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보]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과 새로운 중동전쟁의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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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11월 1일에 같은 제목으로 열린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영상 보기)의 발제문을 대폭 증보한 것이다.
지난 10월 7일 하마스와 그 밖의 팔레스타인 저항 운동 조직들이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그 공격은 팔레스타인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중동에 평화가 올 수 없다는 경고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국가와 미국 등 서방 동맹국들은 오히려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을 일으켰다.
한국 시간으로 10월 29일(일) 네타냐후는 “전쟁의 두 번째 단계”를 선언했다. 가자지구에 대한 전면적 지상군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네타냐후는 “휴전은 없을 것”이고 “길고 어려운 전쟁”이 될 것이라며 장기전을 예고했다.
지상전 개시 전에도 이미 이스라엘 군대는 가자지구에 공격을 퍼부어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낳고 사회기반시설들을 파괴했다. 지상전은 더 많은 희생을 낳을 것이다.
가자 보건부에 따르면, 11월 6일 현재 사망자는 1만 명, 부상자는 2만 5000명을 넘었다고 한다. 사망자의 73퍼센트는 여성과 어린이, 노인이었다. 유엔에 따르면 150만 명, 즉 가자 인구의 절반 이상이 피란민이 됐다. 연료 부족으로 병원 가동이 중단되는 등 사태가 심각하다.
강탈 국가 이스라엘
그런데 많은 자유주의자들과 온건 개혁주의자들은 매스 미디어를 거스르지 못하고 양비론을 취하거나 아니면 반쯤 타협한 팔레스타인 연대 입장을 취하고 있다. 소위 하마스의 만행에 관한 온갖 언론 보도가 넘쳐나, 10월 7일 사건의 진정한 성격을 흐려 버렸다.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많은 단체들과 개인들도 하마스의 공격을 문제삼는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사태의 근본적 책임이 이스라엘에 있음을 지적하면서도 하마스의 공격을 비난했다. 대표적으로 참여연대가 이런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억압자와 피억압자가 충돌할 때는 중립적이거나 양비론의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물론 참여연대 같은 입장을 단순한 양비론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기본적으로는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입장이라고 봐야 한다. 다만, 자칫 양비론으로 빠질 타협적 요소를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자결권과 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식민 정착자 국가에 맞서 무장 투쟁을 할 권리를 지지해야 하고, 현실에서 벌어지는 무장 투쟁을 지지해야 한다. 더구나 하마스의 승리는 이스라엘과 미국 제국주의에 큰 타격이 될 것이다.
이 점에서 휴전 요구는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 그 요구는 이스라엘에게 공격을 중단하라는 뜻일 수 있지만, 동시에 하마스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는 요구도 될 수 있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이스라엘이라는 시온주의 식민 정착자 국가가 존재하는 한 해결될 수 없다. 이스라엘은 구조적으로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강탈과 억압에 바탕을 둔 국가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만의 국가를 건설하려고 그 땅에서 먼저 살던 아랍인들을 강제로 내쫓으면서 건설한 국가다. 건국 당시 아랍인 80만 명이 쫓겨났고, 그 뒤에도 점령과 강탈이 계속됐다.
그 일은 강대국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시온주의자들은 영국과 미국 등 강대국들의 지원을 받으며 중동에서 서방 제국주의의 이익을 앞장서서 지키는 경비견 구실을 했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래 이스라엘은 줄곧 미국 대외 원조의 최대 수혜국이었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제국주의의 맥락 속에서만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다. 팔레스타인인들을 상대로 끝없는 전쟁을 벌이거나, 이스라엘 극우의 요구대로 팔레스타인인들을 절멸 또는 완전히 내쫓는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10월 7일 공격은 이스라엘 국가가 자국 유대인들의 안전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시온주의는 자신이 내세우는 역사적 목표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하마스에게 포로로 잡힌 ‘인질’들의 운명도 이를 잘 보여 준다. 현재 그들의 가족들은 네타냐후에게 석방을 위한 협상에 임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사실 그 포로들의 안전을 확보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네타냐후가 전쟁을 멈추고 팔레스타인인 수감자들을 풀어 주면 된다. 그러나 네타냐후는 “길고 어려운” 길을 택하여 포로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제2의 나크바 시도하는 이스라엘 극우
많은 언론들은 ‘두 국가’ 방안이 유일한 현실성 있는 해법인데 그 해법을 실현할 정치 세력이 없는 게 문제라고 현 상황을 진단한다. 특히 이스라엘 극우를 문제의 근원으로 지목할 때가 많다.
