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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는 (신)중간계급인가?
정형준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의 전제를 살펴 봄

사회변혁노동자당(이하 변혁당)의 기관지인 〈변혁정치〉는 최근 호(114호)에서 정형준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의 인터뷰를 실었다. 인터뷰는 최근 논란이 된 정부의 공공의대 설립, 의대 정원 확충 정책과 이에 크게 반발한 전공의들의 파업을 다뤘다.

정형준 정책위원장(이하 직함 생략)은 그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밝혀 온 것처럼 문재인 정부의 의대 정원 확충 정책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속시원히 폭로했다. 진정으로 공공의료를 강화하려면 공공병원을 늘리고 인력을 대폭 충원해야 한다는 대안도 제시했다.

그러나 정형준은 전공의들의 파업을 비판하며 의사들을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의사 사회”)으로 규정한다. 그리고는 전공의들의 이해관계가 본질적으로 노동계급과 대립하는 것처럼 설명했다. 심지어 그는 전공의들이 우승열패 논리에 찌든 “기득권 엘리트”이며 이번 파업이 “전형적인 반동”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본지는 ‘전공의 파업을 계기로 살펴본다 – 전문직은 특정 계급인가?’(김하영, 〈노동자 연대〉 336호)에서 밝힌 것처럼 계급은 직업과 같지 않고, 의사들을 하나의 계급으로 봐서는 안 되고, 전공의는 노동계급의 일부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전공의들이 ‘노동계급의 일부다운 요구들을 제출했어야 했다’고 비판했다.

추정컨대, 정형준이 전공의들에 대해 그토록 강경한 태도를 보인 것은 그가 전공의들을 노동계급의 일부가 아니라고 여기는 데에서 비롯한 듯하다. 그는 다른 자리에서 전공의들이 신중간계급이라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전공의들은 간호사, 의료직, 의료지원인력, 행정직에게 ‘오더’(지시)를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이 그가 댄 근거이다.

신중간계급의 정의와 성격

신중간계급은 무엇인가? 구중간계급이 자본주의 이전 사회부터 존재한 중간계급인 데 반해 신중간계급은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생겨난 새로운 중간계급을 말한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자본의 축적이 전개됐다. 이에 따라 자본가가 예전처럼 생산을 직접 감독·통제하는 일이 불가능해졌고, 이 업무 중 상당 부분을 피고용인 일부에게 위임해야 했다. 이처럼 피고용인이면서도 자본가들의 업무를 수행하는 집단은 관료적으로 위계화돼 있는데 그중에서 최상층 관료(이들은 자본가 계급의 일부이다)를 제외한 사람들을 신중간계급이라고 한다.

신중간계급은 자본주의 생산 과정 내부에서 생겨났다는 점에서 자영농 등 전통적(“구”) 중간계급과 구별된다. 그리고 지배계급 자신과도 구별된다(두 가지 점에서).

첫째, 지배계급 자신은 ‘전략적’ 통제권, 즉 자본 투자를 결정하거나 철수시킬 권한을 행사하는 반면, 신중간계급은 이미 배치된 자원들의 일상적 사용에 대한 통제권을 갖는다.

둘째, 지배계급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지위를 얻는다. 그들에게 임명이나 진급 같은 절차는 요식행위일 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신중간계급은 지배계급으로부터 지위를 부여받는다.

신중간계급은 임금노동자들과도 구별된다. 신중간계급은 생산 과정과 노동자들을 통제하고 부분적으로 자신의 노동도 통제한다. 물론 그들 자신도 피고용인이라는 점에서 온전한 자율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신중간계급은 또한 그들의 노동력 가치보다 더 많은 소득을 얻는다. 그들이 얻는 소득의 상당부분은 자본가들이 노동자들로부터 착취한 잉여가치의 일부를 분배받은 것이다. 반면 임금노동자들은 잉여가치를 착취당한다. 그들의 임금이 아무리 많아 보일지라도 임금(노동력 가치)보다 더 많이 일하므로 자본가들은 이로부터 잉여가치를 가져간다.

그런데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신중간계급이라는 개념을 주의해서 사용해야 한다며 이렇게 지적했다. “신중간계급은 부르주아지 또는 프롤레타리아트가 하나의 계급이라고 말할 때의 의미에서 하나의 계급이 아니다. [신중간계급은] 자본과 임금노동 사이의 근본적 모순과 관련해 애매하고 어중간한 입장을 공유하고 있는 하나의 잡다한 사회계층의 집합이다.”

또한 관료제적 위계체계의 꼭대기에서 이 계급은 경영직 자본가 계급으로 넘어 들어가고 바닥에서는 화이트칼라 노동자 계급으로 넘어 들어간다.

