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파의 막말 막겠다고:
표현의 자유 침해할 민주당 법안들을 지지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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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의원들이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법안들을 줄줄이 내놨다.
양향자 의원은 역사왜곡금지법을 발의했다. 일제강점기 전쟁 범죄, 5·18 민주화운동, 4·16 세월호 참사 등 역사적 사실을 부인·왜곡하고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을 처벌하겠다는 법이다.
이형석 의원은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을 준비 중이다. 미래통합당 의원들의 5·18 망언을 선거에 이용하려고 민주당이 약속한 것이다. 이 법은 5·18 운동의 정의를 법 조항에 담아 왜곡 여부 기준으로 삼겠다는 것으로, 조만간 안을 다듬어 당론으로 채택할 예정이다.
대표적인 친노·친문 인사인 정청래 의원은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을 준비 중이다. 언론사가 악의적 왜곡 보도를 했을 때 언론사에 징벌적 손해배상을 매길 수 있다.
역사 해석 독점?
이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들 수 있다. 우파가 뻔뻔하게 진실을 왜곡하는 일이 처벌받으면 좋은 일 아닌가? 표현의 자유가 막말의 자유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나 우파의 역사 왜곡은 분통 터질 일이지만 민주당의 입법 시도는 표현의 자유 일반을 위축시키는 반면 우파를 저지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법들은 법 조항, 검찰 기소, 법원 판결 과정을 통해 국가가 획일적으로 역사 해석을 규율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 해석을 법으로 통일시킬 수 없다. 동의하지 않는 역사 해석이라고 해서 국가가 저자를 감옥에 보낸다면 그야말로 권위주의적 통치이다. 이것이 이명박의 금성출판사 역사 교과서 탄압이나 박근혜의 역사 국정교과서화에 진보진영이 반대했던 논리다. 이는 민주당의 입법에도 일관되게 적용돼야 한다.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사건)을 놓고도 그것이 초래된 원인이나 그것이 미칠 영향에 대해 계급 기반이나 이념적 잣대에 따라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을 수 있다. 새로운 사료의 발굴에 따라 우리가 알던 진실 자체가 달라질 수 있고, 지나고 보니 특정 사건들의 맥락이 더 잘 이해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가령 한국전쟁은 발발 70주년이 지났는데도 다양한 해석이 논쟁 중이다. 민주당의 입법 대상이 된 일제 하 전쟁범죄, 광주항쟁, 세월호 참사에 대해 진보진영 안에서도 해석이 단일하지 않다. 또, 5·18 운동만 봐도 오로지 신군부의 살인적 진압 문제만 부각해 대중을 피해자로 간주하는 친민주당식 역사는 진정한 저항의 전통을 계승할 수 없다.
게다가 법이란 국회에서 제정·개정되는 것이므로 역사 해석이 법에 근거한다는 것은 역사 해석이 공식정치 내 세력균형과 흥정에 따라 좌우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권력자들은 그때그때 자신들의 필요에 부합하는 역사 해석을 부각시켜 왔다. 이명박의 건국절 논란이나 문재인의 임시정부 부각 등.
따라서 국가가 역사 해석을 법으로 규율하고 처벌권을 갖겠다는 것은 표현의 자유 일반을 억압할 수밖에 없다. 대중이 역사 해석과 표현의 능동적 주체가 되는 것을 막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는 노동 대중의 자력 해방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다.
그럼에도 1980년 광주에 북한 간첩이 침투해 무장 저항을 주도했다는 주장처럼 사실이 아닌 주장은 처벌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물론 그런 허위 주장에 반대해야 한다. 그러나 이른바 ‘광수설’의 주된 유포자인 지만원은 현행 법으로도 유죄 판결을 받았다. 처벌 수단이 없는 게 문제가 아니다.
사실 1980년 광주항쟁의 배후로 북한을 지목한 주범은 진압 주체인 계엄사령부(신군부) 자신이었다. 그런데 여태 전두환 일당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것은 역사왜곡금지법이 없어서였나? 아니면 민주당 정부가 그들을 사면하고 우대해 준 탓인가?
“악의적”보도가 문제인가
정청래의 언론 보도 손해배상 강화도 마찬가지다. 언론사가 악의적 왜곡 보도로 인격권을 침해했는지를 법원이 판단하게 했는데, 악의성이 문제인지, 허위성이 문제인지 모호하다. 둘 다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쉬운 일이 아니다.
최근 삼성 재벌의 이재용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됐을 때, 삼성그룹 측이 제기된 혐의를 허위사실이라며 보도를 자제하라고 강경하게 반발하는 일이 있었다. 정청래의 법대로라면, 이재용이 삼성그룹 경영권의 불법(탈세) 승계를 위해 뇌물을 주고, 주가를 조작해 합병을 한 일 등에 대해 유죄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보도를 조심해야 한다. 특히 좌파 언론은 악의성이 입증될 수 있으니 더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재판은 공론화가 덜 될수록 이재용에게 유리할 것이다.
지난해 조국 전 법무부장관의 특권형 부패 의혹에 민주당이 “악의적 보도 프레임”을 유포하고 피의사실 공표 금지 같은 조처를 취해 정권 핵심부에 대해 비판적인 검찰 수사와 언론 보도를 방해했다. 박근혜, 최서원(최순실), 정유라에 대한 폭로의 홍수 속에서는 기쁨을 느꼈던 친문계 정치인들은 문재인, 조국, 윤미향 보도 등에서는 관심법이라도 생긴 것처럼 모든 보도에서 “악의”를 찾아낸다.
