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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한 이집트인 난민 연재 기고 3:
필연적 위협에서 미지의 세계로의 탈출

이집트에서 군부 독재에 맞서다 탄압을 피해 한국에 온 이집트인 난민 엘겐디 씨가 자신의 생생한 경험을 기고했다.

2018년, 이집트 군사 법원은 나에게 25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변호인의 조력도, 반론의 기회도 없이 궐석 재판으로 내려진 판결이었다. 이집트에서는 군사 재판의 판결이 군사 통치자의 재가 이후 60일 이내에 집행된다. 판결이 집행되기 전, 나는 친구들과 함께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첫 번째 탈출 시도는 육로를 통해 수단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고, 그 과정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이후 한 지인의 도움으로 카이로 공항을 통해 출국할 수 있었다. 그 지인은 공항 내부 직원과 연결돼 있었고, 우리는 출국 금지 명단에서 이름이 삭제된 덕분에 간신히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학생 신분을 이용해 ‘종교 목적의 여행,’ 즉 ‘우므라(소순례)’라는 명목으로 사우디아라비아로 향했다. 이집트에서는 학업을 끝낸 사람이 병역을 마치기 전에 해외여행을 하는 것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3일만 머물렀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집트와 범죄인 인도 협정이 체결돼 있었기 때문에, 더 오래 머무는 것은 위험했다. 이후 비자 없이 입국이 가능했던 말레이시아로 향했다. 현지 공항에서 3개월짜리 도착비자를 받을 수 있었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말레이시아에서 두 달 반가량 체류했지만, 합법적으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고, 체류 자격도 얻지 못했다. 이 나라는 난민 신청도 받아 주지 않는다. 그렇게 또다시 대안을 찾아야 했다.

한국행

그때 친구 한 명이 한국행을 제안했다.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고, 정치적 망명을 신청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선택의 여지는 많지 않았다. 자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고, 유럽행은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무슬림에 대한 차별 사례들을 많이 접했던 터라 꺼려졌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한국은 내 입장에서 최선의 선택지처럼 보였다.

입국 당시, 우리는 인천공항에서 바로 제지당했다. 공항 내의 한 방에 수용됐고, 그곳에서 무려 14일을 머물렀다. 여러 나라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한국 출입국 조사관들은 우리가 제출한 서류의 진위 여부를 면밀히 조사했다. 조작된 서류를 제출한 사람들과 실제로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명확히 구분해 냈다. 그리고 우리는 입국 허가를 받아, 경기도의 ‘의정부’라는 도시에 정착하게 됐다. 당시 우리를 도와준 몇몇 이집트 출신 친구들의 덕분에 3×4미터 남짓한 아주 작은 방을 구할 수 있었다. 화장실과 주방이 딸린, 네 명이 함께 지내기엔 터무니없이 좁은 공간이었다.

처음 6개월은 정말 힘겨운 시기였다. 한국법상 난민 신청자는 그 기간 동안 취업이 금지된다. 우리는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주변 지인들에게 돈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이후 신분증[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고서야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지만, 모두가 같은 지역에서 일할 수는 없었기에 각자 흩어져 다른 도시로 떠나야 했다. 매일 ‘드림’이라는 인력 사무소를 찾아가곤 했지만, 그곳 역시 우리를 착취했다. 돈을 받고 일을 연결해 준다고 했지만, 약속된 조건과는 전혀 다른 현장으로 보내지기 일쑤였다.

나는 여러 일을 전전했다. 잠시 견디다가 그만두고, 다시 새로운 일을 찾고, 그 과정의 반복이었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조선소에서 일하게 됐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따로 전하고자 한다.

이집트의 감옥에 2년 이상 구금됐던 엘겐디 씨. 위의 작은 사진 왼쪽은 군부 탄압으로 죽은 친구의 시신 옆을 지키는 모습. 오른쪽은 시위에 참가한 모습

내가 겪은 박해는 애초부터 정치적인 문제였다. 나는 이집트에서 군사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했다. 무슬림형제단 소속은 아니었고, 단지 수많은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거리에서 목소리를 냈던 시민일 뿐이었다. 두 차례에 걸쳐 체포됐고, 첫 번째는 75일, 두 번째는 2년 이상을 구금 상태로 보냈다. 석방된 지 1년 뒤, 기존 민간 재판이 군사 재판으로 전환됐고, 결국 나는 25년형을 선고받았다.

가족이 직접적으로 협박을 받은 적은 없지만, 경찰이 내 거주 지역을 지속적으로 들락거리며 행방을 캐물었다. 한국에 도착한 후, 나는 모든 공문서와 시위 참여 사진, 그리고 나의 체포 소식을 실은 신문 기사 등을 제출했다. 난민 심사 중, [면접] 심사관은 내 정치적 소속을 물었고, 나는 특정 조직에 속해 있지 않았으며 일반 시민으로서 시위에 나섰을 뿐이라는 점을 명확히 밝혔다.

결국 정식으로 난민 신청이 접수는 됐으나, 아직까지도 그 신청에 대한 [난민 인정] 결정은 나오지 않고 있다.

이집트인 난민 인정 소송 지원에 연대를 호소합니다!

  • 온라인 탄원서

https://bit.ly/난민인정탄원

  • 소송 비용 마련 모금

카카오뱅크 3333-31-8210896 (김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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