그러나 이스라엘 극우의 부상은 시온주의 국가라는 이스라엘 국가의 본질에서 비롯한 것이다.
팔레스타인 땅을 빼앗아오면 그 땅에 살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딸려올 수밖에 없다. 그들을 모조리 죽이거나 내쫓지 않는 한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이스라엘 사회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어느 정당도 팔레스타인인들의 동등한 권리를 인정할 생각이 없다. 반면 팔레스타인인들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과 상시적 전쟁 상태에 있게 됐다.
물론 이스라엘은 자본주의 사회이고 그 내부에 계급 분단과 불평등이 있다. 게다가 지난 몇십 년 동안 신자유주의적 정책들로 불평등이 심화돼 왔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식민 정착자 사회로서의 특수성 때문에, 불평등이 체제에 맞선 투쟁으로 이어지지 않고 강탈과 점령에서 얻는 이득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한 다툼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식민 정착자 국가로서 팔레스타인인들과의 상시적 전쟁 상태와 이스라엘 사회 내부 모순의 심화가 맞물리면서 이스라엘에서는 갈수록 강경한 시온주의 세력이 득세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현재 네타냐후의 부패한 극우 정부가 등장한 배경이다.
네타냐후 정부는 하마스의 공격 전까지 바이든 정부의 후원을 받으며 사우디아라비아와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고 있었다. 2020년에는 트럼프의 지원 아래 아랍에미리트연합국 및 바레인과 관계를 정상화하는 아브라함 협정을 체결했다. 이란을 견제하려는 걸프 연안국들과의 관계를 좁혀 온 것이다.
비록 아랍 정권들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표명하는 연대는 립서비스 이상인 적이 없었지만, 이런 관계 정상화는 마치 팔레스타인 문제를 없는 셈 취급하는 것이다.
네타냐후 정부는 팔레스타인인들을 무력하게 만들려고 분열을 부추기는 정책도 추진했다. 예컨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를 가자지구 봉쇄에 동참시켜 하마스를 더욱 압박하고 하마스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서로 싸우게 만들었다.
그러는 동안 시온주의 정착자들과 이스라엘군은 네타냐후 정부의 고무를 받으며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에서 정착촌 건설을 강화했다.
그러나 10월 7일 하마스의 공격은 팔레스타인인들을 무시하거나 무력화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줬다. 그 공격은 이스라엘 군대와 정보 기관에 치욕을 안겨 줬다. 그들은 그 공격을 예상하지도, 신속하게 물리치지도 못했다.
이스라엘의 인종분리주의 통치자들은 이 치욕을 처절하게 응징하기를 바라고 있다.
네타냐후 정부하에서 영향력을 크게 키워 온 이스라엘 극우는 이번 전쟁을 이스라엘 점령지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을 대거 몰아낼 기회로 만들려 한다. ‘대대적 강제 이주’라는 환상을 실현할 기회로 여기는 것이다.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 주민들에게 남쪽의 이집트 국경으로 떠나라고 명령했는데, 이스라엘 극우는 이를 그들의 환상을 실현할 첫 단계로 여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국경을 열라고 이집트를 압박하고 있다. 서안지구에서는 시온주의 정착자들이 베두인 유목민들을 대거 쫓아냈다.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은 제2의 ‘나크바’가 새로운 중동 전쟁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이스라엘과 서방 강대국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서방 강대국들의 대응
10월 7일 하마스의 공격 직후 미국과 유럽연합, 서유럽의 주요국 정부들은 모두 서둘러 이스라엘을 지지했다. 말로만 지지를 표명한 게 아니라 군사력을 지원하기도 했다. 미국은 두 항모 전단과 2000명의 해병대 병력, 방공 체계를 지원했다.
바이든 정부는 하마스와 푸틴을 엮어서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시끄럽게 떠들고 있다. 그러나 이는 서방의 위선을 돋보이게 할 뿐이다. 미국과 나토는 우크라이나의 자결권을 지지하고 러시아의 침공과 민간인·인프라 공격을 규탄한다며 러시아와 대리전을 벌이고 있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의 자결권은 부정하고 이스라엘의 만행에 눈감고 있다.