신중간계급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사회주의 정치에 유용하다. 마르크스의 계급 개념을 훼손하지 않고도 오늘날 비교적 복잡해진 계급 관계들을 분석할 수 있게 해 주고, 실천적 문제와도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거듭해서 발견한 것은, 이 고위직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직책을 맡았을 때, 그것을 다른 노동자들의 조건을 방어할 목적으로 사용하는 외에 어떤 경영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한다는 사실이었다.”(크리스 하먼) 따라서 이들을 노동조합으로 포괄하려 하는 것은 부적절할 것이다.

전공의의 계급 분석

그렇다면, 전공의를 신중간계급으로 볼 수 있을까? 첫째, 전공의들이 다른 노동자들에게 하는 ‘지시’의 대부분은 환자에게 줘야 할 약물과 처치에 관한 것으로 분업의 일환이다. 병원뿐 아니라 고도로 분업화된 오늘날의 자본주의 생산과정에서는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분업의 일환으로서 지시가 이뤄진다. 이들의 지시는 대학병원의 병원장, 실장, 부장, 과장, 수간호사 등 관리자들이 하는 감독·통제와는 구별된다. 권위주의적 위계 체계가 강하게 남아 있는 곳에서는 전공의 일부가 관리자의 업무를 일부 대신하기도 하지만, 일시적이거나 사라져 가는 잔재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대부분의 대학병원에서 전공의가 다른 노동자에게 이런 지시를 하려 했다가는 코웃음을 살 것이다. 전공의 수련 방식이 체계화되면서 심지어 직속 후배 전공의에게 끼치는 영향도 예전보다 줄어들고 있다. 전공의들은 타인은커녕 자신의 노동과정도 통제하지 못한다.

둘째, 다른 노동자들로부터 착취한 잉여가치 일부를 분배받는다고 볼 수도 없다. 전공의들의 임금은 병원 내의 다른 노동자들과 단순히 비교해 보더라도 크게 높은 수준이 아니다. 의사를 양성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에 비춰 봐도 잉여가치의 일부가 이전된다고 의심할 여지는 거의 없다. 임금 등 노동조건이 꾸준히 개선되고 있다지만 이로부터 그들이 노동자가 아니라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노동자들은 전공의들 말고도 많다.

마지막으로, 다른 노동자들과의 관계를 보면, 전공의들의 계급의식이 미발전 상태여서 다른 직종의 노동자들로부터 우호적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의식의 문제를 제쳐놓고 객관적 조건을 보면, 전공의들은 사용자들에 대해 다른 병원 노동자들과 같은 이해관계를 가진다. 업무 분장을 두고 간호사 등 다른 직종의 노동자들과 갈등을 빚기도 하지만, 이는 사실 다른 많은 노동자 사이에서도 벌어지는 일이다.

그러나 사용자가 전공의에게 악조건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면 간호사에게 그러기도 쉽다. 반면 전공의들과 간호사들이 단결해 사용자에 맞선다면 공동의 이익을 쟁취하는 데 훨씬 유리해진다. 간호사들의 임금 등 노동조건이 개선되면 전공의들도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기가 유리해진다.

물론 전공의들은 4~5년의 수련 과정을 거치고 나면 개인적 조건과 성적 등에 따라 그 계급적 지위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수련 과정에 있는 그들이 병원 사용자에게 고용돼 착취당하고 있다는 현재의 계급 관계를 부인할 수는 없다. 전공의들의 미래 계급 지위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 중 일부는 전공의를 마친 뒤에도 노동자로 남는다.

정형준은 지난 몇십 년 동안 의사들에게 일어난 변화를 중요하게 고려하지는 않는 듯하다. 그러나 의사 수의 증가와 병원의 대형화는 의사들의 내부적 구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이런 변화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1985~2014년 사이에 전체 의사 수는 5배로 늘었다. 그 사이에 취업한 의사 수는 8배로 늘어난 반면, 개원의는 4배로 늘어나는 데 그쳤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 1985년에 개원의 숫자는 봉직의(‘취업’)의 갑절이었지만, 지금은 봉직의가 더 많다. 만성화된 경제 불황은 개업의 문을 더욱 좁히고 있다.

봉직의에는 대학병원의 교수들과 그 아래 부교수, 전임의 등이 모두 포함된다. 어지간한 중소병원의 의사들도 원장을 제외하면 모두 봉직의다. 이들 중 일부는 병원 경영과 관련된 관리 업무를 하기도 하지만 상당수는 그저 환자 진료를 할 뿐이다. 이들은 대개 개원의에 비하면 소득이 한참 적다. 사업소득과 관리자로서의 추가 보수를 포기한 결과다.

