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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비판이 유대인 혐오인가?

이 기사는 같은 제목으로 10월 18일에 열린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영상 보기)의 발제문이다.

얼마 전 서울에서 팔레스타인 연대 집회가 성공적으로 열리자,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은 이를 유대인 혐오 집회라고 비난하는 성명을 냈습니다.

“유대인 혐오”라는 규정에는 엄청난 도덕적 비난이 함축돼 있습니다. 유대인 혐오는 무엇보다도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즉 홀로코스트로 나타난 적이 있기 때문이죠. 그런 만큼 ‘이스라엘 비판은 곧 유대인 혐오’라는 논리는 이스라엘 옹호자들이 휘두르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무기입니다.

이미 서구에서는 이런 공격이 널리 이뤄져 왔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 5월 독일 경찰은 유대인 혐오와 폭력을 부추길 위험이 있다며 ‘나크바’를 기리는 집회를 불허했습니다. ‘나크바’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 건국을 이르는 말로, 그 일로 학살과 살해 위협 속에서 팔레스타인인 80만 명이 쫓겨난 사건을 말합니다. 한편, 미국에서는 최근 이스라엘 규탄 성명으로 화제가 된 하버드대 학생들이 ‘유대인 혐오냐’는 공격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오늘 발제에서 저는 이스라엘 비판이 유대인 혐오라는 주장이 왜 틀렸는지 살펴보고,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시온주의의 신화를 벗기고, 그런 주장이 노리는 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다뤄 보려 합니다.

유대인 혐오는 무엇인가?

먼저, 유대인 혐오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런 도덕적 규탄에 명확한 규정이 없다면 무고한 사람들을 겨냥한 위험한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혐오라는 것은 ‘그저 유대인이라서’ 싫어하고 배척하는 것입니다. 이 ‘유대인이라서’에 담긴 내용은 유대인에 관한 허구적 편견입니다. 물론 이 편견은 여성에 대한 편견이나 무슬림에 대한 편견 등 다른 차별적 편견들과 마찬가지로 현실의 일면을 이용해서 만들어지지만, 결국은 현실의 상이한 유대인들을 허구적으로 뭉뚱그린 것에 불과합니다.

가령 유대인들은 세계경제를 주름잡는 집단이라는 편견이 있습니다. 실제로 세계적인 금융 자본가들 중에는 조지 소로스 같은 유대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유대인은 전체 유대인의 극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신나치와 극우는 온갖 사회·경제 위기가 유대인의 세계 지배 음모 때문이라는 데마고기를 폅니다. 이에 관해서는 뒤에서 더 다루겠습니다.

유대인 혐오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하면,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과 그에 연대하는 운동은 유대인 혐오적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에 저항하는 것은 이스라엘 국가 운영자들과 식민 정착자들이 유대인이어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을 점령하고 그곳에 살던 수많은 사람들을 위협하고 내쫓고, 팔레스타인인들을 상대로 인종 청소를 벌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제국주의의 지원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지원을 받는 대가로 중동에서 제국주의의 경비견 구실을 해 왔습니다. 중동 대중이 이스라엘에 분노하는 까닭입니다.

유대인이 아닌 다른 집단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스라엘과 똑같은 일을 벌였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 해도 팔레스타인과 중동 사람들이 갖는 분노의 크기와 내용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분노와 저항은 유대인 혐오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대인을 간단히 분리시키는 어렵지 않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국가 건설을 추동한 운동은 시온주의 운동입니다. 시온주의 운동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만의 단일 국가를 건설한다는 운동입니다. 이것은 근대 유럽의 유대인 박해에 대한 대응으로 출현한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온주의는 당시에 출현한 여러 운동의 하나였고, 그것도 출현할 당시에는 극소수만이 지지한 운동이었습니다. 그 운동이 유대인 전체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뒤에서 더 살펴보겠습니다.

물론 오늘날 세계 유대인들 사이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우호 여론이 극소수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파시즘의 부상과 홀로코스트를 겪으면서 그렇게 됐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유대인들조차 인종 청소가 당신의 가치관에 부합하느냐고 묻는다면 대다수는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또, 여전히 상당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에 대해 비판적입니다. 노암 촘스키 같은 유수 지식인들뿐 아니라 세계 곳곳의 많은 평범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인들의 대의에 공감하고 연대 집회에도 참가합니다. 심지어 유대교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현대 이스라엘 국가의 존재를 반대하는 일부 정통파 유대인도 있습니다.

