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와 이란의 혁명: 과거, 현재,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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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케임브리지대학교 조교수이자 중동 전문지 《미들이스트 솔리대리티》 편집인인 앤 알렉산더가 1월 20일 온라인 토론회에서 한 발제와 그가 청중 질문에 답한 것을 녹취·번역한 것이다.
먼저, 이번 강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와 대화해 준 이란인 활동가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싶다. 나는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그들도 이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런 자리에서 공개 연설을 하고, 잔혹한 이란 정권에 맞서 거리로 나온 사람들과 연대를 표하는 것은 큰 위험을 무릅쓰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이란에서 인터넷이 차단된 탓에 실제 이란에서 벌어지는 활동과 이곳 영국의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 노동조합 운동 사이에 접촉이 거의 이뤄지고 있지 않다. 정보를 얻기가 매우 어렵고, 거짓 정보가 잔뜩 유포되고 있다.
지난 몇 주간의 항쟁은 이란 정권이 오랫동안 겪어 온 유기적 위기의 최근 국면이다.
현 이란 정권은 1979년 이란 혁명, 더 정확히는 그 혁명 이후 호메이니와 이슬람공화당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들어섰다. 1979년 이란 혁명은 위대한 대중 혁명이었다. 그 혁명은 사회적 정의와 해방을 위한 여러 요구를 제기하고, 샤의 독재를 타도하고, 제국주의에 맞선 혁명이었다. 그리고 훨씬 평등하고 정의롭고 민주적인 이란을 향해 나아갈 잠재력을 힐끗 보여 줬다. 그러나 그 희망은 호메이니가 권력을 공고히 다지면서 산산조각 났다.
그런 만큼 지금 벌어지는 일은 장기적인 혁명 과정의 한 단계임을 지적하고 싶다.
지금의 항쟁이 성공적인 혁명, 즉 수많은 평범한 이란인들의 염원을 실현하는 혁명이 될 것이냐는 또 다른 문제다. 질의응답 시간에 그에 관해 여러분의 견해를 듣고 토론할 수 있으면 좋겠다.
지난 몇 주간의 항쟁은 수많은 이란인들이 절박한 상황에 처한 가운데 일어난 것이다. 이는 경제 위기의 타격에서 비롯한 것이다. 여러 면에서 그 경제 위기의 근본 원인은 미국 정부가 이란에 부과한 제재에 있다. 그러나 현재의 위기에는 정치적 차원도 있다.
지난 몇 년간 이란에서 주기적으로 일어난 시위·항쟁 물결을 보면 매우 뚜렷한 진자 운동의 패턴이 있다. 경제 위기로 촉발된 항쟁이 한 축에 있다. 2019년에 일어난 항쟁이 그런 사례인데, 그 항쟁을 촉발한 것은 연료난과, 특정 지역에서(수도인 테헤란보다는 외딴 지방에서 아마도 더) 심각했던 경제 위기와 실업이었다.
반면, 2022년에는 정치적 초점이 매우 뚜렷하고 차별 문제를 중심으로 한 항쟁이 일어났다. 특히 이슬람 공화국의 제도적 성차별과, 경찰이 히잡 의무 착용의 집행을 통해 젊은 여성의 몸을 억압의 장으로 삼은 것이 핵심 쟁점이 됐다. 2022년 항쟁의 계기는 마흐사 아미니라는 젊은 쿠르드인 여성이 경찰에 의해 살해당한 사건이었다. 마흐사 아미니는 머리 가리개를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맞아 죽었다. 이것으로 촉발된 시위 물결은 쿠르드인 지역뿐 아니라 테헤란과 이란 남동부의 발루치스탄 등 이란 전역으로 확산됐다. 그 항쟁은 온갖 요구들이 모이는 초점이 됐고, 그중에는 이란 정권 자체의 타도를 요구하는 수준에 이르는 것도 있었다.
