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론과 세습론은 청년이 겪는 불평등을 설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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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청년들이 겪는 열악한 조건과 심각한 불평등에 주목하는 책들이 최근 많이 나왔다.
이 책들은 대체로 두 가지 주장으로 수렴되는 듯하다. 하나는 청년 세대가 겪는 불평등의 원인을 세대 간 격차에서 찾는 ‘세대론’이다. 다른 하나는 특권 대물림이 문제라고 보는 ‘세습론’이다.
사실 세대론은 익숙한 레퍼토리다. 2007년 출간된 《88만 원 세대》에서 우석훈 씨는 “기성세대의 누군가”가 청년 세대 고통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최근의 논의들은 과거보다 좀더 대담한 듯하다. “계급과 세대가 거의 일치”(《불평등의 세대》 저자 이철승 교수)한다, “386세대의 가해자성 인식이 필요하다”(《386세대유감》) 하고 주장한다.
이 담론들이 주로 저격하는 대상은 기성 세대 중에서도 특히 ‘386세대’(1980년대에 민주화 운동을 경험한 세대로 현재 50대를 일컫는다)다. 이 세대가 현재 한국 사회의 경제와 정치에서 중추적 구실을 하게 된 상황과 맞물린 듯하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에 이 세대 인물들 여럿이 포진한 상황과도 연관돼 있을 것이다.
다시 만난 세대
물론 세대론이 지적하듯이 오늘날 청년들의 처지는 이전 세대보다 어려워졌다.
가장 협소하게 실업자를 규정하는 정부의 공식 통계만 보더라도 청년 실업률은 1990~1996년에 4~5퍼센트 수준이었지만 2014년 이후 지금까지 9~11퍼센트에 육박하고 있다. IMF를 불러들인 경제 위기 직후 1998년 공식 청년 실업률이 12퍼센트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심각성이 드러난다.
오늘날 청년들은 이전 세대보다 더 많이 대학에 진학하지만 좋은 일자리를 얻기 더 어렵다.
하지만 이런 현실은 기성 세대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 상황이 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기적 불황은 자본주의에 내재돼 있는 속성이고, 자본주의가 늙고 병든 요즘은 불황이 장기화되고 있다.
자본주의가 빠른 성장기였을 때는 상대적으로 일자리를 얻기 쉽다. 기업들은 팽창하는 시장에서 더 큰 몫을 차지하기 위해 투자를 늘리고, 이에 필요한 인력들도 늘리며 심지어 노동력 확보를 위한 경쟁도 한다.
그러나 호황은 지속되지 못하고 위기로 접어든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동학으로 말미암아 이윤율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기업들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기계 등 노동절약적 기술에 훨씬 많은 투자를 한다. 하지만 자본가들이 얻는 이윤의 원천은 노동자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이윤율이 점점 줄어든다. 그러면 기업주들은 투자와 신규 채용을 꺼리고 소위 “과잉 노동력”을 줄이는 데 혈안이 된다.
이처럼 세대별 고용 환경은 체제의 동학에 영향을 받는다. 호황기 당시 청년 세대(현 기성세대)가 지금 청년 세대보다 조금 나은 조건 속에 있었을지라도, 기성 세대가 오늘날 청년 세대의 어려움을 낳았다고 볼 순 없다. 기성 세대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가 문제다.
또한 이런 세대론은 기성 세대를 단일한 집단으로 보는 문제가 있다. 생물학적으로 비슷한 나이로 비슷한 시대를 살았다고 해서 이해관계가 같다고 볼 수 없다.
이른바 386세대에는 운동권 출신 민주당 정치인들(조국, 임종석 등)만 있는 게 아니다. 재벌(삼성 이재용, 현대차 정의선 등), 벤처 기업 1세대들(카카오 김범수, 넥슨 김정주, 안랩 안철수 등), 사교육 시장을 주름잡는 학원장들과 스타 강사들, 그리고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까지 매우 다른 계급 집단들이 뒤섞여 있다.
그중 사회의 부를 좌지우지 하는 권력을 가진 지배계급은 노동자들을 착취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한편, 경제 위기 시기에 자본가들은 신규 채용을 줄이는 것뿐 아니라 기존 노동자들을 내쫓거나 더 쥐어짠다.
기성 세대 노동자들도 높은 노동강도, 퇴사 압박 등에 시달린다. 지난해 40~50대 장년층의 비자발적 퇴직자(직장 휴·폐업, 명예퇴직, 정리해고 등)는 49만 명에 육박해 5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다(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물론 심대한 정치적 경험을 함께한 집단을 하나의 정치적 세대로 규정하는 건 유효할 수 있다. 예컨대, 1980년 광주항쟁은 ‘광주세대’라고 부를 만한 한 세대를 급진화시켰다. 하지만 언제나 세대 내에도 불균등성이 있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안에서 정치적 분화가 벌어진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주의 투쟁을 함께 했을지라도, 세 번 집권한 당의 주요 세력이자 지배계급의 일부로서 기업주들의 노동자 착취를 돕는 정치 권력자들과 이들이 비호하는 자본가들한테서 착취받는 정규직 노동자들을 동급에 놓아선 안 된다.