표현의 자유 핵심은 비판의 자유
오늘날 국가를 운영하고 대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에게 표현의 자유는 새삼스럽게 추구할 권리가 아니다. 가령 대기업주들은 경제 위기에 직면해 대량 해고를 실행하고 파업을 억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경제관료, 미디어, 교육기관 등을 통해서 유포한다. 무엇보다 그것을 실행할 수 있다.
반면, 보통의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분열·소외돼 있다. 일상 경험에서 가진 자들의 ‘갑질’에 무력할 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이 주입하는 상식(과 편견)이 사람들을 분열시켜 무기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은 뭉쳐야 힘을 발휘할 수가 있는데, 이런 조건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을 고립된 개인들로 여긴다.
그래서 노동계급에게 표현의 자유는 시끄럽게 떠들며 사람들을 모으고, 기존의 상식에 의문을 제시하고 금기를 깨면서 단결과 투쟁을 전진시키는 수단이다.
그러나 민주당의 입법은 민주화의 역사를 민주당이 주인공인 의회 입법의 역사(로 5·18을 가르치는 것)로 제한하는 것일 뿐이다.
리버럴의 보수화?
〈한겨레〉는 6월 10일 21대 국회 당선자 대상 성향 조사를 보도하면서, “자유권적 시민권의 핵심 영역인 ‘표현의 자유’ 분야에서 리버럴 정당과 보수 정당의 ‘태도 역전’이 일어난 것”을 지적했다.
민주당 의원들이 집회와 표현의 자유에서 예전보다 보수화됐고, 특히, 가짜뉴스 단속에선 통합당보다 더 강경하다는 것이다. 〈한겨레〉는 이를 태극기 집회와 보수 유튜버 등 우파의 반정부 활동에 대한 반작용으로 설명하지만, 그것은 부차적일 뿐이다.
민주당이 기본 시민권 문제조차 갈수록 보수적으로 되는 이유는 민주당이 10년간 집권을 하면서 진작에 지배계급 정당으로 확실하게 변모했기 때문이다. 박근혜 몰락 후 정치 안정을 확보해 반격을 도모할 목적으로 지배계급이 민주당을 지지했는데, 이 과정에서도 별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므로 일각에서 나오는 올해 총선 결과로 민주당이 마침내 주류(지배계급) 정당이 됐다는 주장은 근거가 부족한 견해이다.(지배계급의 제1선호 정당이 됐냐는 점에서는 아직 그렇다고 하긴 어렵다.)
물론 문재인은 박근혜 퇴진에 큰 기여를 했던 진보진영 지도자들 일부가 정부에 협조해 온 덕도 봤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뿌리를 좀 더 내리면서, 개혁주의 지도자들도 그 질서에 부분 통합됐다. 기성 질서의 유지에 부분적 이해관계를 갖기 시작한 것이다.
“탈진실”의 시대?
가짜뉴스가 번성하는 것은 기술의 발달로 온라인 매체가 다변화됐기 때문인가? 그 점은 완전 부차적이다. 이는 가짜뉴스의 역사가 인터넷보다 수백 배 오래됐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경제 장기침체로 체제가 불안정해지고 나라마다 경제·사회적 양극화, 복지 후퇴, 빈곤, 기후와 감염병 등 생태 위기 등이 심화하면서,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 생산 기관들(정부, 학교, 언론 등)의 신뢰가 크게 손상을 입었다.
각국 지배자들 모두가 가짜뉴스에 민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독일, 프랑스 정부는 가짜뉴스 단속을 법으로 강화했다. 오늘날 국제적으로 강성 우파(주로 우익 포퓰리즘)의 성장에 대응하는 중도파 지배자들의 기치가 가짜뉴스 척결이다. 우파가 상대적으로 더 가짜뉴스(대안적 사실)를 활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중이 우파의 가짜뉴스에 속아서 중도파를 불신하게 된 것이 아니다. 대중의 삶이 그들의 통치 하에서 파탄났기 때문에 우파의 허위 선동이 먹히는 것이다.
2000년대 들어 포스트모더니즘이 ‘정상 학문’으로 자리잡은 것도 가짜뉴스와 과학 부정 등이 사회적 힘을 발휘하도록 길을 닦아 줬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객관적 진실을 부정하고 심지어 객관적 진실 추구를 억압적 권력 행위로 보기 때문이다.
체제의 실패는 지금도 눈앞에서 증명되고 있다. 가령 코로나 위기에서 무명의 유튜브 전사들의 가짜 뉴스나 악의적 인터넷 게시물들이 문제였던가? 아니면 각국 정부들의 우스꽝스럽고 무능한 대응과 해명이 문제였던가?
미국 경찰의 흑인 조지 플로이드 씨 살해로 촉발된 인종차별 반대 투쟁에서 필요한 것은 가짜뉴스 단속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와 인종차별 문제를 연결시키는 급진적 비판과 저항 호소의 자유인가? 폭동과 약탈이 문제이고, 투표로 해결하자고 얘기하는 사람들은 사회의 분열을 부추길 가짜뉴스 단속을 중요시할 것이다. 그러나 인종차별 체제를 분쇄하려면, 더 많은 집회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저항의 전략과 전술을 함께 토론하고 논쟁하도록 조직하는 일이 더 많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