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의료 체계로의 전환은 어떻게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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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수의료 공백 문제를 해결하려면 공공의료를 획기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공공의료 강화 요구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의료 ‘개혁’을 두고 정부와 의협·전공의 등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공공의료 강화 필요성과 그것을 이룰 방법을 살펴보는 것은 가치가 있을 것이다.
2019년 12월 말 기준 병원급 이상 공공의료 기관은 221곳으로 전체 의료기관의 5.5퍼센트밖에 안 된다.
그중에서도 일반진료를 담당하는 기관은 63곳뿐이다. 나머지는 결핵, 정신병 등 특수목적 병원이거나 보훈병원, 경찰병원 등 대상자가 제한된 병원이다.
공공의료 기관은 민간병원 일색인 의료 시장의 바다 속에서 고립된 섬처럼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공공의료 기관도 시장 논리에 따라 민간병원처럼 운영되는 것이다.
“일반 국민들은 공공의료기관을 민간의료기관과 같은 의료시장에서 경쟁하는 의료기관의 한 종류로 인식하고 있으며, 공공의료기관은 민간기피진료 이외에는 민간병원과 다르지 않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특히 “국립대학병원은 공공병원으로 인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공공의료 확충의 필요성과 전략’, 건강보험연구원, 2020)
역대 정부들은 재정 지출을 줄이려고 이런 방향을 강화해 왔다.
다른 하나는 경쟁 속에서 도태돼 버리는 것이다. 지방의료원들이 대표적이다. 그래서 “지방의료원은 시설이 낙후되고, 의료서비스 질이 저하되어 있다는 인식이 강하다”(앞의 글).
홍준표 같은 우파 정치인은 이 점을 악용해 진주의료원을 폐쇄했다.
그러니 공공의료가 강화된다고 해서 과연 많은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지 의구심이 생기는 것이다.
공공의료 기관이 제구실을 하려면 첫째, 의료 시스템 전체를 공공의료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 한국은 유럽 등과 비교해도 공공의료가 턱없이 취약하다. 병원급 이상 의료기관의 공공병상 비율은 한국이 10.3퍼센트밖에 안 되지만, OECD 평균은 89.7퍼센트에 이른다(2016년 기준).
물론 45년 간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황폐화된 서유럽 의료 시스템을 아무도 이상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영국의 국민보건서비스 NHS처럼 국유화된 의료 시스템도 대중의 필요에 부합하지 못하고 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심장질환 환자 40만 명 중 37퍼센트가 진료를 받기까지 18주 이상이 걸렸다고 보도했다. 치료가 시급한 심장질환 환자 1만 2799명은 1년 넘게 기다렸다.
따라서 둘째, 단지 소유와 운영 주체만 바뀌어선 부족하고 대대적인 국가 지원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주요 공공의료 기관이 서울아산병원이나 서울삼성병원 같은 시설과 인력을 갖출 때에야 비로소 믿을 만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이는 윤석열 정부와 전임 문재인 정부 모두, 심지어 팬데믹하에서조차 결코 하려 하지 않은 일이다.
투쟁과 경제 호황의 만남
영국의 NHS나 프랑스의 무상의료 체계 등이 만들어진 것은 제2차세계대전 종전 직후 격변기에 노동자들의 급진적인 투쟁과 자본가들의 필요가 맞물린 결과였다.
전쟁이 한창일 때 영국 보수당 정치인 퀸틴 호그가 의회에서 한 연설이 당시 노동계급 대중의 정서를 잘 표현해 준다. “우리가 사회 개혁을 국민에게 선사하지 않으면 그들이 우리에게 사회 혁명을 선사할 것입니다.”
한편, 영국 자본가들도 전후 재건과 소련과의 경쟁이라는 필요 때문에 복지 지출을 “최고의 장기 투자”로 여겼다. 개별 자본가 처지에서는, 큰돈 들이지 않고 부족한 노동인력을 해외에서 유인하는 데 효과적인 수단이기도 했다. 전후 이어진 장기 호황은 이런 투자가 상당 기간 지속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했다.
그러나 오늘날 장기 불황 속에서 세계 자본가들은 의료 지출을 장기 투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복지 지출을 삭감해 기업주들의 세금 부담을 줄이고, 노동자 저항 잠재력 약화를 위해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을 격화시키는 것이 유리하다고 여긴다.
하물며 해방 이후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꾸준히 시장 지향적으로 구축된 한국의 의료체계를 공공의료 체계로 바꾸는 일은 결코 사회적 대화를 통한 ‘부드러운’ 과정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 공공의료 중심으로의 의료 체계 전환 시도는 영국의 NHS 도입 당시와 달리 자본가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힐 것이다.
게다가 1990년대 이후 더욱 강화된 의료 시장화는 다수 의사들을 공공의료 확대에 강력히 저항하는 세력으로 만들어 놨다.
그래서 정부가 공공의료를 조금 강화하려 할 때조차 그들은 강력하게 반대해 좌절시켰다.
정부는 그들의 저항에 대처할 수단(효과적인 공공의료)이 없었고 지금 윤석열처럼 대중의 고통을 방치할 뿐이었다.
따라서 공공의료 확대 요구는 당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서 그 자체로는 혁명적이지는 않지만, 그 요구를 실제로 성취하려면 수많은 대중의 (준)혁명적 투쟁이 필요하다.
그 투쟁 속에서 사람들은 기존 소유관계를 변혁하지 않고는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런 대규모 투쟁 속에서는 많은 의사들의 의식도 변할 수 있다. 1987년 6~8월 대중 투쟁은 비록 혁명적 투쟁은 아니었어도 노동자들의 정치적 투쟁과 경제적 투쟁이 잇달아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급진화하고 의사와 의대생의 적잖은 일부가 급진화한 바 있다.(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같은 급진 의사 단체도 그 토양 위에 설립됐다.)
혁명적 좌파는 공공의료 확대 요구를 그런 격변 속에서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길을 밝히는 전환적 요구로 자리매김하고 지지해야 한다.
현재의 다중·복합 위기를 고려해 보면, 지금은 그런 격변이 도래할 가능성이 있는 시기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