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연대〉가 뽑은: 2024년 주요 국내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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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석열 군사 쿠데타 실패와 이후 투쟁
12월 3일 오후 10시 28분, 한국에서 43년 11개월 만에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경제·안보 위기를 지배계급에게 유리하게 해결하려다가 도리어 회복불능의 정치적 위기에 빠진 윤석열이 군사 쿠데타를 감행한 것이다. 계엄 포고령은 국회와 정치 활동, 언론·집회·파업의 자유를 금했다. 실탄 무장한 특전사 부대들이 출동했다.
끔찍한 반동 기도를 막아낸 것은 보통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무장 계엄군과 경찰에 맨몸으로 맞섰다. 덕분에 야당은 계엄해제 요구를 통과시킬 수 있었다.
사기가 오른 대중은 윤석열 즉시 탄핵을 요구했다. 청년·대학생들이 빠르게 정치화됐다. 결국 대중 저항의 압력으로 쿠데타 미수 열하루 만에 국회에서도 윤석열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정권 퇴진 압력에 여권이 저항하면서 한국 정치는 더욱 양극화되고 있다. 쿠데타에 맞섰던 민주당도 일관되게 우파에 맞서지 못하기 때문에 동요하고 있다. 그러나 대중은 여기서 멈출 기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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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총선 윤석열 대패
2024년 총선에서 집권당인 국민의힘은 야당들의 반(反)윤석열 선거연합에 참패를 당했다. 총선 전부터 윤석열의 친미·친일 노선과 강경 신자유주의 긴축 정책,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권위주의적 조처들에 대중의 분노와 반감이 컸다. 윤석열은 중도 이미지의 한동훈을 당대표로 내세웠으나 먹히지 않았고 오히려 자중지란만 겪었다.
총선 결과는 국민의힘과 민주당 사이 예리한 정치적 양극화도 드러냈다. 양당 사이에서 중도 협치 노선을 재 보던 정당들은 몰락했다.
진보당은 독자성을 일부 양보하고 민주당과 선거연합을 결성해 3석을 확보했다. 정의당은 선거연합에는 불참했지만, 윤석열 정부 내내 차별화된 투쟁력을 보여 주지 못한 탓에 기존 의석을 모두 잃었다.
3. 뉴라이트와 역사 전쟁
윤석열은 올해 동북아역사재단(1월 박지향), 국사편찬위원회(5월 허동현),한국학중앙연구원(7월 김낙년) 등 정부 3대 역사 기관에 뉴라이트 인사를 임명했다. 지난해 홍범도 장군의 육사 흉상 철거 문제로 불거졌던 역사전쟁을 재개한 것이다.
윤석열은 외교·안보·국방을 관장하는 자리에도 신원식, 김용현, 김태효 등 뉴라이트나 극우 인사들을 중용했다.
이런 극우화는 윤석열이 미국 중심의 제국주의 질서가 약화되는 상황에서 강경 신자유주의와 한미일 군사 동맹 노선을 고수하려고 벌인 도발이다. 윤석열의 극우 인사 중용은 극우의 주류화, 주류의 극우화라는 세계적 현상과 조응한다. 경제·안보 위기 속에서 더 권위주의적이고 반동적으로 정부를 운영하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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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의 등장과 성장
지난해 10월 7일 이후 분출한 글로벌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의 일부로서 한국에서도 대중적인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이 성장했다.
연대체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이 주도하는 이 운동에는 재한 팔레스타인인을 포함한 아랍인, 유학생, 이주노동자 등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함께하며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에 대한 연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
매주 서울 도심에서 집회·행진을 벌여 왔는데, 올해 6월과 10월 전국 집중 행동의 날에는 각각 2000여 명이 참가하는 행진을 벌여 한국 사회를 놀라게 했다.
지역, 대학, 노조에서 펼쳐진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새롭고 다양하고 글로벌한 운동이 한국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인천, 부산, 울산, 대구, 수원, 원주 등 지역에서도 격주 집회, 매주 홍보전, 모스크 방문 등 헌신적인 활동들이 이어졌다. 여러 대학에서 내외국인 학생들이 함께 연대 모임을 만들었다. 교사들은 여러 학교에서 팔레스타인인 초청 강연 수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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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의대 증원과 의료 대란
윤석열 정부는 총선을 두 달 앞둔 2월 의대 입학 정원을 2000명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의대 증원에 대한 지지 여론은 매우 높다. 응급실 뺑뺑이, 소아과 오픈런 등 필수의료 공백으로 인한 불편과 걱정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가뜩이나 부족한 의사들이 수익성 좋은 분야로 쏠린 결과이기도 했다. 한국 정부가 그동안 의료를 시장에 내맡겨 온 결과다.
그런데 윤석열은 의료 시장화를 가속하는 방편으로 의대 증원을 추진했다. 시장 개방을 위해 의사들의 독점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였다. 의료 시장화 확대를 바라던 대형 병원들과 제약·바이오·IT 기업들이 윤석열의 이 정책을 크게 반겼다.
전공의들을 중심으로 의사들 중 일부는 의대 증원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의료 대란 속에서도 자신들의 이익만 중요하다는 태도는 지지받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1년 가까이 집단 사직과 휴학을 이어가고 있다.
