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노동자들의 팔레스타인 연대 총파업, 어떻게 건설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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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9월 22일 이탈리아에서 팔레스타인 연대 총파업이 벌어진 직후인 9월 25일에 쓰였다. 10월 1일 ‘글로벌 수무드’ 구호 선단이 이스라엘에 나포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탈리아에서는 팔레스타인 연대 파업이 다시금 분출했다.
인종학살에 맞선 팔레스타인인들의 끈질긴 저항과 ‘글로벌 수무드’ 구호 선단(이 또한 굳건함(수무드)이라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미덕을 본받아 시작된 것이다)이 불러일으킨 반향은 이탈리아의 청년, 노동자, 노동조합들의 행동을 자극했다. 9월 22일(월요일) 전례 없는 팔레스타인 연대 총파업이 나라를 부분적으로 마비시켰다. 제노바의 ‘자율 항만노동자회’(CALP, ‘기층 노동조합’(USB)과 연계돼 있다)가 “모든 것을 막아라” 하고 호소한 것에 호응하는 행동이었다. 이 파업은 팔레스타인과 구호 선단과 연대하는 파업이었고, 이스라엘 제재와 이스라엘과의 관계 전면 단절을 요구했다. 또, 이스라엘의 주요 동맹국이자 3위의 무기 공급자인 이탈리아의 공모 행위에 반대했다.
기층 노동조합들—USB, ‘기층 노조 연합’(CUB), ‘노동자 권리를 위한 기층 위원회’(ADL Cobas), ‘일반 기층 노조’(SGB), ‘부문간 기층 위원회’(SI Cobas, 이하 “시코바스”) 등—이 호소한 파업에 약 100만 명이 참가했다. 항만·물류 노동자들은 이스라엘로의 무기·화물 수송 봉쇄를 주도했다. 제노바, 살레르노, 베네치아, 리보르노에서 항만 입구를 봉쇄했다. 전국의 교통이 차질을 빚었다. 버스와 지하철이 멈추고 고속도로와 정거장이 폐쇄됐다. 공공부문 노동자 약 3만 명이 파업에 참가했고 일부 학교와 대학이 휴교했다. 80곳이 넘는 도시에서 도합 수십만 명이 행진했다. 밀라노에서는 시위대가 주요 역사를 봉쇄하려고 해 경찰이 시위대를 공격했다. 최루탄과 물대포가 동원된 탄압에도 불구하고 시위 규모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많은 노동자와 청년들이 생애 처음으로 운동에 참가했다.
9월 22일 총파업이 탄력을 받는 기류를 감지한 이탈리아 노총(CGIL, 이탈리아의 최대 노동조합 연맹)은 9월 19일(금요일) 자체 파업을 벌이겠다고 발표했다. 전국적으로 2시간 이상, 일부 지역에서는 더 오래, 금속·건설·서비스 부문에서는 4시간 동안 작업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기층 노조들의 파업을 약화시키기 위해 다급하게 조직된 것이었고, 그런 만큼 법적인 제약에 따라 공공 서비스 노동자들은 파업 참가가 금지됐다. 비록 그 파업의 요구는 더 협소했지만 — 인도적 지원 통로 보장, 이스라엘과의 상업·군사 거래 전면 취소,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 —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파업에 참가했다. 파업 참가율은 100퍼센트였고, 공공 서비스 노동자들은 연대의 표시로 검은색 완장을 찼다.
일터 기반 투쟁
이 총파업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2023년 10월 이후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다섯 번째 팔레스타인 연대 파업이다. 이탈리아 내 팔레스타인인 단체들(‘청년 팔레스타인인들’, 아랍-팔레스타인인 민주 연합 등)과 기층 노동조합의 하나인 시코바스(특히 물류 부문에서 잘 조직돼 있다)의 주도로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지지하기 위해 인종학살의 공급망을 교란시키는 것을 우선시해 왔다. 일터 기반 투쟁에서 팔레스타인 연대를 중심에 놓음으로써, 반제국주의 투쟁이 국내의 착취와 인종차별에 맞서는 투쟁과 분리된 것이 아님을 드러냈다.