이처럼 자신의 삶을 옥죄는 정권에 대한 평범한 사람들의 분노로 불과 지난 몇 년 동안 거듭 항쟁이 일어났다.
그런데 십여 년 전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면, 2009년에는 민주주의 문제로 촉발된 시위 물결이 있었다. 이른바 ‘녹색 운동’이다. 개혁파 정치 지도자들과 선거가 그 시위의 초점이었다. ‘내 표는 어디 갔나’라는 구호 아래 수많은 사람들(어떤 추산에 따르면 300만 명)이 거리에 모였다. 그 시위도 혹심한 탄압을 받았다. 그 시위 또한 정권이 겪은 오랜 위기의 한 고비였다.
그러나 이란의 상황을 이해하려면 이슬람 공화국 내부의 위기만 봐서는 안 된다. 그 위기를 중동 내 제국주의라는 맥락 속에서 봐야 한다. 이와 관련해 명심해야 할 두 가지 핵심 측면이 있다.
하나는 세계적 수준의 강대국 간 세력 균형 변화에 따른 전반적인 제국주의 역학의 변화다.
지난 수십 년간 미국은 가장 강력한 제국주의 강대국으로서 상대적으로 힘이 쇠락해 왔다. 그 과정의 중요한 변곡점 하나는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이 겪은 실패다. 미국은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리고 이라크를 점령했지만 대중적 저항과 무장 저항에 직면했고, 결국 통제력을 되찾기 위해 다시 점령에 나서야 했다. 이는 미국의 중동 개입 능력에 큰 타격을 줬다. 미국은 여전히 중동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강대국이지만 그 영향력은 약화됐다. 그리고 이란 정권이 거기서 득을 봤다.
이란은 이라크에 개입했다. 그리고 이라크의 시아파 이슬람주의 정당뿐 아니라 중동의 여러 동맹 세력들을 통해 중동에 대한 영향력을 구축했다. 시리아의 알아사드 정권과의 오랜 동맹, 레바논의 시아파 이슬람주의 운동인 헤즈볼라와의 동맹도 그 동맹 네트워크의 일부였다.
그 동맹은 이란 정권이 미국에 맞선다는 사실에 기초해 있었다. 이란 정권은 미국의 숙적이었고, 하마스 등 무장 저항 단체들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동맹의 주안점은 이란 정권의 이익에 있었다. 그 동맹은 미국 제국주의로부터 중동을 해방시킬 전략에 기초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전략을 통해 이슬람 공화국 지도부는 여러 해 동안 중동에서 영향력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상대적 약화는 이스라엘 등 다른 역내 강대국들 또한 더 적극적으로 야심을 관철시킬 기회를 제공했다. 이란 정권을 비롯해 다른 역내 강대국들 사이의 경쟁을 격화시킨 것이다.
가자지구에서 벌어진 끔찍한 인종학살도 그런 경쟁이 낳은 결과의 하나다. 물론, 이스라엘 지배 체제 자체의 인종학살적 성격과, 특히 인종학살을 공공연히 선동하는 이스라엘 극우 정당도 그 학살에서 일정한 구실을 했다. 그러나 그 전쟁은 이스라엘의 중동 패권 야심을 이란 지도부에 각인시키려는 것이기도 했다.
2023년 가자 전쟁 이래 중동에서 벌어진 일들도 모두 이러한 역내 경쟁 속에서 벌어진 것이다. 그러면서 이란 정권은 국내와 국외 모두에서 동시에 커다란 도전에 직면했다.
중동 수준의 맥락과 국내 맥락의 이러한 상호작용은 이란 정권이 왜 지금 최대 위기에 봉착했는가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데서 매우 중요하다.
일단 발제는 여기서 마치고 질문을 받으며 다른 쟁점들을 다뤄 보겠다. 위기가 왜 지금 시점에서 벌어지고 있는지를 조망하게 하는 발제가 됐으면 한다.
