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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파면 후 중단기적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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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4일 헌법재판소는 윤석열 파면 결정을 선고하면서 그의 위헌적 계엄을 좌절시킨 것은 “시민들의 저항과 [그로 말미암은 – 필자의 삽입]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이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계엄을 좌절시킨 평범한 시민들이 또한 윤석열을 파면하게 만들었다는 것도 중요하다.
어떤 전망을 하든 이 중요한 사실의 바탕에 있는 근본적인 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지킬 의지와 능력과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은 바로 평범한 사람들, 즉 다수가 노동계급에 속하는 대중이라는 점이다.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아래로부터의 대중 투쟁보다 이성과 지식인의 사상을 변화와 개혁의 동력으로 본다. 이른바 “헌재의 시간” 동안 자유주의자들은 윤석열 파면을 낙관했는데, 그 이유인즉 윤석열이 한 짓, 곧 계엄의 밤에 그가 부하들을 시켜 하게 한 짓들을 모든 사람들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고, 윤석열이 헌재 법정에서 했던 증언과 진술, 변론의 궁색함을 모두가 목격했는데, 재판관들이 달리 어떻게 결정하겠냐는 것이었다.
이것은 세상을 본질적으로 사상들의 경쟁의 장으로 보고 거기서 우월한 주장이 승리를 거둔다고 보는 계몽주의 세계관일 뿐이다. 물론 결과적으로 그들의 전망대로 결정이 났다. 그러나 부패한 사회에서는 이성이 지배하지 않는다. 상이한 이해관계를 가진 상이한 세력들의 충돌이 지배한다. 헌재 재판관들도 윤석열 파면 운동의 커다란 압력이 아래로부터 가해지지 않았다면 법적·정치적 엘리트층의 일부로서 그들 나름의 이해관계에 따라 심판했을 것이다.
물론 변화를 위한 운동을 건설하기 위해 급진적인 사상을 전파하는 것은 중요하다. 실제로 마르크스주의자는 표현의 자유를 부정하는 법률들에 반대해 싸운 오랜 역사와 전통이 있다. 그러나 사상 자체는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사상이 물질적 힘, 곧 대중의 운동과 만날 때만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
그래서 레닌은 이렇게 강조했다. “대중의 행동, 예컨대 대규모 파업이 의회 활동보다 언제든 더 중요하다.”

민주주의와 변화의 동력이 대중 투쟁이라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탄핵 국면에서도 바로 이 보통 사람들, 다수가 노동계급에 속하는 이 사람들 자신이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점을 잊고, 개혁 또는 진보 정치인들이 관리하는 국가가 민주주의를 지켜 준다고 흔히 착각했기 때문이다.
첫째, 국회가 계엄을 막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국회가 계엄 해제를 결의했다. 그러나 다수 국회의원들이 그 회의를 열 수 있게 바깥에서 그들을 지켜 준 건 누구였는가? 바로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바로 평범한 사람들이 군대 병사들(그들도 대부분 노동계급에 속한다)을 설득하고 그들과 논쟁하면서 병사들의 사기와 확신을 떨어뜨린 것(헌재 결정문이 언급한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이 국회의원들이 회의를 개최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이었다.
둘째, 흔히들 국회가 윤석열 탄핵소추를 의결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야당 의원들과 극소수 여당 의원들이 탄핵소추 의결을 했다. 하지만 두 차례 발의해서야 비로소 가까스로 윤석열 탄핵소추 의결을 할 수 있었는데, 이것도 여의도 거리를 약 1백만 명가량의 평범한 시민들이 가득 메우고서야 이뤄진 일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셋째이자 마지막으로, 헌재의 파면 결정과 관련해서도 진정한 원인이 뭔지 잊지 말아야 한다. 헌재 재판관들의 평결을 마무리하면서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윤석열을 파면한다”고 선언했을 때 우리 모두 감격에 겨웠다. 필자는 그 장면을 이후 TV에서 거듭거듭 볼 때마다 문형배 재판관이 참 이뻐 보였다.
