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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증원 규모 축소하는 윤석열 정부:
전공의 등 의료 노동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료 개혁을 추진할 수 있다

윤석열 정부가 의대 증원 규모를 절반가량 축소하겠다며 사실상 한 발 물러섰다. 국립대 총장들의 ‘자발적’ 제안에 사립대들도 호응하면 증원 규모는 1000명으로 줄어들 듯하다.

그러나 전공의들이 여기서 멈출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노동자 등 서민층 처지에서 보면 답답한 노릇이다. 지난 두 달 동안 대학병원 기능이 절반쯤 마비돼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불안에 시달렸다.

정부는 전공의들을 설득하지도, 그들의 공백을 대체하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선거가 끝나자 증원 규모를 반토막으로 줄인 것이다. 의사들의 선거 결과 해석도 아전인수에 불과하지만, 정부의 후퇴는 의대 증원이 ‘총선용’ 정책이었음을 스스로 보여 준 셈이다.

의대 증원 지지 여론은 압도적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시장화된 의료 체계하에서 과연 의대 증원만으로 필수의료·지역의료 공백을 해결할 수 있을지에 의문을 갖고 있다.

의사협회는 시장화된 의료 체계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의대 증원이 아무 효과가 없을 것이고 의사들의 경쟁만 격화시킬 것이라고 본다.

이에 맞서 좌파는 의대 증원만으로는 부족하고 필수의료·지역의료 공백을 해결하려면 시장 논리를 거슬러 공공의료에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민주당은 어부지리를 취하려 해 왔다. 그리고 기껏해야 의료 공공성을 강화한다며 실효성도 없는 꾀죄죄한 법률 두어 개를 내놓고는 할 일 다 했다는 식이다 ‘현실론’을 펴며 오히려 증원 규모를 줄이라고도 했다.

윤석열 정부는 두 달이 지나도록 필수의료·지역의료 공백에 대한 물음에 아무 답변도 내놓지 않았다. 시장 논리를 금과옥조로 여기기 때문이다. 새로 만든 의료개혁특위 위원장에도 자본가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제약바이오협회장 노연홍을 내정했다.

총선 참패와 그 뒤 이어진 행보로 정부 지지가 크게 약화된 상황에서 명분마저 취약해져 이제 슬그머니 물러서고 있는 것이다.

윤석열이 추진하는 것이든, 민주당이 제안한 것이든 ‘사회적 대화’는 의대 증원 규모를 절충하는 데 그칠 뿐, 의료 체계 개선책을 내놓지 않을 것이다.

일부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여기에 기대를 걸고 참여하는 것은 훨씬 광범한 노동자들에게 실망만 안겨 줄 가능성이 크다.

계급적 관점

이제 의대 증원이 철회되는 것을 지켜보거나, 지금 같은 의료 공백 상황을 기약 없이 견디는 것 말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일까?

이 문제가 처음 불거졌을 때부터 정부에 의미 있는 조처(나 양보)를 끌어낼 수 있는 힘을 보여 준 세력은 사실 전공의들뿐이었다. 비록 그 핵심 요구가 잘못된 것이었지만 말이다.

더 일반으로 간호사를 포함한 병원 노동자들은 오랫동안 인력 충원, 의료 공공성 확대, 공공의료 강화 등 진정한 의료 개혁을 요구해 온 역사가 있다.

반면, 윤석열 정부는 물론이고 민주당의 방침(과 집권 시절 정책)을 보면 위로부터의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실적 대안은 전공의들이 투쟁의 핵심 요구를 바꾸는 것이다. 그들이 다른 보건의료 노동자들과 함께 병원과 정부의 시장 논리에 맞서 의료 개혁을 위해 싸운다면 진정한 개혁이 가능할 것이다.

노동자 의사들의 노동계급적 의식과 독립적 조직이 필요하다 이번에 전공의들이 보여 준 병원을 멈출 수 있는 힘은 제대로 된 대안을 향해야 한다 ⓒ출처 경북대병원

최근 박단 전공의협회 대표가 SNS에 올린 메시지는 의미심장하다.

“수련병원 교수들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착취의 사슬에서 중간관리자 역할을 해 왔다 … 문제의 당사자인 병원들은 의-정 갈등의 무고한 피해자 행세를 하며 그 부담을 다른 보건의료 노동자들에게 고스란히 전가하고 있다. … 의료 체계의 상업화, 시장화를 방치해 온 국가의 책임이 지대하다.”