사실,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서방 제국주의자들은 취약한 처지에 있다.
미국의 중동 장악력은 2000년대 이래 점점 약해졌다. 미국이 중동에서 벌인 ‘테러와의 전쟁’이 실패하면서 미국은 여러 어려움에 부딪혔다. 미국은 부상하는 중국과의 대결로 역량을 집중하고자 했지만 종종 중동에 발목이 잡혔다.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 패배가 낳은 공백을 이란 같은 역내 강국과 중국·러시아 같은 세계적 강국이 메우는 것을 두고 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이스라엘과 친서방 아랍 국가들의 관계 개선을 추진한 것도 이런 맥락이었다. 이를 통해 중동에서 이란을 고립시키고,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국가들을 미국 쪽으로 더 당기려 한 것이다. 그러면서 중국을 견제하는 데 더 집중하려 했다. 그러나 이번 하마스의 공격은 이 계획을 어그러뜨렸다.
만약 이란과 레바논 헤즈볼라가 이번 전쟁에 참전하면 이스라엘은 상당한 애를 먹을 것이다.
미국은 중동 지역에 배치한 자국 군대와 기지들을 지키러 서둘러 나섰다. 그러나 미국이 시리아나 예멘 같은 곳에서 벌인 폭격과 같은 일들은 미국 자신이 피하고자 하는 더 큰 전쟁을 촉발할 수도 있다.
미국 정부가 중동에 군사력을 보낸 것은 중국과의 관계를 관리하려는 것이기도 한다. 중국은 중동에서 경제적·정치적 영향력을 빠르게 키우고 있다. 중동의 군사적 긴장 고조는 세계적 차원에서 제국주의간 경쟁을 심화시킬 수 있다.
그래서 미국과 다른 여러 나라의 정부들이 가자지구 민간인 피해를 줄일 ‘인도적’ 조처를 도입하라고 이스라엘에 촉구하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을 걱정해서가 아니다. 그러나 미국의 뜻대로 사태가 순탄히 통제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거대한 연대 운동
이스라엘의 야만적인 공격은 서방 제국주의에 위험을 안겨 주었을 뿐 아니라 대중을 다시 거리 항의에 나서게 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봉쇄는 전 세계적인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을 촉발했다. 서방 제국주의자들은 시온주의 비판을 유대인 배척으로 모는 운동을 벌여 왔는데, 최근 그 공세를 강화한 데다 심지어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을 불법화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은 성장해 왔다.
몇몇 나라들에서는 탄압과 무슬림에 대한 인종차별 물결이 새로 일고 있는데도 그렇다.
우리는 많은 유럽 나라들에서 팔레스타인인들과 아랍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적 공격이 벌어지는 것을 반대한다. 그들은 집회·시위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유대인 배척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러나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도 팔레스타인 연대 집회에 점점 더 많이 참가해, 이스라엘이 유대인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만행을 벌이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우리는 팔레스타인 연대 집회를 여는 데 적극 동참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래야 할 것이다.
현재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은 대중적 국제주의 정서의 놀라운 고양을 나타내고 있다. 이 정서는 시온주의를 뻔뻔하게 두둔해 온 자국 권력자들에 대한 깊은 분노를 표현하고 있다.
연대는 거리 시위로 표현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서유럽의 경우 팔레스타인인들의 해방에 대한 지지가 대학들에서 다시 부상하고 있다. 이스라엘 반대와 팔레스타인 지지 행동은 강력하고 급진적인 학생 운동을 리부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팔레스타인 지지 정서의 고양은 여러 나라에서 거대한 운동을 촉발했다. 심지어 탄압이 극심한 이집트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혁명적 좌파는 그런 운동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여러 나라에서 그 운동은 혁명적 좌파를 강화할 진정한 잠재력이 있다.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전략
앞서 강조했듯이, 이스라엘 국가가 존재하는 한 팔레스타인의 평화는 불가능하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이스라엘 국가를 폐지하고 그 자리에 단일한 세속적 민주주의 국가를 세울 때만 해결될 수 있다. 그런 국가하에서는 아랍인이든, 유대인이든, 무슬림이든, 그리스도인이든 동등한 권리를 누리며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은 이런 목표를 이루는 필수적 조건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만으로는 막강한 이스라엘을 패배시키기 어렵다. 이스라엘은 제국주의의 지원을 받는 경비견 국가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을 패배시키려면 아랍 세계 전체의 힘이 동원돼야 한다.