봉직의 중 매우 적은 수는 자본가가 된다. 적지 않은 수는 신중간계급, 즉 직접 진료도 하지만 병원 운영과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에 일부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위에 있다.

신중간계급으로 분류되는 의사들 내에서도 계층화가 진행돼 상층의 일부는 좀 더 고위직의 관리자로, 일부는 직함이 무색할 정도로 진료만 하는 의사들로 나뉘고 있다. 관리나 노동통제와는 관계없이 순전히 진료 업무만 하는 의사들도 많다(이들은 대부분 노동자에 속한다).

이런 변화는 앞으로도 더욱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2014년에 전공의를 대상으로 수련 후 진로 계획에 대해 조사한 결과, 개원하겠다는 답변은 11.6퍼센트에 그친 반면, 취업하겠다는 응답은 52.9퍼센트를 차지했다. 이는 기존 개원의와 봉직의 비율(34.4퍼센트 대 40.7퍼센트)과 비교해도 크게 차이가 나는 수치로, 장차 봉직의의 비중이 더 늘어날 것임을 암시한다. 이런 변화 속에서 의사 노동자도 늘어날 것이고, 전공의들이 병원에서 차지하는 지위도 더 낮아질 가능성이 크다.

전공의들의 계급의식 미발전 상태를 지적하지만 말고 장차 사용자에 맞서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지키는 데 나설 수 있도록 설득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전공의들뿐 아니라 다른 병원노동자들에게도 도움이 된다.

자본주의의 발전과 의료 ‘산업’의 성장 속에서 의사의 계급적 구성도 변하고 있다 ⓒ출처 고려대의료원

토대와 의식

정형준은 자본주의 사회 생산관계들의 변화하는 현실과 이에 따른 변화의 잠재력을 보기보다 의사라는 직종을 정태적으로 바라보며 일종의 숙명론적 관점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공의들이 잠시 노동계급의 처지에 있을지라도 이내 중간계급이 되거나 설사 노동계급의 처지에 있을지라도 소득 수준이 높아 계급의식이 발전할 수 없다고 여기는 듯하다.

물론 이번에 전공의들이 공공의대 설립과 의대 정원 확대 등에 반대한 것은 공공의료 확대라는 방향에 역행하고 따라서 노동계급 전체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요구를 지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들의 요구와 행동은 동료 노동자들을 배척하거나 처지를 악화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정부 정책이 대단한 개혁이라도 돼서 다수 노동자들의 바람을 짓뭉개는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정부의 의대 정원 확충 방안에 대해서는 정형준 스스로가 공공의료 강화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정책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반대하는 인천국제공항의 일부 정규직 노동자들이나, 이주노동자 고용에 반대하는 일부 건설 노동자들에 비해, 전공의들의 이런 요구와 행동이 특별히 더 ‘반동적’이라고 봐야 할까?

오히려 사회주의자들은 이처럼 직접적으로 동료 노동자들을 배척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좀 더 날카로운 비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실 노동자들이 잘못된 요구를 내놓는 일은 드물지 않다. 그러나 의식을 잣대로 계급을 규정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에릭 홉스봄처럼 노동계급의 규모와 잠재력을 과소평가하는 결론으로 나아가기도 쉽다.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의 잘못된 요구가 그들의 존재조건에서 비롯한 필연적 결과이기는커녕 지배계급이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기 위한 이간질을 받아들인 결과라는 사실을 논증하고, 진정한 계급적 이익을 추구할 것을 인내심을 갖고 설득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극소수이더라도 계급의식적 노동자들을 설득할 수 있다면 전체 지형을 변화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반대로 전공의들(과 심지어 의대생들 전체)을 다른 모든 의사들과 싸잡아 기득권이라고 비난해서는 사실상 노동계급 분열과 반목을 부추기는 효과를 낼 뿐이다.

정형준은 인터뷰에서 “사회적 대화”를 비판하고 노동계급의 독립적 투쟁을 얘기했지만, 의사 가운데 노동계급에 속하는 부문의 조건과 그 사회적 구성에 민감하지 못한 채 계급투쟁에 대해 말한들 어디에서 번지수를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 참고도서 : 《노동자 계급에게 안녕을 말해야 할 때인가》(알렉스 캘리니코스, 크리스 하먼 지음. 책갈피)

계급은 의식이 아니라 생산수단과 맺는 ‘객관적’ 관계에 따라 정해진다 ⓒ이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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