세습 자본주의
반면, 세습론은 세대를 단일하게 보기를 반대하며 “20대 내부의 격차”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청년이 다 고통스럽고 힘든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소수의 청년들은 부모 배경을 통해 부, 인적, 문화적 네트워크 등을 물려받는다는 것이다. 특히 조국 논란을 거치며 이런 비판의 목소리가 더 높아진 듯하다. 진보 진영 내에서도 ‘세습 자본주의’, ‘계급 세습 사회’가 문제라는 주장이 꽤 많다.
세습 담론은 청년들이 아무리 “노오력”해도 소용없다는 “헬조선”, “금수저” 담론과 연결되는데, 이는 최근의 사회적 경험에도 얼핏 부합해 보인다.
남한 자본주의도 이제는 계급 간 이동의 역동성이 줄었다. 김낙년 교수(동국대) 연구를 보면, 부의 축적에서 상속이 기여한 비중이 1980~1990년대 27~29퍼센트에서 2000년대 42퍼센트로 상승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은 옛말이 된 지 오래다.
또한 조국과 나경원의 자녀가 부모의 인적, 사회적 네트워크 도움을 받아서 명문대에 진학하는 모습은 이런 불평등을 단적으로 보여 줬다. 부유층들이 자녀의 명문고 진학을 위해 위장전입을 하는 모습도 종종 본다.
세습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런 세습을 불평등의 원인으로 보고 이런저런 특권 세습을 타파하는 것에 주목한다. 특히 교육 불평등을 특권 세습의 중요한 매개고리로 본다.
그러나 세습은 이 사회의 근본적 불평등(생산수단의 지배 여부)의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다.
자본주의에서는 생산수단을 지배하는 소수가 노동계급이 만든 부의 대부분을 통제한다.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대부분은 그들에게 착취 받아야 한다. 생산수단은 일부의 손아귀에 사유재산으로 존재하고 이는 국가의 법과 무장력으로 보호된다. 국가 지배자들과 고위 정치인들, 자본가들은 온갖 연줄로 연결돼 있다.
이 사회의 생산수단을 소수가 독점한다는 근본적 불평등으로 인해 소수 지배계급의 자녀들은 대다수 노동계급 자녀들은 상상도 못할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특권들을 누린다.
기회의 평등과 공정성
그런데 최근의 ‘세습론’은 세습이 자본주의 계급 사회의 본질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는 약점이 있다.
“세습 자본주의” 비판 논자들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가 공정하게 작동할 수 있다고 보는 것과 연관돼 있는 듯하다. 그래서 자수성가를 더 나은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세습을 비판하는 담론 중 일부가 “기회의 평등”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도 한 사례다.
사실 오늘날 많은 청년들이 정유라, 조국 자녀, 나경원 자녀 등의 특혜를 보며 ‘공정성’을 갈망하는 것도 이런 인식에 기반해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진정한 기회의 평등이 실현될 수 없다. 생산관계의 불평등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공정 경쟁’을 위한 제도를 만들더라도 근본적인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기회 자체가 불평등하게 분배되기 때문이다. 조국 자녀의 스펙 조작이 들키기 전까지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음을 보라. 계급으로 분단된 자본주의 체제가 근본적으로 불공정하다.
이 시스템을 그대로 둔 채 공정성을 얘기하는 것은 공허한 환상일 뿐이다. 오히려 공정성 담론은 기회와 결과의 불평등을 개인 능력의 문제로 은폐하는데 이용될 수 있다.
계급에 대한 오해
이처럼 체제를 긍정하고 세습은 자본주의를 역행하는 처사로 보는 관점은 한계가 뚜렷하다. 요새 세습론 저서들은 최상위 부자들을 비판하는 것보다도 소위 중산층 두들기기에 더 몰두한다. 한 저서는 “중산층”을 “취업자 중 소득 상위 15퍼센트 정도를 차지하는 대기업 고소득 화이트 칼라와 전문직 종사자 등을 상위 중간계급”(《세습 중산층 사회》)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처럼 세대론과 세습론 같은 담론은 모두 자본주의적 착취를 핵심 분단선으로 보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이 사회가 소득, 교육 수준, 부동산 소유 등의 기준으로 상위 20대 하위 80 혹은 10대 90로 나뉘어져 있다며 이러저러하게 분단선을 긋는 주장들과도 연결된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계급론이라기 보다는 막스 베버의 계층론과 더 닮아 있다. 베버는 사람들이 소유한 재화, 지위, 직업에 따라 계급이 규정된다고 봤다. 파편화에 기초해 계급 개념을 규정한 것이다.