시코바스는 우크라이나에서 나토와 러시아가 벌이는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해 2023년 10월 21일 게디 공군 기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그 시위에서 나부낀 수많은 팔레스타인 깃발은 조합원들의 뜨거운 정서를 보여 줬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은 북아프리카-중동 출신이었는데 그들에게 팔레스타인 문제는 식민 지배, 강탈, 저항이라는 공통의 언어로 이해되고 체득된 것이었다. 11월 17일 시코바스는 팔레스타인 노동조합들의 호소에 응해 첫 번째 팔레스타인 연대 파업에 나섰다. 노동자들과 팔레스타인인 단체들이 이스라엘 해운 기업 ZIM 선박의 살레르노 항구 하역을 막았다. 모데나에서는 이스라엘에 군수 전자기기를 납품하는 테카프사 앞에서 항위 시위가 벌어졌다. 다음 날 볼로냐에서는 수천 명이 행진했다.
이듬해 2월 23일 시코바스는 ‘청년 팔레스타인인들’과 함께 두 번째 팔레스타인 연대 파업을 호소했다. 기층 노동조합들 대부분이 이를 지지했고, 공공부문 노동자 2만 명도 가세했다. 밀라노에서 열린 전국 집중 시위에는 약 5만 명이 참가했다.(기층 조직들이 동원한 것으로는 2025년 여름 전까지 최대였다.) 이 시위는 자본이 일으킨 모든 전쟁에 맞서는 국제 공동 행동의 일부이기도 했다.
그해 봄을 거치면서 더 공세적인 전술들이 구사됐다. 수도·전기·가스 회사 지점들 앞에서 매주 항의 시위를 벌이고, 기차역을 점거하고, 레오나르도 무기 공장이나 이탈리아 공영 방송국(RAI)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제노바에서는 팔레스타인 연대 단체들과 시코바스의 꾸준한 압력 끝에 제노바시(市)의 에너지 공급 업체인 이렌이 이스라엘 기업 메코로트와의 계약을 취소했다. 2024년 3월 8일 시코바스는 또다시 파업에 나섰다. 레오나르도를 “죽음의 군수 공장”이라고 불렀고, 세계 여성의 날을 군국주의와 시온주의 폭력에 반대하는 투쟁과 직접 결합시켰다.
시코바스 조합원들은 대학생들의 팔레스타인 연대 캠퍼스 농성을 적극 지원하고 거기에 가세했다. 캠퍼스 농성에 고무받은 닥서-페르캄 노동자들은 5월 볼로냐 물류 센터에 이스라엘에서 오거나 이스라엘로 가는 화물을 일절 취급 거부하라고 요구해서 이를 관철시켰다. 해당 내용을 단체 협약에 포함시킨 것이다. 같은 달 피아첸차에서는 노동자들이 약 19톤의 구호품을 이집트-라파흐 국경을 통해 가자지구에 전달하려 했다. 이들은 그후에도 계속 구호품 지원을 조직하고 있다.
2024년 6월 24일 팔레스타인인 단체들과 함께 시코바스는 전국적인 물류 파업을 조직했고, 이는 다음 날 제노바 항만 봉쇄로 이어졌다. 새벽부터 노동자들과 활동가들이 산베니뇨, 알베르타치, 에티오피아 출입문을 막고 경비가 삼엄한 포넨테 출입구로 행진했다. 그 결과 제노바 항만 대부분이 가동을 멈췄다. 시코바스가 봉쇄와 연대 파업을 결정한 것을 놓고 CALP/USB와 갈등이 빚어졌다. 이는 전술, 전략, 정치적 지향을 둘러싼 운동 내 이견을 드러냈다. 한 팔레스타인인 활동가는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파업들은 범위가 제한적이었지만 매우 귀중했습니다. 그때 채택한 전술이 나중에 다시 채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작은 행동에서 시작했지만 그런 행동은 커졌습니다. 그 행동이 당장 확산되지는 않더라도 항만 봉쇄라는 행동 방침이 갈수록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거론됐습니다. 그 점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국가의 대응은 이런 평가가 옳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활동가들은 레오나르도와 RAI 앞에서 벌인 항의 시위에 대한 경찰의 대응이 정부의 새 “보안 명령”과 관련있다고 지적한다. [이후 그 “보안 명령”의 내용이 형법, 도로교통법 등에 추가된다. 뒤에서 언급되는 “보안법”은 그렇게 추가된 법안들을 한데 묶어서 이르는 표현이다—역자.] 이 법안은 경찰 권한을 확대하고, 기간 시설의 봉쇄를 최대 20년 징역형으로 처벌하고, 이주민 구금 시설과 교도소 내 반란을 범죄화하고, “테러리즘 발언”을 처벌하는 등의 내용이다. 의미심장하게도 내무장관 피안테도시는 시코바스와 물류 마비가 제기하는 위협을 거론하며 정부의 “보안 명령”을 정당화했다.
