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정원 동결:
본전도 못 챙긴 (이제 윤석열 없는) 윤석열 정부의 의료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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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결국 의대 정원을 2024년 이전 수준인 3058명으로 동결하기로 했다.
전공의들의 반발에 부딪혀 1년 2개월 동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으름장만 놓더니 결국 백기를 든 것이다.
윤석열은 지난해 2월, 총선을 앞두고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방침을 발표했다.
이는 무엇보다 국내외 자본가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조처였다. 국내외 자본가들은 그동안 의사들의 저항으로 한국 의료의 시장화가 충분히 진척되지 못했다고 불평해 왔다. 민간보험 효율화, 원격의료, 의약품과 의료기기 개발, 임상시험 규제 완화 등의 성장이 의사들의 저항으로 가로막혀 왔다고 여겼다.
윤석열은 의대 증원을 지렛대로 한국 의료의 시장화를 촉진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의사들 내의 분화를 가속해 집단적 (의료 시장) 통제력을 약화시키려 한 듯하다. 총선 직전 대국민담화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 “우리 의료산업도 글로벌마켓으로 더 많이 진출해야 하는데 ... 역대 정부들이 9번 싸워 9번 모두 졌고, 의사들의 직역 카르텔은 갈수록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또한 의사 부족에 시달려 온 평범한 사람들의 표도 얻으리라 계산했겠지만, 어느 모로 봐도 의대 증원을 포함한 윤석열 정부의 의료 개혁은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고통에 시달리는데도 정부는 수수방관할 뿐이었다.
의료 체계를 더욱 시장화하려는 정부 입장에서는 똑같이 시장 논리를 내세워 저항하는 의사들을 설득할 명분도 취약했다.
집단 ‘사직’이라는 배수진을 치고 저항하는 전공의들에 대한 대책도 없이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는 점에서 무능하다고도 할 수 있다.
전공의 의존 비율이 높았던 상급종합병원에서 수술과 중환자·응급환자 치료에 차질이 생겼지만, 정부의 대책이라고는 진료비를 인상해 ‘경증’ 환자들이 응급실에 가지 못하도록 하는 게 다였다.
의료 시장화
지난 1년여 동안 환자들이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거칠게 작성한 통계에서도 이 점이 드러난다.
지난해 2월 빅5 병원에서는 폐암 환자가 수술 전 마지막 진료 이후 평균 22.8일 만에 수술을 했지만, 지난해 10월엔 41.6일로 1.8배 길어졌다(〈한겨레〉).
환자와 보호자들은 말 그대로 피가 마르는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대기가 밀려 아예 신규 암환자를 받지 않는 진료과도 늘었다. 희귀질환 환자들의 경우 대기와 치료 모두에서 엄청난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김윤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건강보험공단의 자료를 토대로 계산한 결과 지난해 2∼7월 ‘초과사망자’ 수는 3136명이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수익성에 차질이 생긴 대형병원 측의 불만을 달래려고 건강보험 재정만 수조 원을 쏟아부었다. 그러면서 초음파, MRI 등 각종 검사와 약품에 지원되던 건강보험 재정은 삭감해 결국 비용 부담은 환자들에게 떠넘겼다.
그렇게 1년 2개월을 보내 놓고 이제 와서 의대 증원도 철회하겠다니 사람들이 기가 차고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진보당, 보건의료노조(민주노총), 의료노련(한국노총) 등은 정부의 의대 증원 백지화 발표를 즉각 비판하고 백지화 철회를 요구했다.
다만 이들이 의사들 전체와 심지어 의대생들까지 ‘특권 집단’으로 묘사하며 상황을 ‘정부 대 의사’의 대결로 보는 것은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다.
실제로 저항에 나선 것은 전공의들(과 그 직속 후배들인 의대생들)이었고, 전공의들의 불만에는 가혹한 노동조건에 대한 노동자로서의 불만과 정부의 권위주의적 탄압에 대한 반감도 내포돼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지금도 병원협회 등 사용자 측과 ‘중간착취자’인 교수들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길 꺼리지 않는다. 아직 그것이 의사라는 직업적 공통점을 뛰어넘어 노동자 계급으로서의 독립적 대안 추구로 나서지는 않고 있지만 말이다.
좌파는 전공의들이 노동계급의 일원으로서 자기 계급에게 지지받기 어려운 요구(의대 증원 반대)를 하는 것은 비판하되, 그들의 조건 개선 요구와 조직화에는 지지를 보내야 할 것이다. 또한 윤석열 정부의 권위주의적 억압에 반대해야 한다.
전공의
정부의 의대 증원 백지화 발표에도 불구하고 아직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은 복귀하거나 수업에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다. 대선과 새 정부 출범 시기에 양보를 더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듯하다.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인 이재명 전 민주당 대표는 ‘사회적 합의’라는 원론적인 입장만 내놨다. 증원은 하되 그 규모와 시기 등에서는 합의를 끌어내겠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해에도 의대 증원 규모를 줄이거나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게 현실적이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민주당은 전임 문재인 정부 시절에 의대 증원을 추진한 바 있다. 하지만 당시에도 전공의들의 반발에 부딪혀 좌절됐다. 그 수가 고작 한 해 400명 씩 10년 동안 4000명을 증원하는 것이었는데도 그랬다. 민주당은 공공의대 설립도 추진해 왔다.
그러나 당시 민주당의 실패가 보여 주는 바는 시장화된 한국의 의료 체계를 찔끔 손보는 식의 ‘개혁’은 성공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공공의료를 조금이라도 확대하려는 시도는 민간 자본가들의 저항과 많은 의사들의 반발에 부딪혀 왔다. 친시장적 정부는 이런 저항을 무릅쓸 용기도 능력도 없다. 그러기는커녕 더한층의 시장화를 추진함으로써 스스로 ‘개혁’의 동력을 갉아먹어 왔다.
이재명 전 민주당 대표가 이런 모순에서 벗어나리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 ‘사회적 합의’는 문재인 정부의 ‘탈핵 공론화 위원회’처럼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아래로부터의 운동만 마비시키는 결말에 이르게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런 공론화 프로세스에 기대를 걸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의료 개혁은 아래로부터의 거대한 투쟁으로만 쟁취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