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왜 두 국가 방안은 해법이 될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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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곳곳에서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이 전례 없는 규모로 벌어지고 있다. 시위 참가자들이 가장 많이 외치는 구호는 “프리 프리 팔레스타인”(“팔레스타인 독립”)이다.
국제적인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은 미국 등 서방 정부들을 압박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 조 바이든은 이스라엘 규탄을 유대인 배척이라고 비난하는 한편, 운동을 진정시키려고 ‘두 국가’ 방안을 꺼냈다.
“[하마스의 공격 전인] 10월 7일 전의 현상 유지 상황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 이 위기가 끝나면 그다음 단계에 대한 비전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 그것은 두 국가 방안[이다.]”
미국 국무장관 앤터니 블링컨도 최근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마무드 아바스를 만나 이렇게 약속했다.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에 대한 팔레스타인 주민의 정당한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겠다.”
안타깝게도,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 안에서도 두 국가 방안이 그나마 실현 가능한 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에 필요한 전망은 무엇인지, “팔레스타인 독립” 구호에 어떤 정치적 내용을 담을 것인지 하는 문제가 매우 중요하다.
두 국가 방안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전의 경계를 따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각자의 국가를 세워 공존하자는 안이다.
그러나 두 국가 방안은 오슬로 협정(1993년 체결)의 파산을 통해 공상임이 입증됐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지도부는 오슬로 협정을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 창건을 향한 첫 걸음으로 여겼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환상임이 드러났다.
2000년에 당시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이 중재해 이스라엘 총리 에후드 바라크와 PLO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가 캠프 데이비드(미국 대통령 전용 별장)에서 만나 오슬로 협정의 “미해결 쟁점들”을 논의했다 ― 이스라엘군 전면 철수, 동예루살렘의 지위, 유대인 정착촌,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권 등.
이 협상에서 이스라엘(과 미국)은 유대인 정착촌과 이스라엘군 기지에 둘러싸인 팔레스타인 자치구역을 제안했다. 사실상 “반투스탄”을 제안한 것이다. 반투스탄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 분리 거주 구역을 뜻한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요구에 일절 양보하지 않았기 때문에 캠프 데이비드 협상은 결렬됐다.
캠프 데이비드 협상은 이스라엘 국가가 팔레스타인의 독립 국가 수립을 인정할 의향이 전혀 없음을 재확인시켜 줬다.
시온주의자들은 역사적 팔레스타인 영토 전부를 이스라엘 땅의 일부로 여기고 그곳에 유대인만의 배타적 민족 국가를 세우려 해 온 것이다.
이스라엘과 미국은 두 국가 방안을 원하지 않는다
1947년 11월에 채택된 유엔 결의안 181호의 내용은 팔레스타인을 분할하는 것이었다(팔레스타인 분할안의 효시는 1937년 영국 필위원회의 분할안이었다). 미국과 옛 소련이 이 결의안에 찬성했다.
시온주의 운동은 미국과 옛 소련 등 제국주의 국가들의 후원을 받아 인종차별적 이스라엘 국가를 창건했다.
이스라엘 초대 총리 벤구리온은 “후대가 치를 역사적 실수”라고 못마땅해 했지만, 유엔 결의안은 이스라엘에 훨씬 유리했다.
인구로 보나 소유지 규모로 보나 아랍인에 비해 훨씬 적었던 유대인에게 전체 면적의 57퍼센트를 분할했다. 게다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비옥한 땅과 해안 도시를 유대인이 차지했다.
그럼에도 새 이스라엘 국가하에서조차 팔레스타인인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점이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문젯거리였다. 그래서 이스라엘 군대는 1948년 초부터 “강제 이주,” 즉 인종 청소를 벌였다.
사실 팔레스타인인 “이주”는 시온주의 전략의 핵심이었다. 때로는 아랍 군주들의 동의를 얻는 “자발적” 이주의 형태를 띠기도 했지만 대체로 “강제” 이주였다. 벤구리온은 이미 1938년 5월에 “나는 강제 이주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1948년 나크바(대재앙)로 팔레스타인인 100만 명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다. 고향으로 귀환할 권리도 빼앗겼다. 가장 악명 높은 인종 청소는 1948년 4월 데이르 야신 마을 학살이었다.
