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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하의 언론 자유? 좌파가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

12월 7일 박유하 세종대 교수(이하 존칭 생략)를 지지하는 ‘《제국의 위안부》 소송 지원 모임’이 결성됐다. 〈조선일보〉, 〈한국경제〉 등은 세계적 지식인들이 이름을 올렸다고 대서특필했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형사재판 판결(서울고등법원 2심)이 10월 27일에 나온 것에 대한 대응이다.

박유하 지지 선언은 2015년 말에도 있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오에 겐자부로는 이미 그때부터 참가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노엄 촘스키, 브루스 커밍스, 와다 하루키 등이 새로 이름을 올렸다.

국내 지식인 명단은 2015년에 견줘 대폭 바뀌었다. 우선 2015년 선언에는 194명이 참가했는데, 이번에는 49명으로 대폭 줄었다. 2015년에 동참한 김규항, 유시민, 장정일, 홍세화 등이 이번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그 뒤로 국내외 논자들이 박유하 주장의 본질을 세밀하게 비판한 덕분인 듯하다. 특히, 정영환 교수의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푸른역사)는 박유하 주장의 모순과 맹점을 낱낱이 파헤치며 반박했다. 본지도 반박 기사를 내보냈다.(김영익, ‘《제국의 위안부》 옹호자를 비판한다: 박유하는 잘못된 사실을 확신하는 제국 옹호자’, 〈노동자 연대〉 192호)

천대받는 이들을 모욕하는 게 ‘학문의 영역’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가? 2015년 12월 30일 수요시위 ⓒ이미진

뉴라이트가 가세하다

이번 선언의 또 다른 특징은 안병직, 이영훈, 이대근 등 뉴라이트의 ‘낙성대파’가 가세했다는 점이다. 역사문제연구소의 후지이 다케시 연구원은 〈한겨레〉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썼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런 변화가 생겼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노무현 정부 때 우파들이 ‘표현의 자유’를 코드명 삼아 투쟁을 벌인 것이 떠올랐을 게다. 2005년 10월 우파들이 대거 참가한 시국선언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정체 불명의 배후 세력 등 ‘친북·좌경·반미’ 인맥이 청와대 등 국가기관과 KBS·MBC·SBS 등 공중파 TV를 장악하고 … 대한민국의 ‘좌향좌’를 선도하고 있다.” 아, 이 기시감!

지금도 우파들은 언론 통제 운운하므로 ‘표현의 자유’ 문제는 앞으로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전선이 될 것이다.

올해 10월 형사재판 항소심에서 박유하는 유죄가 인정돼 벌금 1000만 원을 선고받았다. 이에 박유하 지지 모임은 이렇게 주장했다. “군사 독재 정권과 함께 사라진 것으로 여겨졌던 사상적 통제가 다시금 부활하는 듯한 느낌, 획일적인 역사 해석이 또다시 강제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영훈이 “사상적 통제” 운운하니 역겹다. 그는 앞서 말한 2005년 우파 선언에 이름을 올린 인물인데, 그 선언은 좌파 역사학자 강정구 교수에 대한 마녀사냥도 촉구했다. “망언을 한 ‘친북·좌익’ 교수에 … 대해 좌파 정권의 법무부 장관이 … ‘수사지휘권’을 발동하여 ‘불구속 수사’를 지시하는 국기(國基)를 흔드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결국 강정구 교수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자격정지 2년의 판결을 받았다. 그러니 우파가 벌금 1000만 원 가지고 호들갑을 떠는 것도 우습다.

박유하 지지에 앞장서고 있는 김철 연세대 명예교수는 이영훈과 함께 뉴라이트의 주장이 잔뜩 담긴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책세상)을 편집했다.

일본의 자유주의 지식인 와다 하루키가 박유하 지지에 참가한 것은 하루키가 ‘위안부’ 문제가 “일본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하는 국가 범죄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하는 ‘현실론자’라는 점과 관계있다.

1990년대 무라야마 정부가 ‘도덕적 책임’만 인정한 채 ‘아시아여성기금’을 해결책이라고 내놓았고, 한국 ‘위안부’ 피해자의 3분의 2 이상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는데, 하루키는 이 기금의 이사로 참여했다.

2015년 한일 정부간 ‘위안부’ 합의는 점증하는 동아시아 긴장 속에서 한·미·일 동맹을 강화해야 한다는 인식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겨레21》 길윤형 편집장은 “일본 리버럴”이 이런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하루키의 박유하 지지 참가는 이 한계의 논리적 귀결이다.