그러나 아랍 정권들은 그런 투쟁을 벌일 능력이 없음을 오래 전부터 스스로 입증해 왔다. 중동의 각국 정부들은 오랫동안 제국주의 질서에 협력해 왔고, 부패하고 억압적이다.
사실,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의 성장은 중동 정권들에 위협이 됐다.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그 정권들의 무대응이 분노의 초점이 되고,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처지는 현지의 사회적·경제적 요구와 결합되기 쉬웠다.
그러나 1960~1970년대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을 이끈 PLO는 그런 가능성을 차단하는 데 주력했다. 아랍 정권들의 지지와 지원에 의존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PLO가 성공하지 못한 주된 이유이다.
예컨대 1960년대 말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요르단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그런 조건하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과 조직이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PLO도 급속하게 성장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요르단을 침공해 PLO의 기지를 박살내려 했다. PLO는 요르단 국왕에게 이스라엘을 향해 대포를 쏴 달라고 요청했지만 요르단 국왕은 이를 물리쳤고, 오히려 PLO에게 퇴각을 요구했다.
그러나 PLO는 퇴각하지 않고 수백 명의 게릴라군으로 이스라엘군을 격퇴했다. 이 승리는 팔레스타인인들을 크게 고무했고, PLO를 이끈 조직인 파타는 엄청난 영향력과 위신을 누렸다. 한때 나세르에 열광했다가 1967년 나세르의 전쟁 패배로 실의에 빠졌던 사람들도 파타로 몰려갔다.
그 결과 1970년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은 요르단에서 정권을 위협할 정도로 광범한 지지를 받았다. 요르단 정부는 매우 취약한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파타는 한사코 요르단 정권과 맞서기를 거부했다. 결국 요르단 정권이 먼저 위협을 분쇄하러 나섰고, 팔레스타인인들을 학살했다. 당시 학살된 팔레스타인인들의 수는 5000명 ~ 2만 명으로 추산된다. 요르단에서 쫓겨난 PLO는 이후 레바논에서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은 처음에 단일한 세속적 민주주의 국가 수립을 목표로 제시했다. 그러나 아랍 정권들에 의존하려 했기 때문에 패배와 후퇴를 거듭했다. 운동 지도부는 결국 이스라엘과의 협상을 통해 ‘소국가’를 인정받는 것을 현실적 방안으로 여기게 됐다. ‘소국가’는 팔레스타인 영토를 이스라엘과 공유한다는 것이다.
1987년 팔레스타인 대중 항쟁(인티파다)이 벌어지자 미국은 항쟁을 달래려고 협상을 중재했다. PLO는 ‘두 국가’ 방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두 국가’ 방안의 실상은 ‘평화’와 ‘공존’이라는 허울 아래 강탈과 점령이 지속되는 것에 불과했다.
하마스는 이런 배신적 타협을 비판하면서 부상했다(1987년 창립). 그러나 하마스도 주변국들과 강대국의 협상에 의존하는 약점이 있다.
물론 하마스가 파타와 똑같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마스의 입장에는 모순이 있다.
예컨대 처음에 하마스는 그들의 강령 문서에서 역사적 팔레스타인 영토를 전부 되찾는 것을 목표로 밝혔다. 그러나 2017년에 개정한 강령 문서에서는 1967년 전쟁으로 그어진 국경으로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제시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을 함축한다. 그런데 동시에 하마스는 그 문서에서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도 한다. 모순인 것이다.
게다가 하마스 지도자들은 수십 년에 걸친 장기적 휴전 방안을 종종 거론해 왔는데, 이 또한 이스라엘을 사실상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하마스가 이런 모순된 태도를 취하는 것은 그들을 지원하는 카타르 등 주변 중동 국가들의 압력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사례는 2011~2013년 아랍 혁명을 둘러싼 것이다. 당시 하마스는 시리아에 기지를 두고 있었는데, 시리아 혁명이 일어나자 옳게도 그 혁명을 지지했다. 덕분에 시리아에서 쫓겨나고 이란이 지원을 끊었는데도 말이다. 하마스는 당시 이집트 혁명으로 들어선 무함마드 무르시의 무슬림 형제단 정부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그 정부는 기존의 국제 협정들을 인정한다고 밝혔고, 거기에는 하마스가 거부해 온 오슬로 협정도 포함돼 있다.
