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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 퇴진 운동 극우 팔레스타인 트럼프 2기 이주민·난민 우크라이나 전쟁 긴 글

윤석열 탄핵 정국 123일 돌아보기

윤석열이 마침내 파면됐다. 헌법재판소는 넉 달이나 탄핵 심판을 끌더니, 결국은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밀려 오늘 윤석열을 파면했다.

어제만 해도 수만 명이 윤석열 파면을 외치는 마지막 밤이기를 바라며 안국동에서 경복궁까지 도로를 가득 채워 집회를 하고, 수천 명이 도로에 앉아 야간 집회와 철야 노숙 농성을 했다.

12월 3일 윤석열의 기습적인 비상계엄 선포를 통한 친위 쿠데타 기도가 그날 새벽 실패로 돌아간 지 딱 넉 달 만에 윤석열은 대통령직을 박탈당했다. 눈치 보며 시간만 끈 헌재 덕분이라기보다는 윤석열 탄핵 외에는 어떤 선택지도 헌재에 허용할 수 없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질긴 의지 덕분이다.

경제·안보 위기를 우파에게 유리하게 해결하려고 윤석열은 무려 43년 11개월 만에 계엄의 망령을 불러냈다. 그날 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국회의사당 앞으로 무작정 달려간 무명의 투사들이 오늘 기쁜 승리의 출발점이었다.

계엄을 좌절시킨 것은 보통 사람들의 저항이었다 ⓒ이미진

목숨을 걸고도 보상을 바라지 않았던 그들에게 윤석열 파면은 작은 보상이 될 것이다. 반면, 윤석열 파면은 미국과 한국의 우파에게는 큰 타격이다.

끈질긴 거리 투쟁 끝에 민주 염원 대중은 윤석열을 쫓아내고 1960년 4월 혁명에 이어, 현직 대통령의 계엄 시도를 두 번째로 좌절시킨 역사를 써내려 갔다. 4월 혁명은 계엄군의 출동과 경찰 발포 이후 단 열흘 만에 이승만을 하야시켰다. 이번에는 넉 달이 걸렸다. 곳곳이 차벽이나 바리케이드와도 같은 헌정 절차를 통해 윤석열을 퇴진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넉 달 동안 연인원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어떻게든 정권을 놓지 않으려는 윤석열 일당의 비열함과 악독함에 맞서 거리를 지켰다. 윤석열의 체포영장 집행 거부, 극우의 서부지법 폭동과 대학 순회 난동, 윤석열 석방, 헌재의 선고 지연과 기각 가능성 고조 등 숱한 위기를 넘겼다.

청년 세대의 응답

12월 4일 새벽 쿠데타를 좌절시킨 것에 영감과 용기를 얻은 청년들이 빠르게 거리로 나왔다. 여세를 몰아 민주 염원 대중은 윤석열 즉시 탄핵을 요구했고, 열흘 만에 윤석열을 직무정지시켰다.

대학 캠퍼스에서는 10여 년 만에 수천 명이 참가한 학생총회들이 열려 윤석열 탄핵 요구를 채택했다. 학생 수천 명의 연합 집회도 열렸다.

청년들이 윤석열 탄핵을 위해 여의도 앞으로 몰려오면서 12월 7일과 14일 시위에서는 대단한 열기 속에서 응원봉과 합창의 새 시위 문화가 등장했다.

청년 세대는 정치적 경험과 역사적 이해는 앞 세대보다 적어도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자라 온 세대다. 그들은 민주주의 권리를 일거에 밟아 버리려 한 윤석열 일당에게 분기탱천한 것이다.

쿠데타를 좌절시킨 것에 영감과 용기를 얻은 청년들은 빠르게 정치화했다 ⓒ이미진

이런 감성은 운동에 새로운 활력이 됐다. 남태령의 노숙 철야 농성은 여성 청년들의 패기가 만들어 낸 예상치 못한 상황 전개였다. 이런 열정은 윤석열 체포 촉구 한남동 철야 농성으로 이어졌다.

비록 노동계급 고유의 힘이 발휘되진 않았어도 윤석열 퇴진 운동은 노동계급에 속한 청장년들이 대거 참가한 운동이었다. 쿠데타 미수가 준 충격과 그것을 막아 낸 것에 고무된 청년들의 열기가 여론을 주도하며 국가 기관들을 크게 압박했다.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 출범해 매주 많게는 수십만 명, 적게는 수만 명이 모인 윤석열 퇴진 집회와 행진을 이끌었다.

비상행동이 운동에 제공한 리더십은 민주당이 주도하는 헌정 질서 내 윤석열 제거 절차에 아래로부터 동력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초기엔 윤석열 탄핵, 한덕수 탄핵, 윤석열 체포 등 효능감을 줬고, 청년 세대의 감수성을 잘 반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민주당의 신중함과 보조를 맞추려다 사람들에게 영감과 투지를 크게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심지어 위기를 겪기도 했다. 비상행동은 헌재의 결정 지연이 임계점에 이르자 막판에 매일 집회와 행진, 헌재 앞 차도 점거 투쟁을 벌이며 그런 손실을 만회했다.