이런 계급적 인식은 더 철저해져야 한다.

그의 말대로 병원 측은 자본가로서, 전공의와 다른 보건의료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것이 이득이다. 심지어 병원협회는 이 와중에 전공의들의 원성이 자자한 보건복지부 차관 박민수에게 총회 축사를 부탁했을 정도다.

대학병원 교수들은 대개 중간관리자로서, 병원 측과 이해관계를 일부 공유한다. 전공의를 포함해 병원 노동자들을 효과적으로 쥐어짜고 진료의 수익성을 높이는 데 열중하는 이유다.

의협이 주로 대변하는 개원의들은 대개 중소 자영업자로서 한편으로는 대규모 자본에,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자들의 압력 사이에 끼인 중간계급이다. 그들은 ‘공정한’ 시장 질서를 부르짖으며 양극화에 저항한다. 하지만 자본의 집중과 집적, 그 경쟁에서의 낙오와 승자 독식이야말로 시장 논리의 핵심이므로 이러한 항의는 모순되고 부질없는 외침에 그치고 만다.

마지막으로, 병원의 대형화와 함께 점차 늘어나고 있는 노동자 의사들이 있다. 전공의도 그 일부이고, 전임의나 입원 전담의, 그밖에 중소 병·의원에 고용돼 일하는 봉직의가 있다. 이들의 수는 전체 의사의 절반을 넘지만, 정작 이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독립적 조직은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노동자 의사들의 단결과 독립적 대안이다. 소수로 흩어져 있는 봉직의들과 달리 전공의들은 현재 대학병원에 집단으로 고용돼 있다는 점에서 그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고 지금도 (그 요구가 잘못됐어도) 이미 그렇다.

대안적 요구들

전공의들은 의협 등과는 독립적으로 사용자인 병원 측과 정부에 먼저 조건 개선을 요구해야 한다. 병원 노동자들의 조건 개선은 의료의 질 향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고, 그런 요구는 훨씬 광범한 노동계급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

당장 전공의협의회가 제시한 7대 요구만 봐도 그중 5가지는 지지할 만하다: 의사 인력 수급 추계 논의를 위한 기구 설치, 수련 병원의 전문의 인력 채용 확대, 노동시간 단축, 부당한 탄압 중단, 업무개시명령 폐지 등.

이 점에서 보건의료노조 지도부가 파업권 제한을 암시하는 입장을 내놓는 것은 우려스럽다. 환자들의 피해를 걱정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생명,” “죽음,” “집단 이기주의” 운운하며 비판하는 것은 장차 다른 (병원) 노동자들이 투쟁할 때 부메랑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전공의들의 요구 중 의대 증원 백지화와 의료 사고 면책은 반동적이다. 게다가 나머지 노동계급의 이익과 대립된다.

전공의들이 걱정하는 의료 사고는 또한 인력이 충분히 늘면 많은 경우 예방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시간이 갈수록 한편으로는 극소수 자본가로, 대부분은 노동자로, 다른 일부는 그 사이에 끼인 집단들로 분화된다. 이런 분화는 단지 직종의 세분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서로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계급 집단으로 나뉘는 것이다.

이러한 계급 분화에서 한국의 의사 집단도 예외가 아니다.

의사들은 갈수록 자신의 노동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는 현실(마르크스가 ‘소외’라고 부른)에 분통을 터뜨리지만, 해결책과 완화책은 계급에 따라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시장 의료하에서 성공한 자본가가 되고자 하는 의사는 기성 의료 체계의 본질을 지키는 게 자신에게 이익임을 점점 확신하게 된다.

노동계급의 일부인 의사는 냉혹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의료 같은 필수 서비스만큼은 차별 없이 제공돼야 하고, 노동자 의사 수가 늘어나는 것을 걱정하기는커녕 (계급의 잠재력 증대로서) 반겨야 한다는 것을 계급적 투쟁을 통해 깨달아 나아갈 것이다.

자신들의 처지를 개선하면서도 의료의 질을 높일 수 있다면 점점 더 많은 의사들이 의대 증원을 요구하거나 반기게 될 수 있다.

너무 늦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음번에는 그런 전망을 가진 전공의들이 나서서 투쟁의 요구를 바꾸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