서방이 시위를 조종하고 있는가?
미국이 이란 현지의 운동을 납치한 상황이냐는 질문이 있었다. 이란 정권이 지금의 운동을 외세가 조종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에 관한 질문도 있었다.
이에 관한 여러 이란인 발언자들의 지적에 동의한다. 이란 현지의 시위를 미국의 꼭두각시로 그리는 것은 상황을 오도하는 것이다.
또, 레자 팔레비[1979년 혁명으로 타도된 샤의 아들로 현재 미국에 있다 — 역자]가 몇몇 시위를 호소하고 몇몇 시위에서 그의 이름이 외쳐졌다고 해서, 지금 벌어지는 운동을 팔레비의 꼭두각시로 그리는 것 또한 상황을 오도하는 것이다.
왕정복고 주장이 몇몇 시위에서 반향을 얻은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시위대가 확고하게 왕정복고를 염원한다고 봐서는 안 된다. 정확한 정보를 알기 어려운 상황이다. 테헤란의 시위에 관해 내가 접한 여러 목격담에 따르면 다양한 구호와 요구가 제기되고 있다.
그중 널리 외쳐지는 구호 하나는 2022년 ‘여성, 삶, 자유’ 항쟁 때 외쳐진 것이라고 한다. “독재자든 왕이든 모든 압제자를 타도하자.” 이것은 시위대가 모든 형태의 권위주의와 억압에 반대하고, 한 억압적인 정권을 그저 다른 억압적인 정권으로 대체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뚜렷이 보여 준다.
또 다른 목격담에 따르면, 시위대 중에는 별다른 대안이 없다는 절망 때문에 레자 팔레비의 이름을 외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한편, 이란 정권은 시위들이 레자 팔레비의 호소와 결부된 것처럼 비치고 나서부터 잔혹한 진압에 나섰다. 이는 레자 팔레비가 현장에서 어떤 유의미한 지도도 제공하지 않은 채, 시위대가 커다란 위험에 처하든 말든 그저 시위대를 이용할 태세임을 보여 준다.
이란의 정부 시스템을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이란인들의 몫이고 모두가 외세의 개입에 반대해야 한다는 이란인 발언자들의 지적에 동의한다. 좌파라는 사람들이 외세의 개입을 지지한다면 대꾸할 가치도 없을 것이다. 유의미한 ‘정권 교체’는 이란인들 스스로 이뤄 내는 정권 교체뿐이다.
그러나 나 자신이 이란인이라면 나는 권위주의적 왕정의 복권에 극구 반대하고, 민주주의의 확대를 바라는 사람들과 연대를 건설할 것이다. 내가 이란인이라면 ‘혁명수비대’(IRGC)를 그저 국가정보보안국(SAVAK)으로 교체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SAVAK는 이란 왕정의 잔혹한 보안 경찰이다.
따라서 현 상황을 낳은 정치적 모순을 명료하게 이해해야 한다.
게다가 운동 일각에서 나오는 구호도, 반드시 우익에 의해 고무된 것이 아닐 수 있다.
미국이 가한 제재의 효과 하나는 많은 이란인들이 외부 세계와 단절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재의 사례들에서 분명한 것 하나는 제재가 권위주의 정권에 타격을 주지 못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그들의 저항에 타격을 준다는 것이다.
이란 노동조합과 노동자 운동의 활동가들과 대화하면서도 이를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이란에도 노동자 운동이 있고, 그 운동은 이른바 개혁파, 보수파를 불문한 권력자들이 추진한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저항해 왔다. 대대적인 민영화와 외주화, 고용 불안정화 등 신자유주의적 정책들이 광범한 노동계급에게 타격을 줬고, 이는 수많은 중간계급 사람들이 빈곤의 나락에 빠지는 데도 일조했다.
물론 그러한 고통과 빈곤은 지정학적 상황과 제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정권의 최상층에는 자신의 생활 수준을 유지한 사람들이 여럿 있다.