이스라엘은 나크바를 통해 팔레스타인 땅의 80퍼센트를 차지했다. 나머지 20퍼센트가 지금의 서안지구인데, 요르단(당시 국명은 트랜스요르단)이 이 지역을 장악했다. 요르단 국왕은 시온주의 운동 지도부와 공모해 유엔의 1947년 분할안을 관철시킨 것이다. 요르단 지배자들의 팔레스타인 배신의 역사는 이토록 유구하다.
이스라엘 내에 남은 팔레스타인인들은 1966년까지 계엄령 통치를 받았고, 오늘날에도 기껏해야 이등 시민 취급을 당한다.
시온주의 무장 세력이 나크바를 벌일 때, 당시 소련 독재자 스탈린은 이를 지지했다. 이스라엘을 중동의 동맹국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소련의 당시 위성국 체코슬로바키아는 시온주의 무장 세력인 하가나에 중요한 무기들을 공급했다. 하가나는 이스라엘 방위군의 핵심이 됐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진정한 전략적 위상은 이내 분명해졌다. 석유가 매장돼 있는 중동에서 서방 제국주의의 이익을 수호하는 무장한 요새였던 것이다.
1967년 6월 ‘6일 전쟁’은 이스라엘의 구실을 분명하게 각인시켜 줬다. 이스라엘 군대가 서안지구, 가자지구, 동예루살렘, 골란고원(시리아), 시나이반도(이집트)로 전광석화처럼 진격해 점령했다.
미국과 영국이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가 주도한 아랍 민족주의 운동을 견제하기 위해 항공모함을 동원해 이스라엘군의 공습을 지원한 덕분이었다.
미 국무부는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단번에 승리했다”고 만족감을 표했다.
이런 역사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미국도 1967년 이전의 국경선에 근거한 두 국가 방안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렵잖게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은 1982년 시나이반도에서 철수했지만, 서안지구와 예루살렘, 골란고원을 계속 점령했다. 1948년 국경선은 시온주의 지도자들에게 불만족스러운 타협이었기 때문이다.
극우 시온주의자들의 “대(大)이스라엘” 프로젝트의 핵심은 예루살렘과 서안지구다. 이스라엘은 서안지구를 (서기 1세기의 지명을 사용해)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이라고 부른다.
칼라시니코프와 올리브 나뭇가지
지금은 오슬로 협정의 기만성이 널리 폭로되지 않았던 1993년이 아니다. 지난 30년 동안 PLO 지도부의 타협이 모든 전선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에 악영향을 미친 것을 우리는 목격했다.
팔레스타인 독립 운동은 1930년대 영국 식민주의에 맞서 싸울 때부터 유대인과 아랍인,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이 함께 사는 세속적이고 민주적인 단일 국가 창건을 지향했다.
1970년대 초반까지 PLO 지도부는 한 손에 칼라시니코프 소총을 쥐고 다른 한 손에 올리브 나뭇가지를 들고 팔레스타인 독립 투쟁을 벌였다. 아라파트는 1974년 유엔 총회 연설에서 “나는 항상 올리브 나뭇가지와 총을 갖고 다닌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 뒤 PLO 지도부는 두 국가 방안을 수용하는 실리주의 노선으로 후퇴했다. 마침내 1988년 아라파트는 무장 투쟁 포기 선언을 했다.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하면 언젠가 “정상적인” 팔레스타인 국가가 수립될 것이라는 어렴풋한 약속(오슬로 협정)을 수용하는 대가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는 서안지구라는 섬에 대한 제한된 통제권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PLO가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하고 서방 제국주의와 화해하는 길로 들어선 결과는 무엇인가?
오슬로 협정 체결로부터 30년이 지난 뒤 서안지구의 유대인 정착자 수는 70만 명에 이르고, 그들이 팔레스타인인의 땅을 계속 빼앗으면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완전히 무기력해졌다.
이렇듯 이스라엘 국가는 아파르트헤이트 국가이므로 과거에도 팔레스타인인들과 공생할 수 없었고 지금도 공생할 수 없다.
이스라엘 국가는 세속적이고 민주적인 단일 국가로 대체돼야 한다. 그럴 때 “요르단강에서 지중해까지, 팔레스타인 독립!”을 이룰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이스라엘과 그 국가와 협력하는 부패한 아랍 정권들을 전복하기 위한 아랍 혁명(2011~13년에 잠깐 봤던 것과 같은)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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