팔레스타인과 탄압 반대 투쟁
정부의 탄압 강화에 직면해 운동은 단결하지 못했고, 분열이 운동의 잠재력를 제약했다. 2024년 여름 동안 팔레스타인 연대는 보안법에 대한 기층의 반대와 수렴했고 이는 ‘투쟁의 자유를 위한 네트워크’ 결성으로 이어졌다. CGIL와 UIL 조합원들조차 보안법에 맞서는 행동을 벌였다. 그런 만큼 10월 5일 로마에서 팔레스타인인 단체들 주도로 열리는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에 연대하는 행진’은 활동가들에게 중요한 시위가 됐다. 그러나 정부는 행진을 금지했다. 행진이 금지되자 일부 팔레스타인인 공동체 지도자들(팔레스타인당국(PA)과 연계된 사람들이다)은 ‘전술적 우려’를 근거로 행진과 거리를 뒀다. 반면, 행진 강행을 주장한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 여부와 점령의 정상화에 대한 반대 여부가 진정한 쟁점이라고 지적했다.
10월 5일 행진은 강행됐고 시위대는 전례 없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투지를 과시했다. 경찰은 기차역, 톨게이트, 버스역에서 1,600명 이상을 불심 검문했고 51차례나 시외 추방 명령을 내렸다. 시위대는 중무장한 병력으로 둘러싸인 광장에 갇혔고, 경찰의 도발과 공격 속에 4명이 연행됐다. 활동가들은 이것이 새 보안법이 가져올 더 광범한 탄압의 예고편이라고 경고했다. 저항의 기세는 몇 주 동안 지속돼 10월 18일 시코바스와 ‘투쟁의 자유를 위한 네트워크’가 호소한 전국 파업, 10월 19일 전쟁·탄압·보안법에 반대하는 전국적 시위로 이어졌다.
한편, 의회 지향 좌파와 연계된 네트워크가 등장해 대규모 보안법 반대 시위를 조직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시위를 팔레스타인 문제나 군국주의적 경제 정책에 대한 반대, 사회를 마비시키는 행동으로 연결시키기를 거부했다. 11월 초 민중권력당, 공산주의자 네트워크, USB가 열 집회를 앞두고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 내에서 분열이 불거졌다. ‘청년 팔레스타인인들’은 그 집회에 참가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공개 서한을 발표해 그 집회 주최 측이 팔레스타인인 단체들을 부차화시키고, “팔레스타인을 마치 외부자의 대의처럼 취급한 채” 이탈리아인들의 연대체를 만드는 전략을 채택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11월 29일 파업을 준비하는 과정은 그 분열을 더 선명하게 드러냈다. CGIL과 UIL은 정부 예산안과 보안법에 반대하는 파업을 명령했다. 반면 시코바스와 CUB, SGB는 군국주의적 경제 정책과 국가 탄압에 대한 반대를, 팔레스타인·레바논 연대와 결합시킨 파업을 명령했다.(USB는 여기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러나 11월 29일 행진 전야에 팔레스타인인 단체들이 개입해 분열을 막고 팔레스타인 저항에 대한 분명한 지지를 이끌어 내어, 파업 다음 날 그 파업과 결합된 3만 명 규모의 단일한 행진이 벌어졌다.