시위대의 계급 구성과 이전 항쟁과의 차이
거리 시위대의 계급 구성에 관해서는 현재로서는 정확하게 관측하기 어렵다.
그러나 내가 접한 소식에 따르면 여러 계급과 세대를 가로지르는 다양한 사람들이 참가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청년 중심이었던 2022년의 ‘여성, 삶, 자유’ 항쟁과 다른 점이다.
이란인 역사가 페이먼 자파리는 2022년 항쟁에 관해 훌륭한 분석을 제시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당시 항쟁의 난점 하나는 조직 노동자들을 핵심부로 끌어들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세대 간 단절도 있었는데 시위를 이끄는 것은 주로 청년이었고, 더 나이가 있는 층은 노동조합 등 일터에 뿌리가 있었다. 그래서 당시 항쟁은 거리 시위를 넘어서는 동력을 만들어 내는 데서 어려움을 겪었다.
1978~1979년 혁명의 역사를 보면 당시 시위대에 대한 정권의 살인 진압은 1978년 1월에 시작됐다. 시위는 8~9개월 동안 이어지다가 1978년 9~10월에 급격히 심화되기 시작했다. 그 변곡점은 석유 부문 등에서 벌어진 대파업이었다. 그러면서 운동은 질적으로 도약했고, 기존 국가의 해체로 나아가는 멈출 수 없는 동력이 생겼다. 1978년 10월에 샤는 계엄령을 내리고 버티다 1979년 1월에 이란을 탈출하고 2월 초 권력을 잃었다.
이는 지금의 운동이 어떻게 수많은 이란인들이 제기하는 물음에 답하는 혁명적 운동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지 보여 준다. 훨씬 평등하고 정의롭고 인종이나 성별 등에 따른 차별이 없는 사회를 만들고, 더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부의 재분배 등의 문제를 제기하는 투쟁으로 말이다.
어떤 연대가 필요한가?
미국의 폭격을 지지할 수는 없겠지만, 시위대를 학살하는 ‘혁명수비대’를 테러 조직으로 지정하고 제재하라고 요구해야 하지 않겠냐는 질문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 정부도 믿어서는 안 된다고 답하고 싶다. 특히, 팔레스타인 연대 팻말을 들고 있는 것을 테러리즘의 한 형태로 간주하는 영국 정부라면 더욱 믿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누군가를 테러리스트로 지정할 자격이 없다.
가장 효과적인 행동은 이란인들 자신의 저항 능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는 종류의 행동이다. 가령, 노동조합들은 이란의 노동조합들에 연대를 표하는 행동을 벌일 수 있다. 노동자들은 이란 정권이 시위 진압에 쓰는 무기 등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행동을 벌일 수도 있다. 운동을 건설하고 아래로부터의 저항 능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이란 활동가들과 협력해야 한다. 그리고 중동 다른 곳에서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과 연대를 구축해야 한다.
저항은 이제 끝났는가?
왜 여전히 일부 이란인들은 거리에 나서기를 주저하냐는 질문이 있었다. 거대한 탄압이 몰아치는 현재, 거리에 나서려면 커다란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는 한 발언자의 지적에 동의한다.
그러나 거리 운동이 이제 끝장났다거나, 역으로 이제 더 첨예한 항쟁으로 심화될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아직 섣부르다.
분명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을 추모할 것이다. 사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일 하나는 떨어져 사는 가족들과 연락이 닿지 않아 그들의 생사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들의 생사를 알게 되면서 분노는 다시 쌓일 것이다. 이란에는 죽은 자를 40일 후에 기리는 전통이 있다. 이는 1978~1979년 혁명의 역학에도 반영됐다. 죽은 자를 추모하는 행사가 40일마다 열려 정치 집회가 된 것이다. 이는 2022년 항쟁 때도 나타난 특징인데, 마흐사 아미니가 죽은 지 40일이 되는 날이 운동이 더한층 발전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정권이 자행한 폭력의 규모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살상 수준이 이전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증거가 많다. 수천 명이 사망하고 부상자는 훨씬 많은 듯하다. 어떤 사람들은 조준 사격에 맞아 눈을 다쳤다.
