 하지도 않았다고 지적한다.
홍콩 민주주의 운동은 중국 국가의 냉혹한 본성을 밝히 드러냈다. 중국은 홍콩 자치정부의 시위대 탄압을 전폭 지지했다.
중국은 세계적 경제대국이기도 하다. 세계에서 생산되는 생산물의 4분의 1이 중국에서 생산된다. 여기에는 진보적이거나 급진적인 구석이 전혀 없다.
그러나 70년 전 중국 혁명은 서구 제국주의에 심각한 타격을 줬다. 그 배경에는 광범한 사회 변혁 염원이 있었다.
혁명 지도자들은 그 후 말로만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억압 기구를 건설했다. 과거 중국을 점령했던 열강과 겨룰 강대국을 건설할 목적에서였다.
마오쩌둥이 이끈 중국공산당은 1949년 10월 1일 권력을 잡았다.
1928년에 시작된 오랜 내전 끝에 얻은 승리였다. 공산당 군대는 장제스의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당이 집권한 중화민국과 싸웠다.
그러나 1937년 두 세력은 일본에 맞서 동맹을 맺었다. 일본은 당시 중국 북부와 동부 해안의 상당 부분을 점령했다.
공산당의 홍군이 자신보다 훨씬 우위에 있는 일본군에 맞서 게릴라전을 벌여 성과를 거두면서 공산당 세력이 커졌다.
공산당은 농민에게 광범한 지지를 얻었다. 중국 농민들은 대개 생계를 자급자족하는 사람들이었다. 공산당은 자신이 해방시킨 지역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기존 지주 권력을 분쇄함으로써 실질적인 사회 변화를 성취했다.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산당과 국민당은 다시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더 큰 세력이 사태에 끼어들었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미국은 중국공산당의 권력 장악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다. 중국공산당이 소련 독재자 스탈린과 손잡을까 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영국 제국이 전 세계에서 누려온 이권을 물려받고 싶어 했다.
19세기부터 중국은 유럽 열강의 지배 하에 있었다. 중국 영토의 대부분은 중국이 다스렸지만, 외국 열강은 동부 연안의 주요 도시들을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은 모두 중국에게서 “조차지”를 뜯어냈다. 영국이 아편 판매권을 위해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면서 1841년에 점령한 홍콩도 그런 주요 항구도시 중 하나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중국에서 더 큰 몫을 원했다. 그래서 국민당 정부에 막대한 자금과 무기를 지원했다.
그러나 국민당 정부는 부패했고 정부 관료들은 자금을 빼돌렸다. 정부는 지방 군벌들에 의존했고 무기는 그 군벌들이 챙겼다.
당시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미국의 공산당 저지 계획이 먹히지 않자 분개했다. 트루먼은 이렇게 썼다. “장 씨[장제스 집안], 쑹 씨[장제스 처 쑹메이링의 집안], 쿵 씨[쑹메이링의 형부 집안] 죄다 도둑놈들뿐이다.”
공산당은 계속해서 농민의 지지를 얻었다. 토지 재분배 정책 덕이 컸다.
1945년 소련은 일본에게서 가져온 중국 북부 일부를 중국공산당에게 넘겼다.
그러면서 공산당이 장악한 농촌이 늘어났다. 국민당이 장악한 도시에서는 식량 공급이 끊기기 시작했다. 물가가 오르자 국민당은 중간계급과 노동자들에게서 더 신임을 잃었다.
이미 1949년 3월 2일 난징 주재 영국 대사는 다음과 같이 암울한 전보를 외무부로 보냈다. “본인이 보기에 장제스가 아무리 노력해도 공산당에 대한 저항이 성공적으로 조직될 가망은 없다.”
1950년까지도 국민당은 일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이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을 때쯤에는 대부분의 저항이 분쇄됐다.
국민당은 어쩔 수 없이 대만으로 후퇴했다. 국민당은 거기에서 미국의 후원을 받으며 1980년대까지 잔혹한 독재 정치를 폈다.
혁명의 배경
평범한 사람들에게 1949년 이전의 중국은 야만적이었다. 평균 기대 수명이 40대 중반이었다. 빈곤이 극심했고 보건을 누릴 기회는 거의 없었으며 대개 문맹이었다.
여성이 노비로 팔리는 경우가 흔했다. 외관상의 이유로 여성의 발을 꽁꽁 싸매 자라지 못하게 하는 전족은 당시의 여성 차별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경쟁하는 군벌, 씨족, 지주들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혁명은 이런 야만을 끝장냈다. 1950년대에 대다수 평범한 중국인의 삶은 나아졌다. 토지가 재분배됐다. 실업률과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잦아들었다. 1952년 혼인법이 제정되면서 여성은 이제 더는 남편의 소유물로 취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었다. 사회주의 혁명은 노동계급 대중이 정치 권력을 장악하고 사회를 운영하는 것이다.
