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한 이집트인 난민 연재 기고 4:
난민의 노동 — 현대판 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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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에 있는 ‘현대삼호조선소’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을 때였다. 나는 몇몇 이집트 출신 친구들과 함께 같은 팀으로 일했다. 우리는 성실하게 일했고, 작업 성과도 뛰어나 팀장에게 자주 칭찬을 받았다. 어느 날, 작업 중간 휴식 시간에 팀장은 나와 두 친구를 따로 불러 세워, 성실한 근무 태도를 높이 평가하며 우리를 공개적으로 치하했다.
하지만 바로 그날, 휴식 후 다시 작업에 복귀한 직후였다. 나는 갑작스럽게 추락 사고를 당했고, 손이 부러졌다. 그 순간 회사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현대삼호는 의료 설비를 갖춘 대기업이지만, 고용주는 구급차를 부르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차량으로 나를 병원에 데려갔고, 현장에서는 어떠한 응급 처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행동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사고가 회사 책임으로 공식 접수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병원에서는 엑스레이 촬영 후, 심한 골절로 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임시 고정을 해 주고, 수술 일정을 잡은 뒤 귀가시켰다. 수술은 예정대로 진행됐고, 2주 동안 입원 치료를 받았다. 병원비는 청구되지 않았다. 퇴원 후 고용주는 나를 두 차례 병원으로 데려다주며 경과를 확인했지만, 그 이후로는 연락이 두절됐다.
내가 더 이상 그에게 수익을 가져다주는 노동력이 아니게 되자, 그는 나를 외면했던 것이다.
사고가 작업 중에 발생했음에도, 그는 책임지지 않았다. 병상에 누운 나는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도 버텨야 했다. 가족도, 보호자도 없이 홀로 한국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결국 나는 치료를 계속 받기 위해 고용노동부에 민원을 제기했다. 그제야 고용주는 전화를 걸어, 민원을 철회하면 치료를 계속 지원하고 약간의 급여를 지급하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조건은 문서화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이 제안을 거절했고, 노동부를 통한 정식 절차를 계속 밟기로 했다.
그러자 그는 내 동료들을 해고하겠다고 협박했다. 실제로 함께 일하던 친구들 중 약 네 명이 해고당했고, 이로 인해 나에 대한 감정이 틀어졌다. 하지만 그건 내 책임이 아니었다. 고용주는 그들을 협박의 도구로 삼아 나를 심리적으로 압박한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병원에서도 이상한 기류를 느꼈다. 병원 측은 치료에 미온적이었고, 고용주 측과 묘한 교감이 있는 듯했다. 나는 노동부에 요청해 치료 기관을 목포에서 인천으로 옮겼고, 이후 1년에 걸쳐 수술과 물리치료를 병행했다. 그러나 마지막 진단에서 의사는 “장애가 없다”며 보상 대상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사고로 입은 신체적·정신적 고통, 그리고 경제적 손실은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이 사건 외에도 목포에서 또 하나의 기억이 있다. 조선소가 아닌, 일용직으로 일하던 날의 일이다. 어느 날 산에서 잡초를 제거하는 작업에 투입됐는데, 작업 중 실수로 잘못된 식물을 베어 버렸다. 작업 감독자는 처음에는 언성을 높이며 욕설을 퍼부었고, 두 번째 실수에는 나를 때리기까지 했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더 쉽게 분노를 터뜨렸던 것이다.
나는 화가 치밀어 작업 도구를 내려놓고 현장을 떠났다. 이후 경찰서에 찾아가 피해 사실을 신고했고, 신원 정보를 제공하며 사건 경위를 상세히 진술했다. 조사관은 내 말을 경청했고, 다음 번 출석 요청도 받았다. 하지만 그 후 이 사건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담당자에게 문의하자 사건번호가 없어서 조회할 수 없다고 했고, 결국 사건은 흐지부지 묻혀 버렸다. 법원으로부터는 아무런 통보도 받지 못했다.
이 두 사건은 한국에서 겪은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단순한 부상이나 고용 문제 그 이상이었다. 차별, 착취, 외면,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침해받았다는 것 등의 감정들이 내 마음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결국 나는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외로움, 나약함, 그리고 무력감은 무엇보다도 깊고 아팠다. 내 권리를 지킬 수 없는 현실은, 그 무엇보다도 나를 무너뜨리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