시리아·이집트 혁명의 교훈
이란 정권은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과 비슷한 전술을 구사한 듯하다. 정권 지지자들을 거리로 동원하고 반정부 시위를 순전히 외세의 책동이자 하나같이 폭력적인 시위로 묘사하는 것이다.
그와 관련해 시리아 혁명과 그것의 최종 패배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중요한 교훈 하나는 정권의 동원에 맞서는 데서 조직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하는 구실이 핵심적이라는 것이다.
시리아 혁명의 비극은 혁명 초기에 노동자들의 투쟁이 충분한 규모로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아사드 정권은 수도인 다마스쿠스나 알레포의 거리에 정권 지지 시위대를 거듭 동원할 수 있었다. 비록 그들 중 일부는 상관의 강요에 의해 나오거나, 야간에 반정부 시위에 몰래 나오기도 했지만 말이다.
2011년 이집트 혁명은 그와 달랐다. 당시 이집트 무바라크 독재 정권도 대중 항쟁이 일어나자 노동조합, 특히 국가가 운영하는 노동조합을 동원해 타흐리르 광장에서 시위대를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노동조합들이 지시를 거스르고 관제 데모에 나오지 않은 것이다. 무바라크 정권은 여기저기서 깡패들을 긁어모아 낙타 기병대를 꾸려 시위대를 공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광장에 모인 평범한 사람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서 “노동자”란 공장 노동자만을 뜻하지 않는다. 가령, 교사와 보건 노동자도 노동자다. 최근 이란에서는 교사와 보건 노동자들이 큰 파업을 벌였다. 석유 산업 같은 핵심 부문에서도 파업이 있었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제국주의 강대국들이 통제하기 어려운 운동을 건설하는 발판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투쟁이 벌어진다면 중동 전역에서 반향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이란에서 항쟁이 승리를 거두기 시작한다면 예컨대 이집트 민중도 거기에서 희망을 얻을 수 있다. 시위대가 경찰을 패퇴시키고 정치수를 석방시킨다면, 중동 전역의 민중은 짜릿한 희망을 느낄 것이다.
1년 전 아사드 정권이 무너졌을 때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물론 당시 상황은 꽤 복잡했다. 아사드 정권의 붕괴는 시리아 혁명이 남긴 오랜 여파의 결과이기도 했지만, 무장 조직 하이아트 타흐리르 알샴(HTS)이 주도한 군사 쿠데타의 결과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악명 높은 세드나야 감옥의 문이 열리는 광경에 중동 민중은 열광했고, 그것이 갖는 상징성 때문에 카이로부터 테헤란까지 독재자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조직된 노동자들이 핵심부에 있는 아래로부터의 대중 운동이 이란에서 성장할수록, 중동 전체의 민중이 희망을 걸 본보기가 될 잠재력도 커질 것이다.
중국이나 러시아가 개입할까?
중국과 러시아의 구실에 관한 질문이 있었다.
이란 정권은 지난 몇 년 동안 중국·러시아와 상당한 경제적·군사적 관계를 쌓아 왔다. 예컨대 러시아 정부는 시리아 아사드 정권을 지원했다. 그리고 시리아 혁명 때 이란 정부와 함께 시리아 아사드 정권을 도와 혁명을 분쇄하고 끔찍한 학살을 벌였다.
이란과 중국은 상당한 경제적 관계를 맺었다. 중국은 중동 전반에 상당한 투자를 했다. 걸프 연안은 미국의 투자와 중국의 투자가 교차하는 곳이다. 그런 상황이 미중 간 지정학적 경쟁과 얽힐 수 있다는 관측은 타당하다.