일터 기반 투쟁에 기초한 아래로부터의 공동전선이 구축되지 못한 탓에 이런 동원들은 결국 약화됐다. 2025년 4월 11일 시코바스는 일터 기반 요구(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해고 금지, 외주화 반대)와 정치적 요구(유럽 재무장 반대, 탄압 반대, 인종학살 공모 반대)를 결합한 파업을 벌였다. 팔레스타인인 단체들, 나폴리 실업자 운동과 호흡을 맞춘 그 파업은 밀라노와 볼로냐의 주요 물류 거점을 타격했다. 볼로냐에서는 물류 센터가 6시간 동안 봉쇄돼 화물차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고속도로가 막혔다. 나폴리와 제노바에서는 시위대가 항만을 타격했고, 레조에밀리아에서는 시위대가 루비에라 물류 센터를 타격했다. 루비에라 물류센터는 해운 기업 머스크를 통해 레오나르도가 F-35 부품을 수송하는 곳이다. 다음 날인 4월 12일에는 밀라노에서 대규모 전국 집중 집회가 열렸다. 그 시위도 가혹한 경찰 폭력에 직면했는데 여기에는 네오나치 휘장을 박은 옷을 입은 자들도 가세했다. 마치 그날 발효된 새 보안법으로 강화된 권능을 과시하려는 듯했다.
봉쇄에서 총파업으로
그러나 이스라엘의 인종학살과 주변 7개국에 대한 침략, 이탈리아의 직접 공모를 향해 커져가는 분노는 탄압으로도 억누르지 못했다. 지난 6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항만 노동자들은 이스라엘로 향하는 약 14톤의 탄환 수송을 막는 데 성공해, 합동 항만 봉쇄의 물결을 유럽 차원으로 확대했다. 지난 9월 라벤나에서는 신생 항만 노동자 위원회가 지역 당국을 압박해, 폭탄을 가득 싣고 하이파로 가는 두 컨테이너의 수송을 저지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6월 초 의회 야당들—민주당(PD), 5성운동, 적녹 연합(AVS)—은 로마에서 네타냐후 정부를 규탄하고 “평화”를 촉구하는 대규모 행진을 벌였다. 한편, 밀라노 경찰은 이스라엘과의 국교 단절을 요구하는 팔레스타인인들 주도의 집회를 불허했다.
2025년 6월 헤이그 나토 정상회의(그 회의를 통해 나토 회원국들은 2035년까지 군비를 국내총생산(GDP)의 5퍼센트로 늘리기로 했다)를 앞두고 USB, 시코바스 등의 기층 노조들은 전쟁과 인종학살 반대라는 국제 쟁점을, 군국주의적 경제 정책 반대 등의 국내 쟁점(임금과 노동조건 공격, 사회 보장 제도 해체, 빈곤 심화, 저항의 범죄화, 국가에 의한 인종차별 심화, 경찰 폭력 강화 등)과 결합킨 파업을 조직했다. 한 시코바스 일터 대표가 지적했듯이, 국가는 특히 이주 노동자를 표적으로 삼았다. 이들이 이탈리아 노동조합 운동과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의 선두에 있었기 때문이다.
“충돌이 격화될수록 국가는 이민자 탄압과 표적 공격을 강화하는 법을 도입했습니다. 우리가 표적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국가의 전략은 뚜렷했다. 물류 부문의 이주 노동자들을 공격해 급진화가 조직 노동계급 전반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6월 20일 그 장벽은 무너졌다. 금속 노동자들도 임금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선 것이다. 볼로냐에서는 1만 명의 시위대가 허가된 경로를 벗어나 외곽 순환도로를 점거해 그 일대의 간선도로 교통을 45분 동안 마비시켰다. 경찰은 새 보안법에 따라 시위대를 처벌하겠다고 위협했다. 이런 행동들은 노동자들의 저항이 노동조합 지도부가 설정한 한계를 빠르게 넘어서고 있고, 탄압이 저항을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부채질하고 있음을 보여 줬다.