추방이라는 신화

시온주의 운동은 팔레스타인 땅에 대한 유대인의 배타적 권리를 유대인 전체의 이익으로 내세웁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화에 기초한 것입니다.

시온주의자들은 유대인들이 거의 1900년을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살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 ‘추방’은 서기 70년에 일어났다고 주장합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을 지배하던 로마 제국이 예루살렘의 유대교 성전을 파괴하고 예루살렘이 속했던 속주 유대에서 모든 유대인들을 쫓아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소위 그 ‘추방’ 전에도 이미 수백 년간 유대인들은 지중해 전역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로마 제국 이전에 전성기를 누린 헬레니즘 제국의 정치·상업 중심지였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는 유대인이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했습니다.

이 흩어진 유대인들은 현지의 하층 농민들과 동화되기도 했지만, 국가 관료로 채용되거나 유력한 상인이 되는 등 일정한 사회적 지위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성공에 매료돼 유대교 개종자가 때로 급속하게 늘어날 정도였습니다. 로마 제국에서 지위가 높은 유대인들은 현지에서 세금을 걷는 등 로마의 지배를 매개하는 구실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팔레스타인은 원래 다양한 종교 공동체가 공존하던 곳이었습니다.

서기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 후 유대 속주 거주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내 또 다른 지역인 갈릴래아 지역으로도 많이 유입됐습니다. 오늘날 그곳에는 과거 유대인들이 다양한 종교 공동체와 공존했다는 증거가 남아 있습니다.

이 사진은 갈릴래아 지역에서 발굴된 4세기경 유대교 회당의 바닥입니다. 윗부분은 유대교 경전인 토라를 묘사한 것이고 아랫부분은 태양신을 중심으로 열두 별자리가 새겨져 있습니다. 형상 없는 신과 형상 있는 신을 함께 찬양한 것입니다.

이처럼 팔레스타인 땅은 애초 여러 종교가 공존해 왔던 곳입니다.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가 모두 팔레스타인 땅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권리는 유대인 전체의 이익과도 관계없습니다. 오히려 팔레스타인을 유대인만의 땅으로 만든다는 프로젝트는 그곳을 유대인이 살기에 가장 위험한 곳으로 만들었을 뿐입니다.

유대인 문제 ─ 역사와 현재

이스라엘 비판이 유대인 혐오라는 주장은 잘못됐지만, 유대인 혐오는 오늘날에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유대인 혐오의 역사는 자본주의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중세 시대에 유대인들은 종교적·경제적 박해를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도시에서 수공업과 상업, 금융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유대인들은 부를 축적하거나 일정한 지위를 확보하기도 했지만, 속죄양이 되기 쉬운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경제적 구실과 부의 축적, 그들이 받는 종교적 적대 때문에 지배 계급은 농민들의 분노를 손쉽게 유대인들에게로 돌릴 수 있었습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유대인들은 사회 생활과 경제 생활에 가해지던 제약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유대인에 관한 편견은 자본주의가 낳는 불의와 고통의 책임을 엉뚱한 곳으로 떠넘기는 데 유용한 구실을 했습니다.

특히, 1870년대 경제 위기 이후 유럽에서는 조직적인 유대인 혐오 정치 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1881년 이후 러시아의 차르 정권은 유대인에 대한 폭력과 대학살을 조장했습니다.

한편, 러시아 혁명 1년 뒤 독일에서도 혁명이 일어나자 독일 지배자들은 혁명이 ‘유대인과 볼셰비키의 음모’라는 주장을 퍼뜨렸습니다. 이후 히틀러는 그 주장을 이어받아 지지자들을 결집시켜 좌파를 분쇄하고 제2차세계대전 동안 홀로코스트를 자행했습니다.

