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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생부터 제국주의에 찰싹 붙은 시온주의(그리고 이스라엘)

1947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들어오는 유대인들

두루 알다시피, 이스라엘 국가는 제국주의가 지원하지 않았다면 건국될 수 없었다. 특히, 미국은 이스라엘을 건국 과정에서부터 오늘날까지 확고하게 지원하고 있다.(더 자세한 내용은 본지 484호에 실린 ‘80년 가까이 이스라엘을 확고하게 편든 미국’을 보시오.)

지금 이 순간에도 미국 등 서방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 인종 학살을 확고하게 지지하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벌이는 전쟁은 제국주의적 전쟁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팔레스타인인의 저항과 글로벌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의 근저에는 급진적 반(反)제국주의 잠재력이 있다.(본지 485호에 실린 [이렇게 생각한다] 글로벌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의 부상과 본지 지지자의 참가 필요’를 보시오.)

따라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는 제국주의와 분리시켜서는 파악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스라엘과 미국의 동맹 관계는 언제부터, 어떻게 현재처럼 조직됐을까? 이를 알려면 이스라엘 건국을 이끈 시온주의 운동의 성격과 특징을 살펴봐야 한다.

리숀레지온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정착촌을 처음 건설한 것은 시온주의자들이 아니었다. 에드몽 드 로쉴드(로스차일드) 남작이 지원한 프랑스 단체 국제유대인연합(Alliance Israelite Universelle)이었다.

국제유대인연합은 1882년 텔아비브 남동쪽에 소재한 리숀레지온 농장에 유대인을 이주시켰다.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제1차 세계 시온주의자 총회가 열리기 15년 전이었다.

로쉴드는 1930년대 후반까지 시온주의에 적대적이었다. 그는 시온주의자들의 유대인만의 국가 수립 사상에 동의하지 않았다.

로쉴드는 차르 치하 러시아에서 자행된 대학살(포그롬)을 피해 도망 온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 땅을 제공해,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 알제리처럼 만들고자 했다.

로쉴드는 프랑스 제국주의의 영향력을 해외로 확대하는 것을 고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온주의 운동은 유대인 이민자들이 팔레스타인에 오기 전부터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만의 국가를 수립하는 것을 핵심 목표로 삼았다.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 거주 아랍인의 반발을 의식해 그 목표를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고국’을 건설한다”는 식으로 에둘러 말했다.

시온주의자들은 그런 목표를 이룰 방법이 있어야 했다. 시온주의의 친구와 적을 구분하는 대외 정책이 필요했다.

19세기 후반 시온주의자들의 활동은 모두 유럽에서 이뤄졌다. 시온주의는 유럽에서 생겨난 유럽적 현상이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인구는 그곳 아랍인의 10퍼센트도 안 됐다. 무엇보다 이 유대인들은 시온주의 운동과 아무 관계도 없었다.

그래서 시온주의자들은 유대인만의 국가 수립 계획을 제국주의 열강한테서 승인받고자 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아랍인이 70만 명이나 살고 있었지만, 시온주의자들은 그들과 전혀 협의하지 않았다.

독립을 염원하는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유대인만의 국가를 수용하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가 그랬듯이, 19세기 유럽 민족주의의 영향하에 형성된 시온주의도 식민지 토착민을 정치 주체로 감안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온주의의 정치적·외교적 노력은 전적으로 기성 제국주의 열강을 상대로 이뤄졌다.

세계시온주의기구의 공동 창립자 막스 노르다우는 이렇게 말했다.

“팔레스타인을 향한 우리의 염원은 북쪽을 가리키는 나침반 같은 것이고,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일에 영향을 미치는 열강에 맞게 우리의 태도를 정해야 한다.”

그래서 시온주의 지도자 테오도어 헤르츨은 처음에는 (당시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고 있던) 오스만제국의 술탄과 그 우방인 독일의 카이저를 설득하려 했다.

제1차세계대전을 거치며 그 대상은 영국으로 바뀌었다. 영국이 팔레스타인의 다음 지배국이 될 것임이 명약관화했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는 1917년 11월 2일 밸푸어 선언을 발표해 시온주의자들에게 지지를 표했다.