민주주의의 주체, 그리고 헌법의 모순
하지만 문형배 재판관은 2019년 헌법재판관 인사청문회 때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이 잘못된 것이냐는 질문에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이는 이번 윤석열 파면 결정문과 모순되는 것이다. 윤석열 파면 결정문은 윤석열의 계엄 포고령을 이렇게 비판했다. “피청구인은 계엄 포고령을 통해 국민의 정치적 기본권,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을 포괄적·전면적으로 제한하고 그 행사를 범죄 행위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통합진보당 강제 해산은 정치적 기본권의 억압이었다.
필자가 문형배 재판관을 폭로하려고 이런 일을 언급하는 게 아니다. 필자는 그저 어느 나라든 자본주의 국가 헌법에는 모순과 그로 말미암은 애매함과 모호함이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어떤 자본주의 헌법이든 모순으로 애매하고 모호한데, 헌법 제정권이 자본주의 정치인들에게 있으면서도, 상충하는 계급 이해관계들의 타협을 표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13~14년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을 둘러싸고 헌법재판소가 다룬 주된 쟁점은 다음과 같았다. “노동자·농민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것은 계급주의적인 것이고 국민주권주의와 모순되는 것인가 아닌가.” 결국 당시 헌재는 통합진보당이 국민주권주의에 위배되는 위헌 정당이라고 결정했다. 그렇다면, 국힘을 생각해 보자. 당명에 “국민”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어도, 또 툭하면 ‘국민’ 어쩌고저쩌고해도 실제로는 부유층의 이익을 구현하려 애써 왔으므로 국힘은 국민주권주의와 모순되는 정당 아닌가?
2015년 초 이석기 전 의원의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살펴봐도 헌법의 모순을 알 수 있다. 당시 대법원 판결은 내란을 이렇게 정의했다. “폭력 등의 수단에 의하여 헌법 기관의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헌법의 기능을 소멸시키는 행위.” 2013년 이석기 당시 의원이 체포되던 상황은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없었다. 그리고 이석기 당시 의원과 그의 조직은 당시에 그런 행위를 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당시에 그와 그의 동지들은 그저 토론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석 달 전 서부지법을 점거해 폭동을 일으킨 극우 시위대를 생각해 보자. 방금 인용한 대법원의 내란 정의에 따르면 서부지법 폭도들이야말로 내란을 실행한 자들 아니겠는가. 그리고 헌재 박살을 공공연히 집회 연단에서 여러 차례 주장한 전광훈은 내란 선동을 한 것 아니겠는가.
정말로 “헌재의 시간”이 됐더라면?
지금까지 헌법의 모순과 헌법재판소의 모순에 관해 얘기했다. 그런 얘기로써 필자가 하려는 말은, 탄핵 운동 지지자들이 이른바 “헌재의 시간” 동안 그저 헌재 결정을 기다리거나 헌재를 응원했다면 크게 위험했을 뻔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탄핵 운동 지도부들이 헌재 결정을 기다리거나 헌재를 응원하며 흘러가던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에 극우는 우파를 대거 동원해 헌법과 헌재의 모순을 공략했다. 특히, 윤석열은 12/3 계엄이 내란이 아니었다며 내란 개념의 애매함과 모호함을 이용했고, 법원과 검찰은 윤석열 구속 시간 문제를 놓고 애매하고 모호한 기본권 개념을 윤석열에게 유리하게 적용해 주었다.

헌법과 헌재의 모순을 공략한 우파의 반격으로 좌우 세력균형이 우파 측에 유리해지게 될 수도 있다는 위험이 탄핵 운동 측에도 감지됐다. 극우의 3·1절 대규모 동원과 특히 3월 8일 법원(과 검찰)의 윤석열 석방을 계기로 그랬다. 그러자 민주당과 비상행동은 동원을 강화했다. 그전까지 이재명 당시 민주당 대표는 안일하게 선거를 의식해 ‘중도 보수’를 자처하며 우클릭을 해 오고 있었다. 3월 10일치 중앙일보는 “이재명 우클릭, 尹 석방에 ‘스톱’”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이런 뒤늦은 경계심에 대해 보도했다.