1949년 중국공산당의 인민해방군이 베이징에 입성했을 때 노동자들은 거리에서 행렬을 지어 그들을 환영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이 혁명에서 어떠한 능동적 구실도 하지 않았고, 권력을 잡은 정권은 어떤 면에서도 사회주의적이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공장과 사무실을 운영하지 않았고, 농민들은 마을을 운영하지 않았다.
반면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진정한 노동계급 혁명이었다. 이 혁명은 중국에서 더 나은 삶을 꿈꾸는 많은 노동자들과 급진적인 일부 중간계급을 고무했다.
중국공산당은 1920년대 초 사회주의 활동가들의 작은 조직으로 시작했다. 마오쩌둥도 그들 중 하나였다. 당시 그들은 비록 작지만 강력한 중국 노동계급에게 혁명적 변화를 관철할 힘이 있다고 주장했다.
1925년 노동자 투쟁의 물결이 여러 도시를 휩쓸었다.
군벌 중 하나였던 장제스는 애초에는 자신이 이끄는 민족주의 정당 국민당이 이 반란에서 수혜를 입을 것이라 계산하고 소련과 손잡았다.
스탈린이 장악력을 키우고 있던 소련 지도부는 중국공산당에게 민족주의자들과 동맹을 맺으라고 지시했다. 이는 재앙을 초래했다.
장제스는 외국의 지배를 끝내고 싶어 했지 노동자 혁명을 부추기고 싶지는 않았다. 1927년 장제스는 노동자 운동으로 총구를 돌렸다. 수많은 전투적인 노동자들이 투옥되고, 총살되고, 농촌으로 피신해야 했다.
전투적 노동계급과 급진적 중간계급 지식인의 정당이었던 중국공산당은 이제 농민에 기반을 둔 군사 조직으로 탈바꿈했다.
스탈린은 이런 방향을 장려했다. 1930년대에 소련은 “국가자본주의” 국가가 됐다. 유혈 낭자한 내전 때문에, 러시아를 운영하던 소비에트(노동자 평의회)가 파괴됐다.
스탈린과 그가 거느린 국가 관료 집단이 새로운 지배계급이 됐다. 스탈린의 목표는 노동자와 농민들을 쥐어짜서 급속한 산업화를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1949년 혁명 이후
[1949년에 집권한] 마오쩌둥은 중국을 현대 산업국가로 변모시키고 싶어 했고 스탈린 치하 소련을 모범으로 삼았다. 중국 또한 국가자본주의 국가가 됐다.
진정한 사회주의 경제는 민주적으로 계획하고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하는 데에 기초를 두는 경제다. 스탈린 치하 러시아와 마오쩌둥 치하 중국의 경제는 제국주의 경쟁을 위한 자본 축적에 기초를 뒀다. 인간의 필요는 한없이 뒷전으로 밀렸다.
마오쩌둥에게 “주적”은 제국주의와 지주였다. 마오쩌둥은 그들을 치우면 중국 경제의 앞길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야심과 실제 산업화에 투여할 수 있는 자원 사이에는 거대한 격차가 있었다. 그래서 1957년 마오쩌둥은 “대약진 운동”을 선포했다.
농민들은 거대한 “인민공사”로 묶였다. 어떤 인민공사에는 3만 명이 있었다. 이들은 쉴 새 없는 노동과 실현 불가능한 생산 목표를 강요받았다.
그 결과 1960년에는 끔찍한 기근이 돌아 3000만 명이 사망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주린 배를 움켜쥐고 나무껍질과 잡초로 연명해야 했다.
마오쩌둥은 경제 성장을 밀어붙이는 데에 실패했다. 공산당의 다른 지도자들은 마오쩌둥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도 마오쩌둥이 제시한 급속한 산업화 전략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마오쩌둥은 중국 성장에 시동을 걸기 위한 또 다른 재앙적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1960년대에 통제력을 회복하려 했다. 마오쩌둥은 문화혁명을 이용해 공산당 내 반대파를 제거했지만 그러면서 중국은 내전 직전까지 치달았다.
마오쩌둥은 그가 사망하는 1976년까지 중국을 통치했다.
그러나 노동자와 농민을 더 쥐어짜는 것만으로는 경쟁자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중국 지배계급은 정치를 엄격하게 통제하면서도 중국을 외국 투자자에게 개방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면서 중국 지배자들은 중국을 막강한 경제대국으로 만들고 공산당 지도자들이 바랐던 바를 마침내 달성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