무슬림 형제단 정부는 얼마 안 가 엘시시의 군부 쿠데타로 무너졌다. 물론 엘시시 정부는 하마스에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그런 엘시시 정부도 몇 년 전부터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중재자 구실을 하기 시작했다.
최근 하마스는 이란 대표단과 함께 러시아를 방문했는데, 이 또한 주변국들과 강대국들의 협상에 의존하는 노선의 연장이다. 이런 행보는 대중 투쟁을 고무하는 데 역효과를 낼 것이다.
우리는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에서 새로운 급진적 투사들이 등장한 것에 주목한다. 2021년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일어난 항쟁을 계기로 이런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새 세대 투사들은 ‘두 국가’ 방안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추잡한 배신을 거부하고 과거의 인티파다 같은 대중 항쟁을 건설하려 하고 있다.
아랍 세계의 노동자들이 도시 빈민과 농민을 이끌고 아랍 정권들을 타도하는 사회주의적 혁명이 일어나 성공할 때 이스라엘에 대한 온전한 승리의 조건이 충족될 수 있다. 2011~2013년 아랍 혁명과 더 근래에는 알제리와 수단에서 일어난 항쟁들이 중동 지역의 혁명 가능성을 힐끗 보여 줬다.
현재 아랍 대중은 이스라엘의 야만적인 전쟁에 맞서 팔레스타인인들을 지지하며 다시 거리 항의에 나서고 있다. 탄압이 극심한 이집트 정권조차도 대중의 분노에 밀려 시위를 허용해야 했다. 심각한 생계비 위기 상황에서 이런 시위는 정부에 맞선 투쟁으로 번질 잠재력이 있다.
한국의 우리는 연대를 꾸준히 건설하며 중동 혁명의 가능성이 현실화되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보론1] 이스라엘 노동계급이 시온주의에 반대하기를 기대할 수 있는가?
일부 좌파들은 이스라엘 노동계급을 시온주의에 맞선 투쟁의 동맹이 될 수 있는 사회 세력으로 본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구체적 조건을 보면 이스라엘 노동계급이 시온주의에 도전하지 않는 데에는 구조적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초창기 미국과 같은 정착민 사회에서는 농장주들이 계약 노동자나 노예들을 데려가 그들을 착취하는 식으로 정착이 이뤄졌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 시온주의자들은 제국주의의 지원을 받으면서 팔레스타인에서 직접 강탈을 수행하고 거기서 혜택을 누렸(린)다. 이스라엘에서는 노동계급의 형성 자체가 강탈과 배제를 통해서 이득을 보고 이를 위한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과 밀접하게 얽혀 있(었)다.
이스라엘의 경우 시초 축적 과정에서 생긴 이득은 자본가들이 아니라 시온주의 국가를 통해 노동자들에게 돌아갔고, 그리고 국가 자체가 그런 과정을 위해 조직됐다.
이스라엘이 중동 한가운데서 선진국 수준의 생활 수준을 누릴 만큼 경제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서방 제국주의의 지원 덕분이었다. 1960~70년대에 이스라엘로 흘러들어간 돈의 70퍼센트는 대가를 돌려줘야 되는 투자가 아닌 일방적 원조였다.
물론 현재 이스라엘의 경제 구조가 당시와 똑같지는 않다. 그러나 여전히 이스라엘 사회는 점령과 강탈, 서방 제국주의 경비견 구실을 하는 것을 중심으로 조직돼 있다. 이를 잘 보여 주는 것이 거대한 무기 부문이다. 지난해 이스라엘은 세계 9위의 무기 수출국이다. 1인당 무기 수출액은 압도적인 1위이다. 이는 세계 최대 무기 수출국인 미국의 갑절에 해당한다.
현재 이스라엘에서 고용의 14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하이테크 부문도 군사 부문과 점령, 감시, 통제에 의해 추동된다.
강탈 자체도 경제적 이득이 되는데, 거기서 이스라엘 노동자들도 저렴한 주택 등의 혜택을 본다.
