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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이란 혁명 돌아보기
오늘날 이란 반정부 시위에 주는 교훈

이란의 반정부 시위가 100일 넘게 지속되고 있다. 마흐사 아미니의 죽음으로 촉발된 시위는 히잡 착용 강제에 대한 분노로 시작됐지만, 이제 체제 전반에 대한 도전으로 발전하고 있다.

히잡 의무화 같은 이슬람 율법의 엄격한 적용은 이란의 건국 이념과 직결된 문제다. 이슬람 율법은 현 이란이슬람공화국의 건국 이념이자 통치 이데올로기이다.

오늘날 이란 국가는 1979년 이란 혁명이 좌절되는 과정에서 건국됐다. 1979년 혁명은 이란의 노동계급이 거대한 운동을 통해 잠재력을 보여 준 과정이었지만 이슬람주의 세력은 이런 잠재력을 파괴하며 지배 권력을 구축했다. 이 혁명을 돌아보며 얻을 수 있는 정치적 교훈은 무엇일까?

이란은 지정학적 중요성과 석유 자원 때문에 19세기 중엽부터 끊임없이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받았다. 차르 러시아와 영국이 대표적이었는데, 영국은 이란을 1919년에 보호령으로 만들어 버린 후 수탈을 강화했다. 이란에는 이런 제국주의 개입에 맞선 저항이 20세기 초부터 있어 왔다.

한편, 자본주의 발전으로 탄생한 노동계급으로 말미암아 노동운동도 더불어 성장했다.

1953년, 당시 총리였던 민족주의자 모사데크가 석유 산업 국유화를 추진하자 이권에 위협을 느낀 미국과 영국이 쿠데타를 사주했다. 이를 통해 정권을 잡은 샤 왕정은 노골적인 친서방 노선을 걸으며 반대 세력을 잔혹하게 탄압했다.

샤 왕정은 이른바 “백색혁명”이라 불린 위로부터의 자본주의적 개혁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 종교 기관 집단은 소외됐고, 수많은 농촌 출신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밀려들어 빈민이 됐다. 극명한 빈부 격차 속에서 정치적 반대의 목소리는 탄압받았다. 악명 높은 정보기관 ‘사바크’는 반대파를 납치·고문·살해했다.

1975년의 유가 하락은 이란의 수입에 직접적 타격을 줬고, 국가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공격했다. 기층에서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이미 1977년부터 반정부 시위가 시작됐는데, 주도 세력은 이슬람 성직자들과 ‘바자리’라 불리는 전통 시장 상인들과 같은 중간계급이었다. 이들은 전자본주의적 사회 양식에 이해관계가 있었고 샤 왕정의 근대화와 서구화에 반발했다.

성직자들이 장악하고 있던 도시의 모스크를 중심으로 동원된 빈민층도 거리 시위의 주요 부분이었다. 하지만 왕정 체제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것은 1978년 말부터 대중 파업에 돌입한 노동계급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석유 노동자들이 있었다.

1979년 1월 샤는 해외로 도피했고, 좌파들이 주도한 무장 민병대는 혁명에 동참하지 않은 군인들을 제압했다.

ⓒWikicommons

1978~1979년 동안 벌어진 혁명의 과정은 피억압자들의 축제였다. 쿠르드족을 비롯한 소수민족들은 해방을 요구하며 투쟁에 동참했고, 여성들은 차별 철폐와 평등을 외쳤다. 농민들은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했다.

노동자들은 독립 노조를 건설하고 경제적 요구와 정치적 요구를 결합시켰다. 당시 한 석유 공장 쟁의대책위원회의 요구는 이를 잘 보여 준다. “계엄령 해제, 모든 정치수 석방, 석유 산업의 국가 통제, 여성 노동자 차별 철폐”.

일부 사장들이 도망친 공장들에서 노동자들은 공장위원회, 즉 ‘쇼라’를 설치하고 공장을 직접 운영했다. 노동쟁의 건수는 1979년 한 해에만 350건에 달했다. 쇼라는 노동자 권력의 맹아였고, 이란 혁명의 잠재력이었다.

하지만 혁명의 주요 정치 세력인 이슬람주의자들과 좌파들은 노동자 권력으로 나아갈 전망을 망쳐버렸다.

이슬람주의 세력의 대표적 인물은 성직자 호메이니였다. 그는 샤에 반대하다 1960년대 내내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샤 반대 세력의 구심점 구실을 하려 했다.

1979년 2월, 이란으로 돌아온 호메이니는 노동계급을 신뢰하지 않았고, 노동자들의 경영 참여를 “비이슬람적”이라며 비난했다. 점차 쇼라의 주도권을 이슬람주의자들이 가져갔고, 노동계급의 자주적 운동은 억압됐다. 호메이니는 정치 깡패를 동원해 좌파의 주요 기반인 대학가의 활동가들을 공격했고, 히잡 의무화를 발표하며 여성들의 저항을 탄압했다.

좌파는 이슬람주의자들의 공격에 무기력했다. 이란의 최대 좌파 정당이었던 투데당은 친소련 스탈린주의 정당이었다. 이들은 이란이 아직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갈 단계가 아니므로, “민족 단결”을 위해 이슬람주의자들과 협력해야 한다고 믿었다.

호메이니에 반대했던 일부 좌파들은 노동계급의 투쟁을 고무하고 이슬람주의자들로부터 독립된 운동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게릴라 투쟁에 집중하며 대중에게서 고립돼 갔다.

1979년 이란 혁명 속에서 호메이니를 비롯한 이슬람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은 것은 불가피한 일이 아니었다. 이란의 노동계급에게 그럴 충분한 잠재력이 있었음에도 그 기회를 놓친 좌파들의 실패가 있었다.

오늘날 이란의 지배자들은 자신들을 미국과 서방 세계에 맞선 반제국주의 세력으로 포장한다. 그리고 반정부 시위대를 미국과 이스라엘의 사주를 받은 세력으로 비난한다. 한편 서방의 지배자들은 위선적으로 여성 차별 쟁점을 이용해 이란 정권의 약화를 바라며 자신들의 개입을 강화하려 한다.

이슬람 율법을 강요하는 이란 지배자들에 맞선 저항이 전진하려면 노동계급이 파업 등 경제적 힘을 활용해 그 잠재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리고 노동계급이 스스로 권력을 장악하도록 이끄는 혁명적 정치와 그에 기반한 조직이 발전할 때 이 운동이 일관되게 전진할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좌파 활동가들의 주요 기반인 대학들에서는 노동자와의 연대를 내세운 구호가 등장했다. 경제적 요구를 걸고 반정부 시위에 참여하는 다양한 부문의 노동자들 간의 비공식적 네트워크가 존재한다. 따라서 혁명적 전망으로 이란 시위가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존재한다. 1979년 이란 혁명은 오늘날 이란의 항쟁에도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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