3년간 꾸준히 윤석열 퇴진/탄핵 집회를 열어 온 촛불행동은 평일에도 계속 집회를 열며 운동 안에서 좀 더 투쟁적인 목소리를 대변해 왔다.

윤석열의 계엄 음모를 일찍부터 경계하자고 했던 촛불행동은 탄핵 정국 동안에 미국의 제국주의적 한국 정치 개입 기도도 꾸준히 비판했다. 촛불행동은 시간 끄는 헌재를 규탄하며 “기각이면 타도다” 라는 슬로건을 내걸어 막판에 지지자들을 무장시켰다.

그러나 탄핵 찬성자들 중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고 거리로 나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윤석열이 직무가 정지되고 심지어 구속된 후에도 남은 국가기관 내 요직을 차지한 자들과 국민의힘이 거리 극우와 연대해 반격을 펴는 상황에서 그것을 돌파하는 가장 효과적인 길은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거리로 나와 투쟁에 힘차고 새로운 동력을 제공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극우의 부상

많은 사람들이 12월 14일 국회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윤석열 파면이 박근혜 파면 때처럼 순조롭게 이뤄질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국지전 위험을 감수하며 계엄 음모까지 꾸민 자가 헌법·법률 절차에 순순히 따를 것이라고 본 것은 착각이었다.

윤석열 체포에 예상보다 2주가 더 걸렸지만, 쿠데타 미수 한 달 반 만에 현직 대통령을 구속시킨 것(1월 19일 새벽)은 사실 대중 운동의 효과였다.

기대대로라면 1월 19일은 윤석열 구속 소식을 들으며 일어나 안도하고 기뻐하는 일요일이 돼야 했고 그 하루 동안 윤석열 탄핵 인용(파면)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는 분위기가 전국에 퍼져 나가야 했다.

그러나 극우 세력들이 윤석열 구속영장을 발부한 서부지법에 난입해 폭동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뉴스의 주인공이 극우의 부상으로 바뀌었다.

그 폭동으로 윤석열과 국힘, 거리 극우의 결집은 더 공고해졌다. 국힘 정치인들은 더 노골적으로 극우적으로 말하고 행동했다. 탄핵 반대 여론이 형성되고 국힘 지지율이 순식간에 회복됐다.

한동안 거리 집회에서도 극우 측 규모가 더 컸다. 극우는 각 대학에서 탄핵 반대 선언도 기도했다. 대학생들의 여론조차 반으로 갈라진 듯 여론을 호도하려는 술책이었다.

청년 세대와 학내 여론이 압도적으로 군사 쿠데타 미수와 윤석열에 부정적인 흐름 속에서 공개적 입장 발표를 조직해, 장차 대학에서 극우 학생 운동을 키울 초기 재료들을 발굴하고 훈련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맞불 집회를 열어 여론 조작을 막고 초기 극우 인자들의 자신감을 약화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연세대, 서울대에서 시작한 맞불집회는 전국의 대학에서 벌어졌고, 극우의 학내 진출에 대항하는 보편적인 전술이 됐다. 만만찮은 반격에 직면하자 극우 유튜버들은 폭력적 본성을 드러냈다. 이를 들춰 낸 것은 대학 맞불집회 운동의 중요한 소득이었다.

ⓒ이미진

박근혜 탄핵 때와 달랐음

좌우 양극화 속에서 극우 주도로 우파가 결집해 윤석열 탄핵 찬반 여론은 대강 60:35 비율로 고착됐다. 박근혜 때에는 탄핵 직전 박근혜 지지율이 한 자릿수로 폭락했고, 탄핵 찬성은 75퍼센트 수준을 유지하거나 상회했다.

윤석열 퇴진 운동도 박근혜 때와 달랐다. 박근혜 퇴진 운동 때에는 공공부문 파업의 선두였던 철도노조 파업 대오와 좌파들이 그 운동의 닻을 올렸다.

당시 시위 규모는 촛불 운동이 시작된 지 보름 만인 민주노총의 전국노동자대회일에 15만여 민주노총 조합원 대오를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100만 명을 돌파했다.(그날 130만 명이 광화문-시청 시위에 참가한 것으로 최종적으로 조사됐다.)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이 노동계급의 주도성 발휘로 건설(빌드업)되고 있음을 보여 준 상징적인 날이었다.

그 덕에 이후 한 달 만에 여당이 반으로 쪼개져 국회 탄핵이 이뤄졌다. 국회 탄핵 과정에서 운동은 점차 민주당에게로 주도권이 옮겨간 채로 마무리됐다.

이번 윤석열 퇴진 운동은 박근혜 퇴진 운동이 멈춘 지점에서 다시 시작됐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민주당이 주도력을 발휘했다.

처음에 민주당은 과단성 있게 행동해, 계엄 해제와 윤석열 국회 탄핵안 가결을 정치적으로 주도했다.