이렇듯 시온주의는 초기부터 친제국주의 지향성이 그 목표에 내재돼 있었다. 팔레스타인의 지배자가 시온주의의 계획을 인정해 주지 않으면 실행에 옮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36~39년 반란을 일으킨 팔레스타인인들

1936년 반란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만의 국가를 수립하려면 두 가지가 선행돼야 했다.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에 대거 이주시키고,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의 땅을 대량 매입해야 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제1차세계대전의 충격 속에서 정치적으로 자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시온주의자들의 이민·토지 정책을 반대했다. 그리고 시온주의의 목표도 분명하게 반대하며 정치적 독립을 염원했다. 이를 위해 외국인 지배자들을 물리치고자 했다.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이 다수를 차지하기 전에 아랍 민족 운동이 독립을 성취하게 된다면 시온주의의 핵심 목표가 좌절될 터였다.

그래서 시온주의자들은 영국의 팔레스타인 지배를 지지했다. 영국 제국주의의 이해관계가 자신들에게 득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은 1936~39년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때때로 영국 군대의 50퍼센트가 그 반란에 묶이곤 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인들은 결국 패배했고 무장 해제됐다. 영국과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의 정치 무대를 차지했다.

제2차세계대전 말경 영국과 시온주의자 사이에서 마찰이 빚어졌다. 영국이 유럽 유대인의 대량 이주를 막은 게 핵심 이유였다. 그리하여 양측은 1945~1947년 무장 충돌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시온주의자들이 진정한 의미의 반제국주의 투쟁을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시온주의자들은 제2차세계대전의 결과로 제국주의 질서에 변화가 생긴 틈(영국 제국주의가 약화된 반면 미국 제국주의가 강화되는)을 비집고 들어간 것이었다. 이제 시온주의자들은 미국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나치의 600만 유대인 학살로 인해 세계 여론이 시온주의자들에게 우호적이었고, 영국의 패배를 바라며 종종 추축국을 적극 지지했던 아랍 민족주의가 사기 저하된 덕분에 시온주의자들은 이 투쟁에서 승리했다.

결국 1947년 11월 27일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 영토를 유대인 지구와 아랍인 지구로 분할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아랍 국가들이 이에 반발해 제1차 중동전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벤구리온(이스라엘 초대 총리)과 압둘라(요르단 국왕)가 전쟁 도중에 비밀리에 협상해 유엔이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에게 할당한 영토를 각각 합병했다.

그리하여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은 독립 국가를 수립하지 못했다.

이스라엘 국가는 팔레스타인인들을 희생시키고 합병한 영토를 세계 열강과 국제 기구로부터 승인받으려 했다.

당시 소련은 1948년 제1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정치적·군사적으로 확고하게 지지했다. 그러나 시온주의자들은 유대계 미국인 부자들과 미국 정부와의 경제적·정치적 연계를 더 선호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이스라엘 정부는 미국을 공개 지지했다.

팔레스타인에서 미국의 지지를 받은 답례로 시온주의자들은 미국 주도의 서방 제국주의를 지지한 것이다.

한편, 독립 열망이 짓밟히고 많은 사람들이 난민이 되거나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긴 대다수 팔레스타인인들은 결코 시온주의를 인정할 수 없었다.

시온주의자들이 오직 무력으로만 팔레스타인인을 억누를 수 있었다는 점은 전혀 놀랍지 않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아랍 지배자들과 언제 어느 곳에서든 협상해 기꺼이 화의를 맺고자 했지만,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정치적 비존재 취급을 했다.

그런 점에서 얼마 전에 (카타르가 중재해) 하마스와 인질 교환 협상을 한 것은 이스라엘에게 견디기 힘든 수모였을 것이다.

종속국

시온주의가 제국주의에 달라붙었다고 해서 이스라엘 국가가 순전히 미국의 종속국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스라엘은 미국이 반대했는데도 1956년 수에즈 전쟁을 일으켰다.

또, 1967년 6월 당시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가 티란 해협을 봉쇄했을 때 당시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은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군사적 개입 요청을 거부했다. 미국은 그 무렵 베트남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이스라엘을 노골적으로 편들어 아랍 세계 전체와 적대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미군 병사들이 이스라엘을 위해 죽지 않을 것”이라고 확약한 뒤에야 존슨은 전투 가능성을 승인했다.

결국 미국은 나세르가 주도한 아랍 민족주의 운동을 견제하기 위해 항공모함을 동원해 이스라엘군의 공습을 지원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미국과 (전술적 차이로) 의견 충돌을 해가면서도 팔레스타인인을 인종 학살하고 있다.

이스라엘 국가는 자국의 존립이 위협받는다면 미국에 대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조차도 이스라엘 국가의 창건 방식과 존립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은 제국주의 시스템의 필수적 일부일 것이다.

특히, 팔레스타인에 시온주의 정책을 강요하려면 제국주의의 경제적·정치적·군사적 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