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군사 쿠데타(미수)의 밤을 재구성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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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의 군사 쿠데타 계획과 12월 3일 밤에서 4일 새벽 사이 쿠데타 기도의 전모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언론 보도들을 보면, 윤석열은 무력으로 정적들을 제거하고 국회를 해산해 극우적이고 서방 제국주의 친화적인 통치를 펼치려 했다.
쿠데타 기획자들은 모두 올해 총선이 총체적 부정선거였다는 망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자들은 민주주의를 혐오했다. 계엄 포고령 1호는 국회와 정당 활동, 집회 시위의 자유를 금했다. 12월 3일 낮 국방장관 김용현은 “국회가 국방 예산으로 장난질인데 탱크로 확 밀어 버려” 하고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그날 밤 윤석열은 계엄군에게 국회의원 체포 지시를 내리고 의원들을 본회의장에서 “끌어내라”고 지시했다.
대통령 경호처장을 지낸 뒤 국방장관이 된 김용현과 그 비선 라인은 꽤 오래 전부터 나름 치밀하게 쿠데타를 기획됐다. 특히 북한을 자극해 안보 위기를 계엄의 빌미로 삼으려고 했다.
상당수 군 장성과 영관급 장교들이 가담했고, 경찰 최고 수뇌부가 쿠데타에 깊숙이 관여했다. 김용현의 후임 대통령경호처장으로 임명된 박종준이 경찰 수뇌부 출신으로 가교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박종준은 현재 대통령실 압수수색을 가로막고 있다.
쿠데타 실패 직후 일부 군 지휘관들과 경찰 최고 수뇌부가 국회에 나와 ,“비상계엄을 TV 보고 알았다”고 말한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비상계엄 직전 두 곳에서 쿠데타 모의
12월 3일 저녁, 두 곳에서 쿠데타 기도가 준비되고 있었다.
삼청동 안가에서는 윤석열이 군 고위 지휘관들을 불러, 계엄 선포 후 집행할 임무들을 직접 지시했다. 김용현, 계엄사령관을 맡게 될 육군 참모총장 박안수, 경찰청장 조지호, 김건희 라인으로 알려진 서울경찰청장 김봉식 등이 그들이었다.
그 자리에서 윤석열은 계엄 선포 후 봉쇄하거나 장악할 장소들, 체포 리스트 등을 지시했다.
또 다른 쿠데타 모의 장소는 (방첩사령부와 함께) 계엄 설계의 핵심 구실을 한 정보사령부의 판교 100여단 사무실이었다.
그날 낮 김용현의 탱크 발언을 들은 국방부 정책차장이 이 자리에 있었다.
특히, 육군 제2기갑여단장이 참석했다. 육군 전차 부대 지휘관이 직속 상관에게 보고하지도 않고 작전 지역을 벗어나 정보사령부에서 대기한 것이다. 제2기갑여단은 1979년 12·12 쿠데타 때 출동해 서울 중앙청을 장악한 전력이 있다. 최정예 전차 부대가 서울 도심으로 진격할지도 모를 절체절명의 시간이었다.
같은 건물 다른 사무실에선, 노상원 같은 비선 라인이 선발한, (북파 공작원 부대로 잘 알려진) HID 요원 등 베테랑 특수전 요원 38명이 과천 중앙선관위원회 청사 투입 지시를 받고 있었다. 그들의 1차 임무는 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윤석열은 국무회의를 긴급하게 소집해 비상계엄 선포 방침을 통과시켰다. 일부가 반대 의견을 밝혔다지만, 이제 와서 하는 핑계일 뿐이다. 사표 낸 사람도 없고, 미리 언론에 폭로한 사람도 없다. 그들은 최종적으로 모두 동의했고 서명까지 했다.
비상계엄 선포 이후
오후 10시 28분 비상계엄이 선포되자마자 과천 중앙선관위 청사는 방첩사·정보사 요원들에 의해 바로 장악됐다. 그들은 서버를 복사해 오거나 여의치 않으면 뜯어 오고, 직원을 체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서버 재조립을 염두에 둔 듯 서버 연결선들을 촬영하는 모습이 CCTV에 찍혔다.
10시 30분, 김용현은 전군 지휘관 회의를 화상으로 소집했다. 김용현은 계엄군의 군사 활동은 모두 자신이 책임질 테니 명령에 복종하라고 지시했다. 이 자리에서 계엄사령관 등 계엄사 보직을 임명했다. 김용현은 화상회의 소집으로 만에 하나 쿠데타에 반대할지도 모를 지휘관들을 자기 눈 앞에 붙잡아 두려 한 듯하다.
오후 10시 41분,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가 소속 국회의원 전원에게 신속한 계엄 해제 결의를 위해 국회 본회장으로 즉시 모일 것을 지시했다. 그 비슷한 시간에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시민들에게도 국회로 와 달라고 호소했다. 그 호소를 듣고, 아직 국회의사당이 봉쇄되지 않았고 쿠데타를 막을 기회가 ‘지금 그곳에’ 있음을 직감한 사람들이 국회의사당 앞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오후 11시 30분 일체의 정치 활동을 금지한 비상계엄 포고령 1호가 발표된 후,서울경찰청장은 계엄군만 국회에 진입시키고 국회의원들은 막으라고 국회경비대에 지시했다.