그러나 국회에서 헌재로 공을 넘긴 후 민주당은 다시 예의 답답한 상태로 돌아갔다. 내란죄 수사는 증거 은폐가 쉬우므로 초기에 전광석화처럼 밀어붙여야 했는데, 한덕수에게는 초기에 초당적 협력을 제안해 시간을 끌고, 최상목에 대해서는 중대 결심 말만 반복하다가 끝내 자리에서 제거하지 못했다.

민주당은 합헌적으로 정권을 넘겨받기 위해 지배계급에게도 잘 보여야 하고, 낙점 후에도 그럭저럭 정권을 운영하려면 고위 관료들과 군부, 사용자들의 묵인과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애초에 민주당은 노동계급 투쟁을 호소할 수 있는 정당이 아니다. 그들은 개혁을 약속하며 노동자 투쟁은 자제시킨다. 서부지법 폭동 후에는 의식적으로 투쟁의 목표를 헌정 수호로 축소시키고, 심지어 중도 보수를 표방하기에 이른다.

사회운동의 개혁주의적 지도자들은 윤석열의 군사 쿠데타 미수를 선진적 민주주의로 가는 정상 궤도로부터의 일시적 일탈로 여기고 사법제도가 모종의 합리성을 발휘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헌정질서를 복구하고 그에 대한 신뢰를 재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윤석열이 “헌정 질서를 지키려 한 고도의 통치 행위”라고 계엄을 정당화하는 마당에 이는 위험한 프레임이었다.

개혁주의적 사회운동 지도자들은 윤석열 탄핵과 조기 대선을 통해 민주당이 재집권하면(또는 민주당과 온건 좌파의 연립정부가 구성되면) 의회 다수당이자 집권당으로서 윤석열 세력 숙정과 사회 개혁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고지에 설 수 있다고 본다.

개혁주의자들의 이런 목표, 곧 자유주의자들과 (온건) 좌파를 묶는다는 것은 퇴진 운동의 기세와 전투성을 위태롭게 하는 효과를 냈다. 극우는 자신들이 뿜어내는 극단성이 반윤석열 운동을 위축시켰다고 여겼을 법하다.

헌재 불신

결국 동원이 정체하고 참가자들 사이에서도 불안과 불만이 커지는 상황에서 3월 8일 윤석열이 기습적으로 석방됐다.

비상행동은 그제서야 비상 긴급 행동을 선언했지만, 민주당과 동행하는 가운데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평일 집회 개최와 지도부 단식 농성뿐이었다. 더 다급해진 3월 말에 가서야 상징적이나마 민주노총 총파업 선언도 하고, 차도 점거에 나서는 등 전투성을 발휘했다.

이 시기에는 청장년 직장인들의 참가가 두드러졌다. 퇴근한 직장인들이 평일 집회에 우루루 몰려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4월 1일 안국동 철야 농성 때는 철야 후 5시 반 지하철 첫차를 타고 귀가하는 청년들이 있었다. 옷 갈아입고 출근하려는 것이었다.

막판에는 헌재에 대한 신뢰가 약화됐다. 여론조사에서 줄곧 50퍼센트를 상회하던 헌재에 대한 신뢰도는 선고를 지연시키면서 46퍼센트로 떨어졌다.

이 점은 집회에서도 느껴졌다. 민주주의를 유린하려 해 대중의 다수가 퇴진을 원하는 대통령, 선출된 국회가 3분의 2 넘게 탄핵한 대통령을 단 3명이 권좌에 복귀시킬 수 있다는 현실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극우의 부상과 윤석열 석방으로 위기감이 고조된 상황에서 이에 맞설 힘을 보여 줄 세력은 노동자들 뿐이고 방법은 파업이라는 급진 좌파의 의견이 비상행동 내에서도, 집회 참가자들 사이에서도 늘었다.

한사코 파업 명령을 거부하던 민주노총 집행부는 결국 3월 27일, 총파업을 선언했다. 상징적 수준에 불과했지만, 파업 투쟁의 객관적 필요를 집행부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매번 집회장 바깥쪽 끄트머리에 앉던 민주노총 대열이 마지막 철야 투쟁에서는 앞자리를 차지했다. 민주당의 주도력이 여전하고, 노동계급의 잠재력이 발휘되는 것을 제약했는데도 객관적 상황의 긴박함 속에서 민주노총의 책임이 부각된 것이다. 다음 번 대규모 투쟁은 지금 멈춘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돼야 한다.

4월 2일 보궐선거에서 국힘은 참패했다. 3년 전 지방선거에서 자신들이 이겼던 곳에서 모두 패했다. 낮은 투표율로도 부산 교육감, 경남 거제시에서 패한 것은 여론조사에서 드러난 것보다 민심 이반이 더 크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주민 배척을 내세운 자유통일당 후보가 국힘 후보가 없는 곳에서 30퍼센트 넘게 득표한 것은 경계할 일이다.

윤석열을 다시 구속해야 한다. 윤석열이 파면돼도 ‘윤석열 없는 윤석열 정권’은 60일 동안 생존한다. 쿠데타 연루 세력 수사를 전면적이고 전방위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그런 자들의 엄벌과 숙정은 민주주의를 지키고 키우는 길이다. 이제 다시 반격의 기회를 노릴 극우는 결코 조용히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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