그후 3월 15일 탄핵 운동 측의 거대한 동원이 있었고, 이후 헌재 선고일까지 헌재에 대한 탄핵 운동 측의 비판 수위가 점점 올라갔다. 3월 24일 헌재의 한덕수 탄핵 기각 이후로는 비판 수위가 더욱 높아졌다. 시간 끌지 말고 빨리 선고하라는 비판이었지만, 민주당을 포함해 탄핵 운동 참가자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었으므로 진정한 뜻은 윤석열을 즉각 파면하라는 것이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헌재의 좌고우면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필요했고, 투쟁을 지지하는 광범한 대중이 왼쪽으로부터 제기하는 것이었으므로 효력이 있었다. 그러므로 윤석열 탄핵 운동 일각에서 민주당 비판을 삼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비판을 위한 비판은 부적절하지만, 대중의 투쟁적이고 좌파적인 정서를 표현하는 비판은 효과가 있고 필요하다.
대선 가도에서 이재명 민주당 후보는 또다시 우클릭해 대기업 소유자·경영자들의 환심을 사려 할 것이다. 3월 20일 국민연금 합의에 대해 노동단체들과 좌파적 사회단체들이 “정치적 야합”이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우익과의 타협은 지지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적들의 자신감과 사기는 높이는 구실을 한다.
자유주의자들은 또한 윤석열과 그의 처 김건희가 정치적 부패 행위(가령 해병대원 사망 책임 은폐 등)를 너무 많이 저지른 것에 민주당이 탄핵 공세를 가하자 윤석열이 터무니없이 불균형적으로 계엄으로 응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중국에 적대적인 태도를 드러내어 극우 지지자들을 선동한 것도 탄핵을 모면해 보려는 거짓 데마고기에 불과하다고들 한다. 친중 인사들이 민주당과 공직을 다수 장악하고 있다는 윤석열의 음모론으로 치부된다.
가까운 전망
이제 앞으로 몇 달 동안 탄핵 운동 참가자들 앞에 놓인 전망 문제를 네 가지 키워드를 통해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선거. 둘째, 민중전선. 셋째, 극우, 넷째 제국주의.
첫째, 선거 문제를 언급하고자 한다. 순서상 맨 먼저 언급하는 것은 대선 문제가 가장 중요해서가 아니다. 필자가 위에서 강조했듯이, 계엄 반대 투쟁, 국회 탄핵소추를 위한 투쟁, 헌재 파면 결정을 위한 투쟁 등 탄핵 운동의 매 국면에서 결정적이었던 것은 아래로부터의 투쟁이었지, 국가 기관들의 조처와 행동이 아니었다. 탄핵 국면에서 우리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대선 승리로써 극우 퇴치와 사회 개혁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봤다.
그러나 민주당과 좌파가 다수의 국가 공직들을 잡게 되더라도 사회의 진정한 권력은 경제 권력을 갖고 있는 자들, 특히 대기업 소유자·경영자들에게 있고, 선출되지 않은 국가 관료들은 이들의 이해관계에 응답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가령 한덕수 같은 자는 노무현 때도 국무총리를 역임하며 노무현 임기 말기의 친기업 정책들을 적극 시행했다. 그는 4월 8일 윤석열의 최측근 중 하나이자 쿠데타 미수 당일 밤 안가에서 수습책을 함께 의논했던 이완규 법제처장을 헌법재판관에 지명했다. 여야를 넘나든 국가 관료들은 한덕수 외에도 많다. 결국 친기업 정책들을 시행한 역대 민주당 정부들은 지지자들을 배신하고 실망시키고 심지어 환멸을 안겨 줬다.
선출되지 않은 국가 관료 가운데 정보기관장들과 군부 최고 지휘관들은 특별히 언급할 만한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다. 특히, 동아시아 지정학 정세가 매우 중요한 한국 상황에서는 개혁파 정부들도 보수 정부들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역사적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가령 노무현 정부는 미국의 이라크 점령을 돕고자 파병을 했다. 문재인도 북한 김정은과 판문점에서 서로 손을 잡은 모습을 보여 남북한간 평화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켰지만 결국 남북 관계는 다시 악화됐다. 그래서 2019년 8월 16일 북한은 문재인의 ‘평화 경제’ 운운하는 발언에 대해 “평화 경제? 삶은 소대가리가 웃는다”고 비난했다. 2020년 3월 4일에도 북한은 문재인을 비난했다.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와 하는 짓거리 하나하나가 다 구체적이고 완벽하게 바보스럽다.”