국회의원들은 자정 넘어서까지 경찰을 피해 담을 넘어 국회로 들어갔다. 시민들은 경찰과 대치하고 계엄군을 맨몸으로 막으며 의원들의 국회의사당 진입을 도왔다.
국힘 의원단은 비상계엄 선포 후 한 시간 넘게 우왕좌왕하다가 국회로 모이기로 했으나, 707특임대가 국회에 투입된 자정 즈음, 원내대표 추경호가 돌연 의총 장소를 당사로 변경했다.
비상계엄 때 출동한 계엄군은 1500여 명이나 된다. 당초 알려진 것의 갑절이 넘는다. 출동 부대들은 저격용 총, K1 기관단총, 권총 등 화기 외에도 방탄모, 방탄조끼 등 유혈 사태를 대비한 장비들을 소지했다. 출동 계엄군은 실탄을 적어도 1만 발 소지하고 있었다.
특수전사령부가 쿠데타의 핵심 전력이었다. 1139명이 출동했다. 특전사는 주한미군이 지휘권을 갖지 않는 부대로, 단골 쿠데타 선봉 부대다. 707특임부대(참수 부대)가 전투용 헬기인 블랙호크 12대에 나눠 타고 국회 경내에 진입했다. 1·9 공수 여단은 육로로 국회에 진입했다. 3공수는 선관위 청사에 투입됐다.
윤석열의 말과 달리, 수도방위사령부가 국회에 투입한 병력에는 사병 61명이 포함됐다. 징집 사병을 군사 쿠데타에 동원한 것이다.
정보사령부가 선관위 사무실 장악을 총괄 지휘했다.
방첩사는 국회와 선관위 요인들을 체포하는 데에 주력했다. 방첩사는 경찰과 국가정보원의 지원을 받아 체포된 요인들을 수방사의 B1 지하 벙커에 구금시킬 계획이었다.
707특임대가 국회의사당 창문을 뜯고 진입을 시작했을 때 본회의장에 들어온 의원들은 개회에 필요한 150명이 되지 않았다. 긴장이 최고조에 이른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 윤석열은 국회의원들을 끌어내라고 수방사령관과 특전사령관에게 전화로 다그쳤다. 특전사 부대원들이 야간투시경을 착용한 것으로 짐작컨대, 단전 조처도 계산에 있었던 듯하다.
12월 4일 새벽 1시, 국회 안팎의 대치 속에서 참석 의원 190명 만장일치로 비상계엄 해제 요구가 가결됐다. 국회 밖 시위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귀가하는 사람은 없었다. 윤석열이 계엄 해제를 공식 선언해 계엄군이 철수하기 전까지는 상황이 끝난 게 아니라며 서로 독려했다. 새벽으로 갈수록 청년과 대학생들이 늘었다.
국회 계엄 해제 요구 결의 이후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 직후 윤석열은 합동참모본부 지휘통제실을 찾아가 김용현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윤석열은 국회 병력 투입 숫자가 적었다고 불평했다고 한다. 그 시각, 계엄사령부의 주요 보직을 맡은 육군본부 장교 34명이 버스를 타고 지휘 통제실을 향해 출발했다. 후속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윤석열과 그 일당들은 2차 계엄 선포도 계산에 넣었던 듯하다. 실제로 국회 계엄 해제 결의 후 국회의장 공관 앞에 무장 병력이 출동해 계엄 해제 후까지 대기한 것이 CCTV에 찍혔다.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 이후에도 쿠데타를 지속할 방법은 전면적인 무력 행사뿐이었다.
쿠데타 세력은 두 번째 계엄이 성공할 거라는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명분 없는 쿠데타에 동원된 최정예 부대가 결연한 대중 저항 앞에서 이미 사기가 떨어진 상태였다. 국회에서 해제 결의가 된 마당에 사병과 부사관들의 동요를 막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고위 장교들도 무리수를 걱정했던 듯하다.
반면, 대중은 쿠데타에 맞선 저항은 더 급진화됐을 것이다.
결국 비상계엄 선포 6시간, 국회 계엄 해제 요구 결의 3시간 반 만인 12월 4일 새벽 4시 27분, 윤석열은 어쩔 수 없이 계엄을 해제했다.
한편, 쿠데타 기획의 핵심 역할은 공식 지휘 라인이 아니라 전직 정보사령관(김용현의 심복 노상원)이 맡았다. 이 자는 부하 성추행 유죄로 전역해 무속인이 된 자다.
박근혜 퇴진 운동 때도 기무사령부(현재 방첩사령부)가 계엄을 모의한 바 있다. 그때는 군의 광화문광장 장악을 1차 목표에 포함시켰다. 커질대로 커진 대중 운동을 분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윤석열의 쿠데타는 국회와 선관위가 1차 타깃이었다. 쿠데타 세력은 군사적·기술적 측면을 주도면밀하게 준비했을지 몰라도 정치적 측면, 특히 대중 저항을 계산에 넣지 않았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그날 단호했고 대담했다. 그들의 행동이 그날 밤 계엄군을 “중과부적”(김용현이 한 말) 상태로 몰아넣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