한 활동가가 말했듯이, “팔레스타인 쟁점은 모든 것을 마비시키고 청년들을 급진화시킨다.” 주류 정당들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그러한 잠재력을 서둘러 통제하려 했다. 6월 21일 로마에서 전쟁, 재무장, 이스라엘의 가자 학살에 반대하는 별도의 두 행진이 열렸다. 주류 정당들과 CGIL이 지지한 “유럽 재무장 반대: 군비 말고 복지에 돈을 써라” 집회에는 10만 명이 참가했지만, 그 집회는 온건한 평화주의 기조였고 나토 반대를 신중하게 피했다. 민중권력당과 USB 등이 주도한 “저들을 무장해제시키자!” 집회는 나토 반대 기조가 더 분명했지만 러시아나 중국 등 서방과 경쟁하는 열강에 대해 무비판적이었다. 팔레스타인인 단체들과 시코바스는 공식적으로 어느 쪽에도 개입하지 않았다. 이는 운동의 계속되는 분열을 보여 줬지만, 18개월 간의 봉쇄와 파업 끝에 야당들이 압력을 받아 거리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보여 줬다. 물론 이를 통해 야당들은 분출하는 분노를 더 온건하고 선거적인 반대와 유럽연합에 더 큰 역할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수렴시키기 위해서 나온 것이다.
구호 선단 ‘글로벌 수무드’는 규모와 인지도가 커졌지만, 팔레스타인 해방이라는 대의를 NGO와 주류 정당들이 관리하는 인도주의 쟁점으로 전환시킬 위험도 있었다. 이는 팔레스타인인 단체들을 건너뛴 채 서방 정부들에 대한 압력을 완화시킬 뿐 아니라, 마찬가지로 인종학살에 공모해 온 브릭스(BRICS) 국가들에 대한 압력도 완화시킬 가능성이 있었다. 한 청년 활동가가 필자에게 지적하기를, CALP의 개입과 정치적 입장[CALP는 구호 선단이 공격당하면 대규모 파업으로 응징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 역자]이 없었다면 구호 선단은 파업과 봉쇄, 무장 저항 지지를 중심에 놓은 이탈리아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의 후퇴를 나타낼 수도 있었다. 이를 기회 삼아 중도좌파 정치인들이 팔레스타인인들의 편을 자처하려 들자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은 이들과 정면 대결했다. 제노바에서는 활동가들이 그런 정치인들에게 “시온주의자들은 광장에서 나가라!” 하는 구호를 외쳤다. 한 시코바스 일터 대표는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단결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성취해야 하는 것이지 사용자들, 시온주의 지자체장들 같은 작자들과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인종학살을 지지하고, 예멘의 저항에 맞서 홍해에서 이탈리아가 주도한 아스피데스 해상 작전을 만장일치로 지지했습니다.”
9월 22일 총파업은 투지, 분노, 청년들의 분출은 대세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 줬다. 운동은 주류 정당들, 노동조합 지도부, 국가가 제어하지 못할 정도로 성장했다. 팔레스타인은 다시금 우리 시대의 피차별·피착취 대중을 결집시키는 대의가 된 것이다. 그 대의는 어느 노동조합이나 어느 정당의 것도 아닌 대중 자신의 것이고, 그들은 투쟁의 경로를 스스로 결정하고 아래로부터 진정한 단결을 구축해야 한다. 이러한 돌파구는 결코 기적이 아니었다. 이것은 팔레스타인인들과 노동자들이 2년 간 이끈 조직화의 성과였고, 노동자의 힘이 서방에서 시온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서는 데서 결정적임을 보여 줬다. 리보르노에서는 3일 간의 봉쇄 끝에 당국이 미국 군수 선박 SLNC 세번호의 입항을 거부했다. 살레르노에서는 전례 없이 단호한 컨테이너 터미널 봉쇄가 전개됐다. 그 결과 터미널 운영사는 이스라엘로의 수송 전면 중단, ZIM사를 비롯해 이스라엘과 공모하는 모든 기업들과의 계약 취소를 요구하는 시위대와 협상에 나서야 했다. 이스라엘이 인종학살에 박차를 가하고 구호 선단을 공격하는 만큼 행동의 수위를 높이는 것이 절실하다. 국제적 수준에서 조율되고 제국주의를 뿌리째 뒤흔들 단결된 총파업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연대는 “모든 곳을 막아야” 한다. 팔레스타인이 해방될 때까지 “모든 것을 막아야” 한다.
번역: 김종환·이원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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