문재인의 대중국 외교로 말하자면, 사드를 들여온 후과로 그는 중국 국빈 방문 중에 열 끼 중 여덟 끼를 중국 측 인사 동석 없이 혼자 먹는 수모를 겪었다.
이런 역사적 경험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이번 대선은 정치적으로 매우 양극화된 정세 속에서 극우의 지지를 받는 후보와 대결하게 될 것 같으므로 탄핵 운동 지지자들이 대선에 무관심하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과 여타 민주헌정수호 원탁회의 정당들에게는 선거가 일종의 목적 자체이겠지만, 근본적 사회 변혁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착취나 차별을 받는 사람들의 궁극적 해방이라는 훨씬 중요한 목적을 위한 하나의 특정 수단인 것이다.
따라서 혁명적 좌파에게는 선거 방침이 원칙이나 기본입장 문제가 아니라 전술 문제이다. 그래서 선거 참여에 유리한 조건이 조성돼야만 선거에 참여하는 게 적절하다. 그런데 탄핵 운동 과정에서 부차적이었던 군소 좌파 정당이 두 달밖에 남지 않은 선거에서 괜찮은 성적을 거둘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지정학적 충돌이 일어나지 않고 그의 신상에 별일이 없다면 이재명 후보가 탄핵 찬성 진영 다수의 지지를 받는 후보가 돼 선거에서 탄핵 반대 진영 후보와 겨룰 개연성이 클 것 같다.
그와 경쟁하는 더 좌파적인 후보를 세웠다가 너무 형편없는 득표를 하면 차라리 안 내보내는 게 나았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반면 좌파 측 후보가 이재명 후보가 낙선할 만큼 많이 득표해서 우파 측 후보가 어부지리를 얻는다면 그것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행위라고 평가받을 뿐 아니라 심지어 반동적인 짓이라고까지 비난받을 수 있다.
따라서 좌파 일각에서 뭐라고 각을 세우든 필자는 이재명에게 투표하는 게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단, 불가피성을 미덕으로 격상시키지 말아야 하며 결코 필요한 비판을 삼가서는 안 될 것이다.
민중전선이냐 공동전선이냐, 또 민중전선이냐 계급투쟁이냐
이제 두번째 문제인 민중전선을 언급하고자 한다. 민중전선은 지금 이 나라에서 민주헌정수호 원탁회의라는 명칭을 취하고 있다. 민주헌정수호 원탁회의는 민주당과 진보당 등 야 5당과 그 지지 단체들이 결성하려 하는 연합을 말한다.
필자는 그냥 역사적 용어로 민중전선이라고 부르겠다. 민주당과 진보당 같은 민중전선 지도부들은 우익에 맞서기 위해서는 계급을 초월한 국민적 연합이 필요하다고 강조할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그 정반대이다. 극우나 우익을 패퇴시키려면 노동계급 투쟁이라는 막대한 힘이 필요하다.
물론 민중전선 전략은 투표에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투표 방침 정도는 필자가 위에서 전망하는 것처럼 각 정치 조직이 자신의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실행할 수 있다. 민중전선은 투표 연대 훨씬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관련 정치 조직들이 서로 비판을 삼가면서 자신의 정치적 독립성을 유보하고 정부의 공동 운영에 헌신하는 것이다.
민중전선은 좌파와 자유주의자들의 연립이라고도 정의할 수 있다. 1990년대 말 IMF 공황 이후 민주당의 최신 역사를 보든 1960년대 이후 미국 민주당의 역사를 보든, 또 2000년대 유럽의 사회적 자유주의 정당, 즉 신자유주의를 실행한 사회당과 노동당의 경험을 보든 좌파가 자유주의자들과 연합하는 정책은 모조리 실패했다. 자유주의와 좌파는 마치 서로 반대로 나아가려는 말들과 같아서 그 말들이 이끄는 마차는 마비되거나 자유주의 방향으로 가게 된다.
그러므로 민중전선의 실패는 필연적이다. 하지만 극우 등 우파가 득을 보는 것은 필연이 아니다. 노동계급 투쟁과 공동전선이 활성화되지 않는 경우에 우파나 극우가 득을 본다. 공동전선은 연립 정부 수립을 위한 전략적 연합이 아니라 사안별(때로 몇 가지 사안이 될 수도 있다) 공동 투쟁을 위한 전술적 연합이다. 특히, 극우의 공세에 대응하는 데에는 필수적이다.
