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 파업:
윤석열에게 퇴로 열어 주는 이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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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고등법원은 정부의 의대 증원 결정에 관한 집행정지 항고심 판결을 이달 중순에 내리겠다고 밝혔다.
법원은 “모든 행정 행위는 사법 통제를 받아야 한다”며 정부에 의대 증원 규모를 정한 근거 자료와 회의록 등을 10일까지 제출하라고 했다.
사법부의 판결이 어떨지는 지켜봐야겠지만, 집행정지 신청이 받아들여질 경우 올해 입시 일정 등을 고려하면 사실상 내년도 입학 정원을 늘리는 건 어렵게 된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에게는 패소가 최악이 아닐 수 있다. 이미 의사들을 이기기가 꽤 어려워진 상황이어서, 사법부의 판결에 따른 증원 연기라는 모양새가 그나마 상처를 최소화하는 퇴로가 될 수 있다.
사법부가 나선 것이 윤석열에게는 승소하면 명분을 쥐고, 패소하면 퇴로가 열리는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총선에서 크게 승리한 민주당이 먼저 윤석열 정부에 퇴로를 제공하려 한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4월 29일 윤석열과의 영수회담에서 의료 개혁과 의대 증원의 필요성에 공감한다며 윤석열에게 힘을 실어 줬다. 대통령실은 “꽉 막힌 의대 증원 추진에 동력을 얻었다”(〈국민일보〉, 5월 1일 자)고 자평했다.
이재명은 선거 국면에서도 의대 증원 규모에 관해 “400~500명 정도가 현실적”이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나름의 퇴로 제공을 한 셈이다. 400~500명 증원안은 문재인 정부의 (실패한) 정책을 재탕하는 것이다.
이재명은 자신이 더 ‘합리적’이고 갈등 조정 능력이 있는 정치인임을 보여 주려는 듯하다. 이재명의 퇴로 제공으로 윤석열이 만에 하나 위기를 탈출한다면 이재명의 지배계급 내 위상은 더 올라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책략은 윤석열 심판을 위해 민주당에게 투표한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고, 나아가 이들을 헷갈리게 하거나 사기를 후퇴시키게 만드는 일이다.
어쨌든 윤석열로서는 난제인 의대 증원 문제에서 야당의 협조를 약속 받은 것이다. 증원 규모를 줄이게 되더라도 ‘협치’의 결과로 포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이비 개혁을 총선용으로 내놨다가 난관에 빠진 윤석열이 이 문제에서 민주당의 도움으로 탈출구를 찾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노동자 등 서민층의 입장에서는 의료 ‘개혁’은 간 데 없고 전공의 파업이 이어진 두 달 넘도록 전전긍긍하며 견딘 인내도 헛된 일이 되는 것이다.
무엇이 의료 개혁인가 — 계급간 불평등이 완화돼야 한다
오늘날 의료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서비스다.
그러나 자본주의 이윤과 시장에 맡겨진 의료는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지불 능력에 따라 서비스가 차등화 된다. 의료 불평등이 생기는 것이다.
특히 계급 간 불평등이 가장 큰 문제다. 이익이 되는 의료서비스에는 투자가 이뤄지지만, 노동계급이 주로 겪는 (예컨대) 산재 예방이나 치료(중증 외상 등)에는 투자가 이뤄지지 않는다. 소아과 오픈런, 응급실 뺑뺑이 등 ‘필수의료 공백’은 이 문제의 작은 일부일 뿐이다.
반면, 이재용 같은 자와 그 가족들에게 무슨 필수의료 공백이 있겠는가?
대도시로의 집중이 문제이긴 하지만(‘지역의료 공백’) 대도시에서도 노동계급이 이용할 수 있는 의료서비스는 불편하고 비싸다는 계급 문제가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지방 중소도시에서도 기업주·부자들은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어디에서든 노동자 등 서민층 환자들은 의사들이 돈벌이를 위해 불필요한 처방을 하는 것은 아닌지, 반대로 돈벌이가 안 된다고 대충 넘어가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해야 하는 처지다. 의사들의 수입이 의료 행위의 종류와 수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실제로 의사들 중 일부가 그런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며 신뢰는 더 허물어진다.