이스라엘에서 사업 기회, 출세 기회, 고용 기회 전반이 이스라엘군과 점령에 참여하는 것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나머지 부문들은 군대에 의해서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사회 기능들을 수행하기 위해 돌아간다.
이런 강탈과 점령의 프로젝트가 중단된다면 이스라엘 노동계급도 물질적 조건이 어느 정도 후퇴할 수밖에 없다. 교도관들의 생계가 교도소의 존재에 달려 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물론 교도소가 없어진다면 교도관들의 물질적 조건은 전혀 달라질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 국가를 강제로 해체하고 단일한 세속적 민주주의 국가를 창건해야 한다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대안을 마치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모두 내쫓자는 것처럼 곡해하거나 오해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국가가 전복되더라도 이스라엘 국민들은 대부분 돌아갈 곳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국가가 타도될 때에만 이스라엘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해방할 수 있는 조건에 놓이게 될 것이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다른 인민을 억압하는 인민은 스스로도 해방될 수 없다.
[보론2] 휴전 요구의 양면성
현재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 일각에서 제기되는 휴전 요구는 주로 이스라엘을 겨냥해서 제기되고 있다. 현재 그 요구는 이스라엘의 계획에 차질을 줄 수 있다. 이스라엘(과 미국) 자신은 휴전을 거부하고 있다.(물론 미국은 일시적 전투 중단을 이스라엘에 [헛되이]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전장의 상황은 변화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시가전에서 수렁에 빠질 공산이 크다. 그런 상황에서 휴전 요구는 하마스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는 주장도 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무기를 내려놓고 협상을 하는 것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불필요한 후퇴가 될 수 있고, 이스라엘에게는 전열을 가다듬을 기회를 줄 수 있다.
그런 점에 비춰 보면 우리가 보기에 어느 때나 외칠 수 있는 최상의 요구는 ‘팔레스타인들에게 연대하라’일 것이다.
평화주의적 휴전론 이면에는 하마스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분리해서 보는 관점이 깔려 있는 듯하다. 팔레스타인 사람들 일반의 이익과는 동떨어진 하마스의 ‘무모함’과 ‘오만’ 때문에 보통의 팔레스타인 사람들만 불쌍하게 됐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시온주의의 생래적 호전성 때문에 이 전쟁은 단지 하마스만의 전쟁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인들의 전쟁이라는 것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보론 3] BDS 운동은 무엇이고 그 효과는 무엇인가?
BDS 운동은 이스라엘에 대한 보이콧·투자철회·제재를 촉구하는 국제 보이콧 운동이다. 2005년에 시작된 BDS 운동은 팔레스타인의 고립과 기존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 지도부의 한계를 돌파하려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그들은 PLO를 우회하여 BDS 운동을 벌였다.
역사를 보면, 보이콧 운동이 국제 연대가 모이는 초점이 되는 사례들이 있었다. 보이콧 운동이 그 자체로 결정적 타격을 가하지는 못하더라도, 현지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주고 해외에서 연대가 건설되는 초점 구실을 한 것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맞선 보이콧 운동이 바로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데 보이콧 요구가 지지의 초점이 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선 보이콧 운동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50년대였지만, 그 운동이 서구 세계에서 실질적 호응을 얻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20~30년 후였다.
2005년에 시작된 BDS의 경우에는 좀 더 빠르게 국제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특히, 세계사회포럼과 같은 세계적 운동과의 교류가 이를 가능케 했다.
아직 한국 내에서는 BDS 운동이 그만큼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이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의식이 아직 무르익지 않고, 한국과 이스라엘의 교류가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의 관계 정상화를 배경으로 비교적 최근에야 증대한 조건과 관련있을 것이다.
BDS 운동을 전진시키기 위해서는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 지지자들이 자기가 속한 공간과 기층에서 연대를 건설하는 것이 중요하다. 몇 년 전에 BDS가 빠르게 확산되는 데서 핵심적 구실을 한 것은 캠퍼스에서였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공간에서 연대를 건설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여기지 않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기도 하다.
우리가 현재 팔레스타인 연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교훈은 연대를 건설하는 것이 매우 의식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팔레스타인들을 비롯한 아랍인들과 협력해 사태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사태에 부합하는 분석과 함께 의식적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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