6. 필리핀인 가사관리사 입국
올해 8월 필리핀인 가사노동자 100명이 한국에 와 9월부터 일을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이주노동자 유입 확대에 노동운동과 좌파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가 뜨거운 이슈가 됐다. 이주노동자는 이제 한국 경제의 필수불가결한 일부가 됐고,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필리핀인 가사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고통받고 있다. 이 때문에 보름여만에 2명이 ‘이탈’했고, 정부는 처우 개선은커녕 이들을 붙잡아 추방했다.
일부 노조 지도자와 좌파들은 열악한 처우를 이유로 이주노동자 유입을 반대한다. 여기에는 내국인 노동자의 임금과 고용이 위협받는다는 우려가 깔려 있다.
그러나 이주 유입 반대는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는 데 힘을 실어 줘서 사용자들을 유리하게 만든다.
이주노동자가 한국에 유입되고 고용되는 것을 무조건 환영해야 한다. 노동계급의 단결과 연대는 노동자 모두의 조건을 개선하는 데서 단연 가장 필수적인 요인이다.
7. 아리셀 참사와 이주노동자
6월 24일 리튬 배터리 제조업체 아리셀 공장에서 화재로 23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났다.
그중 18명이 이주노동자였다. 17명이 중국 동포(조선족)였고, 라오스인도 1명 있었다. 이주민 집단 거주지 인근 공장에서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이주민이 사망한 것이다.
이주노동자를 일회용 소모품 취급하는 기업과 정부 때문이었다. 아리셀 사용자 측은 비슷한 사고가 반복돼 왔음에도 안전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는 기업 이윤을 위해 안전 규제를 완화해 왔다. 이들은 참사 후에도 책임 회피로 일관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는 여전히 산재율이 높은 한국 노동계급의 일부다. 이주노동자 유입을 환영하며 이들이 처우 개선을 위해 투쟁에 나서도록 고무하고 함께 싸워야 한다.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들에게도 깊은 위로를 전한다.
8. 동덕여대: 청년 여성들의 전투성
동덕여대 학생들이 남녀공학 전환 반대, 총장 직선제 등을 요구하며 11월부터 12월 초까지 본관 점거 투쟁을 벌였다.
이 투쟁의 이면에는 학교의 비민주적 불통 행정과 학생 무시, 또 열악한 교육 여건에 대한 학생들의 광범한 불만과 분노가 있다.
학생들이 전투적으로 투쟁에 나서자 보수주의자들은 대학생들의 전투성이 대규모 행동으로 발전해 혹여라도 반정부 투쟁과 이어질까 봐 전전긍긍하며 “비문명,” “폭력”이라고 이 투쟁을 비난했다.
윤석열의 쿠데타 미수 이후 주목받은 청년 여성들의 정치화와 전투성은 동덕여대 투쟁에서 먼저 선보인 것이다.
현재 동덕여대 당국은 투쟁한 학생 고소, 학생회 상대 가처분 신청 등으로 보복하고 있다. 학생들은 굴하지 않고 저항하고 있고, 지지와 연대도 넓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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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학생운동의 부활
윤석열의 쿠데타 기도를 계기로 학생운동이 되살아났다. 쿠데타의 밤에 맨몸으로 계엄군을 막은 시민들의 용기는 대학생들의 정의감에 불을 지폈다.
캠퍼스와 거리에서 대학생들이 퇴진 운동에 대거 나서기 시작했다. 전국 곳곳에서 시국선언과 학생총회가 열렸고, 12월 13일 서울 신촌에서 열린 대학생 총궐기에는 5000여 명이 모여 윤석열 퇴진을 외쳤다.
기말고사 기간에도 대학생들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며 혹한의 거리로 나섰다. 겨울방학 시작 후에도 수많은 대학생들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며 거리를 지키고 있다.
대학생들의 저항은 윤석열 퇴진 투쟁에 에너지를 불어넣고 있다. 학생들의 투쟁이 더욱 커진다면 노동자들도 고무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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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삼성전자 파업과 생계비 저항의 잠재력
고물가·고금리 등 생계비 고통에 맞선 노동자 저항이 확대될 조짐을 보인 가운데, 올해는 삼성전자에서 창사 55년 만에 처음으로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섰다.
한국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굴지의 기업에서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과 성과급 개선 등을 요구하며 투쟁에 나선 것은 최근 노동계급의 생계비 위기가 보편적 현상임을 보여 줬다.
‘무노조 경영’을 일삼아 온 삼성답게 노동자들은 노조 인정도 요구했다.
“우리는 사용자 측의 소모품이 아니다”라는 파업 집회의 핵심 구호는 켜켜이 쌓여 온 노동자들의 울분을 잘 보여 줬다. 위험한 작업 환경과 고강도 노동 등. 삼성전자 파업에 대한 노동계급의 여론도 우호적이었다.
반도체 기술 패권 경쟁 격화 속에서 경기 침체와 경영 위기 위험이 제기되자 소심해진 노조 지도부는 요구를 충분히 따내지 못한 채 파업을 종료했다. 그러나 처음 단체 행동에 나선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한 달 가까운 파업은 투쟁 보편화의 가능성도 보여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