이런 계급 개념은 서로 다른 집단들끼리 이해관계가 충돌하는지, 왜 충돌하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그저 차이를 묘사할 뿐이다.
반면, 마르크스는 계급이 무엇보다도 생산관계를 둘러싸고 사람들이 맺는 관계라고 봤다.
자본주의 사회에는 공장, 건물 등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들과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고 노동력을 판매해 생활해야만 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노동자들은 생계를 위해 노동력을 팔아야만 하고, 자신이 받는 임금보다 더 많은 부를 생산해 낸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임금 몫 이상으로 창출하는 가치(잉여가치)를 가져가고, 이를 축적해 더 많은 부를 소유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무리 고소득 노동자라 할지라도 그는 착취당하고 있고 그의 임금 이상의 이윤을 기업주에게 벌어다 주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에 따르면 청년들이 겪는 실업, 불안정한 일자리, 불평등은 이런 착취 관계에서 비롯됐다. 기업들은 이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존 노동자에게 최대한 많은 잉여가치를 뽑아내려 하고, 노동절약적 기술에 투자해서 노동자 한 명이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할 수 있도록 만든다.
경제 위기 때 기업주들은 신규 채용을 줄이고, 기존 노동자를 더 쥐어짠다. 그래서 새 세대 청년들이 노동시장에 진입하기 쉽지 않고, 진입하더라도 경제 상황에 따라 ‘조정’이 가능하도록 더 불안정한 고용 형태를 강요받는다. 결국 청년들은 실업으로, 기존 노동자들은 노동 강도 강화로 고통받는다.
또한 기업주들은 실업자와 기존 노동자를 대립시키고 이간질하며 둘 모두의 조건을 악화시킬 수 있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노동계급 일부에게 과도노동을 시킴으로써 나머지 부분을 강요된 나태에 빠지게” 하고, 또 그 반대로 “산업예비군 때문에 취업자가 과도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자본주의 체제가 낳은 불평등에 맞서 청년과 노동자가 계급을 중심으로 단결해야 하는 이유다.
소위 명문대 학생들은 세습 엘리트일까?
‘세습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교육 제도와 명문대 학벌을 통해 계급이 재생산된다고 주장한다. 그런 담론 중 일부는 상위권 대학 학생들을 부모 자리를 세습받을 준비를 하는 엘리트들로 묘사하기도 한다.
물론 자본주의 교육 제도는 계급 재생산에 중요한 구실을 한다. 또한 소위 상위권 대학에 상층 계급 배경의 학생들이 더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학생들이 모두 상층 계급 출신인 것은 결코 아니다. 고스란히 상층 계급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오늘날 소위 상위권 대학의 학생들도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경우 노동자가 되고 공부를 하면서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에 찌들어서 산다.
이러한 청년들을 엘리트라며 냉소하는 생각의 배경에는 이들이 부모 세대의 계급, 인적 네트워크, 심지어 의식까지 그대로 물려받는다고 보는 가정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노동시장에 진입하지 않은 청년은 특정 계급에 속한다고 할 수 없다. 이들은 직접 착취를 받지는 않지만 교육 등을 통해 이데올로기에 더 큰 영향을 받는 사회 집단이고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에 민감하다.
일상적으로 학생이나 실업 청년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 소외와 파편화의 경험 속에서 살아간다. 이런 만연한 소외가 특정 이데올로기적 문제와 결합됐을 때 폭발적 저항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상대적으로 사회적 문제에 대한 고민을 할 약간의 여유가 있는 상위권 대학 학생들이 투쟁의 시발점이 되는 일도 벌어졌다.
그런 점에서 적잖은 진보 세력들이 지난해 가을 서울대, 고려대 학생들의 조국 임명 반대 시위를 엘리트들의 보수적인 반발이라 취급한 것은 문제였다. 사실 이 학생들이 분노한 이유는 일차적으로 그것이 자기 대학의 부정부패와 관련돼 있었기 때문이다. 본질에서는 이화여대 학생들이 정유라 부정입학에 분노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런 부조리는 고졸, 지방대 청년들이 겪는 이 사회의 불평등과 떨어져 있지 않다.
서구의 1968년 반란 때도 기성 언론은 물론이고 일부 좌파 지도자들조차 학생들의 저항을 “부잣집 자식들”의 소행이라며 격하했다. 하지만 당시 투쟁은 소위 ‘명문대’에서 시작해 이들의 투쟁에 공감한 노동계급 배경 청년 비중이 높은 대학으로 확산됐고 이것이 노동자 대파업의 도화선이 되어서 유럽 전역을 뒤흔드는 반란으로 발전했다는 점을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