박유하의 엉터리 주장과 피해자 모욕

박유하는 오랫동안 ‘한국’과 ‘일본’의 화해를 주장해 왔다. 두 국가의 화해의 출발은 일본 국가의 진심 어린 사죄와 배상일 텐데, 박유하는 오히려 ‘위안부’ 피해자들이 먼저 용서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식민 지배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일본인들[의] … 혐한은 1990년대 초 이후의 역사 문제 갈등에서 한국인이 그들을 용서하지 않고 언제까지고 비난만 한다는 생각에서 오는 부분이 크다.”(《제국의 위안부》 7쪽, 이하 쪽수만 표기) 피해자의 사죄 요구가 문제라는 식이다.

박유하의 주요 전술은 비판 차단용 진술을 군데군데 끼워넣어 자기 주장의 본질을 은폐하는 것이다. 그래 놓고는 비판이 일자 ‘내 책을 읽어 봐라’는 식으로 나온다.

예를 들어 2장 1절에서 박유하는 위안소 포주의 말을 빌려 ‘위안부’들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을 때에도 그 일을 그만두려고 하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진술, 일본인 남성의 소설을 토대로“‘위안부’들이 본인의 희망에 따라 이동할 수도 있었다”는 진술, 일본군 장교를 인용해“군인들이 ‘관리’는 했지만 직접 모집하거나 영업은 하지 않았다”는 등의 진술을 거의 30쪽에 걸쳐 서술한다. 그래 놓고 “물론 이들 ‘열 명’이 ‘1000명’을 상대해야 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들의 ‘위안소 생활’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다” 하는 말을 쓱 집어넣는다.

게다가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제의 기획자이며 군위안소 설치 운영에 직간접으로 관여하고 군위안소를 감독 통제하는 주체였[다는] … 것은 문헌과 정황 속에서 확인”되므로, 박유하의 일부 서술은 사실도 아니다.(강정숙, ‘일본군 성노예(위안부)제 문제의 쟁점과 과제’, 《젠더리뷰》 2012년 가을호)

책략이거나 혼동

바로 이 때문에 박유하가 ‘위안부’를 모집한 업자들이 진정한 문제라고 강조하는 것도 책략이거나 혼동이다. ‘위안부’ 모집 업자들은 종범으로서 죄가 분명하지만, 이렇게 종범만을 강조하는 것은 주범(일본 국가)의 죄를 가리는 효과를 낸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가장 분노하는 부분은 박유하가 ‘위안부’를 “자발적 매춘부”인 듯 묘사하고 일본군과 ‘위안부’의 관계가 “동지적 관계”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박유하는 그런 적이 없다고 발뺌하지만, 돈을 벌러 외국 위안소로 자발적으로 간 일본 성매매 여성인 “가라유키상의 후예, ‘위안부’의 본질은 실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분명하게 말했다(32쪽). “조선인 위안부는 … 일본군과 함께 전쟁에 이기고자 그들을 보살피고 사기를 진작한 이들이기도 했다”고도 했다(205쪽).

이로부터 박유하가 끌어내는 결론은 이렇다. “법적 책임을 일본 국가에 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일이다. … 일본 국가가 … 위안부들의 불행을 만든 구조적인 ‘죄’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는 있다. … 그것이 ‘도의적 책임’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 90년대의 일본의 사죄와 보상이었다.”(191쪽)

바로 여기서 박유하의 입장은 일본 정부의 기존 입장과 만난다. 이는 ‘위안부’ 운동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데로 나아간다.

표현의 자유로 옹호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그리고 법적 규제

박유하 옹호파는 표현의 자유 문제로 소송과 유죄 판결을 비난한다. 특히 한국 정부의 사상 억압에 동조해 온 우익들이 그런 언사를 쓰는 건 불쾌한 일이다.

물론 원칙적으로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옹호한다. 의견과 주장의 제약 없는 교환이 노동계급과 천대받는 사람들의 저항에 이롭기 때문이다.

즉, 좌파의 표현의 자유 옹호는 그 자유가 어떤 경우에라도 지켜져야 한다고 보는, 즉 개인의 자유를 지고지상의 가치로 여기는 자유주의적 관점과 다르다. 이런 자유주의적 관점은 ‘표현의 자유’를 들먹이며 막말을 해대는 우파들 앞에 마비되기 십상이다.

계급으로 나뉜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 문제가 제기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그 자유의 계급적 내용이 중요하다.