유대인 금융가 집단이 세계를 조종한다는 데마고기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낳은 온갖 해악을 그럴싸하게 설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 없고 천대받는 이주민과 난민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너무 거대한 경제적·사회적 위기를 막강한 유대인 금융가들의 탓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 혐오는 오늘날 극우 이데올로기의 핵심입니다. 특히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극우는 유대인 혐오 주장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적 금융 자본가인 조지 소로스가 유대인 혐오 선동의 소재가 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시온주의는 근대 유럽의 유대인 혐오에 대응하는 하나의 정치 운동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그것은 극소수의 대응이었습니다.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비유대인 노동계급과 함께 싸워 해방을 쟁취하는 사회주의적 전망에 더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에 사회주의 운동이 패배하고 제2차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를 겪으면서 시온주의가 더 영향력을 얻게 됐습니다. 패배와 비관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시온주의는 유대인 혐오자들과 근본 가정을 공유했습니다. 유대인이 다른 인종과 공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만의 국가를 따로 세워야 한다는 게 시온주의자들의 대안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국가를 세우려 한 팔레스타인 땅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살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몰아내려면 제국주의의 지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또, 시온주의 운동은 팔레스타인 땅에 국가를 세운다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유대인들이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막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제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박해를 피해 피난 온 유대인들을 받지 말라고 각국 정부에 촉구했습니다. 유대인 전체의 이익과 시온주의의 특수한 이익 사이에서 후자를 선택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지지와 유대인 혐오가 양립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이 점은 오늘날 시온주의자들의 우방들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트럼프는 대통령 재임 동안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정식 수도로 인정하는 등 시온주의자들을 적극 고무했습니다. 다른 한편, 트럼프는 자신을 기소한 검사 앨빈 브래그에게 “조지 소로스가 엄선하고 후원한 자”라는 유대인 혐오적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이런 역설은 시온주의가 서방 제국주의에 의존해야 하고, 서방 제국주의는 시온주의를 지지하는 게 득이 되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비판은 유대인 혐오’라는 공격이 노리는 것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비판은 유대인 혐오’라는 시온주의자들의 공격이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를 짚어 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공격은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을 입막음 하려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이 유대인을 혐오하는 것이라면 그런 운동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운동을 성장시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 옹호자들은 팔레스타인에서 벌인 인종 청소를 은폐하고 정당화하려는 것입니다.

물론 앞서 얘기했듯 유대인 혐오는 오늘날에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혼란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시온주의의 본질이 인종청소이고, 시온주의가 제국주의의 이익을 위해 추진됐다는 점을 명확하게 지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비판이 유대인 혐오라는 공격에 좌파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2015년 영국 노동당 대표가 됐던 제러미 코빈이 당한 중상모략입니다. 좌파 인사 코빈은 당시 변화 염원 대중의 초점이 됐고, 그를 바라보고 수많은 청년들이 노동당에 입당하기도 했습니다. 코빈은 이스라엘과 서방 제국주의를 원칙 있게 비판해 온 사람이기도 합니다.

코빈의 부상을 경계한 주류 언론과 우파는 코빈의 이스라엘 비판을 이유로 그가 유대인 혐오자라는 비방을 집요하게 퍼부었습니다. 노동당의 우파도 이를 받아들여 코빈을 공격했습니다. 그러자 그 효과는 훨씬 증폭됐습니다. 이는 코빈이 2019년 총선에서 패배하고 당대표직에서 물러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됐습니다.

사실 영국 노동당은 역사적으로 늘 시온주의를 지지해 왔습니다. 그들은 자국의 자본주의 국가를 이용해서 개혁을 추구하려 했고, 그래서 자국의 제국주의적 이익을 지지해 왔기 때문입니다.

노동당의 좌파는 시온주의에 비판적이었지만, 코빈 마녀사냥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노동당을 이용해 사회를 변화시키는 전략을 추구하기 때문에 당의 우파와 정면 대결하고 갈라서기를 꺼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코빈 비방에 동요하며, 좌파도 유대인 혐오를 조심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폈습니다. 그러나 코빈이 어떤 면에서도 유대인 혐오자가 아닌데도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코빈을 방어하기를 회피하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 결과 단지 코빈뿐 아니라 노동당 좌파의 많은 활동가들도 “유대인 혐오”라는 혐의를 받고 당에서 쫓겨났습니다.

최근 한국에서 열린 팔레스타인 연대 집회에서 우리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연대를 표하려는 많은 아랍인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외국인 신분으로 자체의 이스라엘 반대 시위를 벌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만큼 노동자연대와 같은 한국 좌파의 구실은 핵심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대사관이 ‘유대인 혐오 말라’고 발끈한 것은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의 중심에 있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겨냥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대사관은 팔레스타인 연대 시위를 비난하려고 기자회견을 열겠다고 했다가 이를 취소했습니다. 이것은 운동 측이 그들의 비방에 위축되지 않고 단호하게 대응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우리는 즉시 이스라엘 대사관을 반박하는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이런 공격은 이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 단호하게 맞설 수 있도록 유대인 혐오 운운하는 공세를 낱낱이 해체할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