이런 문제들, 곧 계급 간 불평등을 완화하는 것이 진정한 개혁이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영국이나 프랑스 등에서 무상의료 체계가 만들어진 것이 실제로 개혁이라 할 만하다. 제2차세계대전이라는 대재난에 대한 보상과 거의 30년에 걸친 (완만하지만) 지속적인 경제 호황으로 의료(와 교육) 불평등과 불균형이 어느 정도 개선될 수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위기하에서는 이런 개혁의 성과도 점점 허물어진다. 오늘날 장기 불황 시기에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건강을 유지·회복하는 데 더 많은 돈을 쓰려 하지 않는다. 자본가들의 이윤과 지정학적 권력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본주의 국가는 재정과 의료 운영을 갈수록 이윤에 내맡기고 있다. 국가가 통제하는 부분에서도 재정 지출을 줄이려다 보니 낙후하고 관료적으로 일그러지기 일쑤다.
따라서 오늘날 공공의료라는 구호로 대표되는 의료 개혁은 훨씬 급진적인 전망 속에서 벌어지는 아래로부터의 대중 투쟁으로만 성취될 수 있다.
이재명의 의료 개혁은 윤석열과 얼마나 다를까?
의대 증원은 필요한 일이지만 윤석열의 의료 ‘개혁’은 노동자 등 서민층의 입장에서 개혁이라 볼 수 없다. 불평등과 불균형, 신뢰성 등 어떤 측면에서도 개선을 기대하기 어렵다.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는 대부분 수가를 올려 의사들을 해당 분야로 유인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정 투입 계획 등 핵심 내용이 극도로 부실해 빈 수레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정부의 재정 긴축 기조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만큼 건강보험료를 인상하거나 ‘비필수’ 의료에 대한 지원이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병원 인수합병’을 허용하고 ‘의과학자 양성’ 등을 내세우는 등 대기업들의 입맛에 맞는 정책도 슬쩍 끼워넣었다.
4월 1일 대국민 담화에서는 “의료서비스의 수출과 의료 바이오의 해외 시장 개척” 등을 내세우며 “의사들에게 더 크고, 더 많은 기회의 문이 열릴 것”이라며 “의사들의 소득은 지금보다 절대 줄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기도 했다. 이것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유사(사이비) 개혁일 뿐이다.
윤석열은 대선 당시 약속한 ‘코로나19 백신 피해자 지원’ 약속조차 지키지 않아 지금도 피해자 유가족들의 농성이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경실련 등이 의대 증원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윤석열의 의료 ‘개혁’을 (뭐 대단한 것이나 되는 양) 지지하는 것은 한심한 노릇이다.
전임 문재인 정부의 의료 개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연간 400명 의대 증원으로 규모가 더 작았는데도 당시 전공의 등이 크게 반발해 중도 포기했다.
함께 중도 포기한 공공의대 신설과 지역의사제 도입도 실효성 없는 개혁이었다. 공공의대를 졸업한 의사는 공공보건의료기관에서, 지역의대를 졸업한 의사는 지역 병원에서 10년간 의무적으로 근무하게 하겠다는 것인데, 학부 졸업 뒤 전공의 4~5년, 군의관 3년, 전임의 2~3년 등을 고려하면 실제 의무 복무 기간은 고작 2~3년에 불과할 수 있다.
시장화된 의료 체계를 내버려 둔 상태에서 누가 공공의대에 자원할 것이냐 하는 문제도 있었다. 지금도 정부가 장학금을 제공하고 공공병원에서 의무복무하도록 하는 제도(공중보건장학제도)가 있지만 2022년 지원자는 단 한 명이었다.
요컨대, 시장화된 의료 체계에 영향을 주기에는 애초에 너무 미미한 수준이라 시행이 돼도 효과를 내기 어려운 방안이었던 것이다.
증원분의 10퍼센트가량을 의과학자로 양성한다는 내용은 윤석열이 물려받았다.
이재명은 그의 경력 때문에도 의료 개혁에서 좀 더 기대를 받고 있다.
이재명은 2000년대 초 성남의료원 설립 운동을 거쳐 정계에 입문했다. 성남시장이 돼서는 실제로 성남시 의료원을 세웠다.
이재명은 이런 이력을 바탕으로 대선 당시 전국적으로 공공병원을 대폭 늘리겠다는 약속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영수회담에서 그가 윤석열의 의대 증원 방안의 허상을 비판하고 폭로하기보다는 지지와 협조를 표방한 것은 그가 공공의료 강화 약속을 지킬지 의문을 갖게 한다.
정치인 이재명의 ‘시작’이라는 성남시의료원은 현재 국민의힘 소속 현 성남시장인 신상진이 민간위탁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이재명은 이에 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