박유하처럼 억압받기는커녕 완전히 자유롭게 언론의 자유를 누리는 제국주의자들의 편에 서서 수십 년간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천대받아 온 피해자들을 모욕하는 것에 “표현의 자유니까” 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찬가지로, 인종차별이나 성차별, 성지향 차별처럼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는 주장을 할 자유까지 표현의 자유라며 옹호할 수는 없다. 노동계급과 차별받는 사람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운동의 정당성을 폄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동 안에서는 이런 주장을 규제할 수 있다는 생각이 폭넓은 지지를 받는다.

물론 좌파가 그런 차별과 억압의 핵심 기구인 자본주의 국가더러 법률적 제재를 가하라고 해서는 안 된다. 국가의 사상 통제는 오히려 노동계급과 차별받는 사람들에게 향하는 경우가 훨씬 흔하기 때문이다.

박유하가 관련된 이 사건에서는 특별하게 유념할 것이 있다. 자신들의 존엄을 무시하는 주장을 지속하는 박유하에게 ‘위안부’ 피해자들이 법에 기대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위안부’ 피해자 vs. 박유하라는 양자택일의 선택지 앞에서 표현의 자유를 제일 가치로 말하는 것은 박유하를 편드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는 진보의 대의에 역행하는 일이다. 일부 진보 지식인들의 박유하 지지 선언 동참이 유감인 까닭이다.

진보·좌파의 약점

박유하의 또 다른 전술은 역사학계에서 유행처럼 돼 있는 ‘미시사’ 방법의 사용이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 군상의 다양한 모습을 포착하려는 미시사는 역사유물론을 전제로만 한다면 우리의 역사 이해를 풍부하게 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사회 변화의 진정한 동역학을 잊은 채 “다양한” 모습에만 골몰하는 것은 오히려 역사 이해를 방해한다. 또, 낱낱의 개인들의 경험을 모두 수집하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그것이 설사 가능하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근본적 한계도 있다. 사회는 단순히 개인들의 합이 아니다.

게다가 박유하가 말하는 ‘위안부’의 다양한 모습이라는 것은 사실 새로운 발견인 것도 아니다. 기존의 ‘위안부’ 진술 모음집에서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을 취사선택했을 뿐이다.

박유하는 기존 ‘위안부’ 운동의 민족주의적 한계도 이용한다. 좌파 일부(민족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는)가 헷갈리는 까닭이다.

박유하 등은 ‘위안부’의 이미지가 우리 민족의 순결한 소녀로 정형화된 것을 문제 삼는다. 물론 ‘순결’하든 아니든, 미성년이든 아니든 여성을 성적 착취의 대상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문제다.(미성년에 대한 성적 착취가 더 큰 공분을 일으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이 점에서 박유하가 페미니즘 담론을 이용해, 정형화된 이미지를 문제 삼는 것은 교묘하게 기존 운동의 약점을 파고들려는 것이다.(박유하와 위안부 문제에서 거의 동일한 입장인 일본의 우에노 치즈코가 ‘여성혐오사회’를 주장하고 그것이 한국의 일부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인기를 끈 것은 단지 우연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가 일본 제국주의의 성노예 범죄였음을 생각하면, 이런 정형화가 ‘위안부’ 운동의 대의 전체를 부정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일단 피해자의 상당수가 10대 나이에 원치 않게 ‘위안부’가 됐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일본 제국에 의한 민족 억압이 실재했으므로, 대중의 즉자적 반감이 민족주의의 수사와 논리를 빌어 표현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국인들은 일본 식민 지배를 겪었고, 해방 뒤로도 친일파 출신들이 국가 요직에 앉아 권력을 휘두르고 친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것을 겪어 왔다.

민족주의는 단지 지배계급 내 포퓰리스트들만이 이용하는 담론과 사상이 아니다. 제국주의에 대항한 민중의 민족 해방 투쟁이 더 높은 의식으로 나아가는 가교가 되거나 제국주의 국가의 노동계급을 자극할 가능성은 열려 있다. 아랍의 혁명과 저항들, 베트남 전쟁 등에서 우리는 이런 가능성들을 목격해 왔다. 저항 운동의 이런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한 채 민족주의에 대한 거부 자체가 마치 세련된 진보인 것처럼 여기는 자유주의적 사고로는 오히려 그런 의식 발전의 계기를 만들 수 없다.

물론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는 자본주의 체제의 경쟁적 본질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므로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많은 저항이 반제국주의·반자본주의 운동을 지향하는 게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좌파라면 박유하의 주장을 ‘그래도 의미있는 일’로 보며 두둔할 수 없다. 부정직한 연구와 피해자 모욕이라는 도덕성 결여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가 교묘하게 비틀어 왜곡된 사실들에서 내리는 결론은 결과적으로 제국주의적 한·미·일 동맹 강화 노선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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