그러나 미국이 이스라엘을 즉각 지원하듯이 러시아나 중국이 이란 정권을 지원하러 나설 가능성은 거의 없을 듯하다.
아사드 정권이 무너질 때 벌어진 일을 보면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러시아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아사드에게 망명지를 제공해 주는 것뿐이었다. 러시아는 정권을 떠받치기 위해 어떠한 유의미한 개입도 할 수 없었다. 시리아 내 친이란 세력도 마찬가지였다.
이란 정권 붕괴를 바라지 않는 아랍 정권들
이것은 다른 아랍 국가들, 특히 걸프 연안국들의 입장에 관한 질문과도 관련 있다. 몇몇 발언자들이 지적했듯이 그 국가들은 이란 정권이 당장 무너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입각해 사태를 안정시키고 관리하려고 애쓰고 있다.
여러 발언자들이 강조했듯이 어느 정권도, 어느 지배계급도 민중 항쟁이 권력을 잡기를 바라지 않는다. 1979년 혁명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슬람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슬람주의(때로는 ‘이슬람 근본주의’라고 불린다)에 관해서도 짧게 언급하겠다.
이슬람주의 운동을 다룰 때에는 그것이 매우 다양한 현상임을 이해해야 한다. 이슬람주의 운동은 서로 상충하는 복합적인 계급 기반을 가질 수도 있다. 거기에는 노동계급 지지자들도 포함될 수 있다.
물론 이슬람주의 운동은 신중간계급이 이끌 때가 많다. 때로는 신흥 부르주아지의 일부도 기반에 포함될 수 있다. 옛 중간계급이나 지배계급의 일부도 기반에 포함될 수 있다.
이처럼 이슬람주의의 기반은 복합적이다. 그리고 그들의 몇몇 주요 슬로건들은 온갖 상이한 방식으로 지지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
이슬람이 정치의 언어로 사용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란 혁명 때 많은 사람들이 호메이니의 운동에 매력을 느낀 것은 호메이니가 ‘압제에 맞서자, 제국주의에 맞서자, 만국의 피억압자는 단결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물론 호메이니는 그 말을 고스란히 실행에 옮길 생각은 없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호메이니의 주장에 매력을 느꼈고 투쟁의 언어로 받아들였다.
한편, 영국 등 서방에서는 이슬람 혐오를 경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슬람 혐오를 이용해 우파가 이슬람주의 지지자나 이슬람주의자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공격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악마화되고 온갖 탄압을 받는다.
사회주의자들은 국가에 의해 탄압받는 사람들을 방어하고 그들과 연대해야 한다.
핵심은 국가 권력에 대한 태도가 무엇이냐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은 국가 권력에 확고하게 맞서야 한다. 자신의 국가에 가장 우선 맞서야 하지만, 다른 국가에도 적대적이어야 한다. 이것이 배양돼야 할 태도다.
마치며
인용으로 토론을 마치겠다. 이것은 이란에서 ‘입헌 혁명’이 한창이던 1906년 당시 테헤란 주재 영국 영사 세실 스프링 라이스가 쓴 것이다. 당시 이란인들은 더 민주적인 형태의 정부를 요구했다. 명심해야 할 것은 당시 영국에서조차 여성 등을 포함하는 보통선거권이 보장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든 도시마다 독립적인 의회가 결성돼 테헤란에 있는 통치자나 중앙 의회와 상의 없이 행동했다. 원성을 사던 지방관들은 하나둘씩 쫓겨났고 중앙 정부는 무기력하게 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전면적 와해의 위험이 실질적이다. 억압과 심지어 모든 권위를 거부하는 저항의 분위기가 전국으로 퍼지고 있다. 지도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평범한 사람들이 스스로 조직화하는 것을 보며 제국주의자들과 독재자들이 느끼는 당혹감과 공포를 잘 요약하고 있다. 당시 혁명의 기세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이란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