노동계급의 투쟁이 반드시 경제 투쟁이기만 한 건 아니다. 좌파들이 서로 단결할 줄만 안다면 그들은 노동조합과 함께 극우에 반대하는 투쟁을 할 수도 있다. 이것은 필자가 탄핵 운동 참가자들이 직면해야 할 세번째 문제로 언급한 극우 문제로 우리를 이끈다. 넷째 문제(제국주의)와 합쳐서 언급하겠다.
윤석열 친위/군사 쿠데타의 주된 원인
윤석열 군사 쿠데타의 핵심 원인은 그의 좌파 증오와 좌파에 대한 전면 탄압 의지였다. 이는 계엄포고령 전체에 반영됐다. 해외 인권 기구들은 윤석열하에서 한국의 민주주의 지수가 하락하고 권위주의 지수가 상승해서 한국의 민주적 지위가 누적적으로 하락했다는 보고서들을 그동안 발표했다. 윤석열이 이렇게 정치적 억압 수위를 높여 왔던 것은 미중갈등 수위가 올라가고 북한의 핵 대응 능력과 의지도 올라가는 상황에서 남한 야당들과 정치적 반대파들이 자기를 공격하는 건 이적 행위이고 반국가 행위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특히 부정선거를 통해) 그 배후에 중국과 북한이 있음에 틀림없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정부 반대자들은 모두 “종북 좌파”이고, 그들의 국회 정당들이 탄핵 공세를 펴는 건 그들의 전술일 뿐이라고 봤다.
윤석열은 정말로 음모론을 믿었고 그 나름으로 지정학과 국내 공식 정치와 극우 대중 운동을 일관되게 연결시키는 듯했다. 물론 윤석열은 군대의 힘을 훨씬 믿었지만 거리 극우가 그토록 신속하게 우파 일반을 규합하며 그토록 놀라우리만큼 빠르게 성장해 자신을 지켜 줄 것처럼 보인 것에는 저윽 놀라고 매우 기뻤을 것이다.
그저 공식 여야 정당들 간의 충돌로 (자유주의자들처럼) 설명하기보다는, 이렇게 제국주의 지정학 갈등과 정부 지도자와 집권당과 기층 대중 운동을 연결하고 그 연결 끈으로서 음모론에 근거한 이데올로기를 주목하는 것이 더 일관된 설명이고, 역사유물론에 더 잘 부합한다. 물론 윤석열과 극우 일반은 이런 이론과 이데올로기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급박한 상황 전개와, 인식을 앞서가야 하는 실천 때문에 아직 그들도 이론과 이데올로기를 계발하는 것은 뒤처지는 듯하다. 특히, 자신들의 정치적 실천을 사회경제적 기본입장(강령)으로 아직 전환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극우가 이론과 이데올로기를 정립하는 데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처럼, 극우 운동을 경제 위기 속 지정학적 갈등 첨예화, 정부 지도자의 주도성, 기층 극우 대중 운동의 응답과 부상, 집권당이 이로부터 받는 우경화 영향(“극우의 주류화”) 등으로 설명하면, 즉 구조와 인간 행위자들, 또 토대와 상부구조를 이렇게 통합적으로 연관시켜 사태를 보면 앞으로의 전망은 더 심각한 정치 위기를 시사한다. 극우에 맞서고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을 앞으로 오히려 강화해야 한다는 점도 드러난다.
제국주의는 국내 민주주의에 악영향을 미친다.(특히, 위에서 언급된 바 4월 8일 한덕수가 한 짓을 떠올려 보고 트럼프가 그와 통화함으로써 사실상 그를 넌지시 지지해 주고 있다는 점도 생각해 볼 만한 점이다.) 심지어 미중 제국주의간 지정학적 충돌이 동아시아에서 일어난다면 한국 내 상황이 어쩌면 혁명적으로 급변할 수도 있다.
“혁명의 현실성,” 레닌 정치의 대전제
물론 전통적인 극우 언론인들인 조갑제와 김진과 정규재가 윤석열이 파면되지 않으면 “혁명 수준의 민중 항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염려했던 것은 기우였다. 아무리 격동기여도 지금의 상황은 지난 한 세기 동안 혁명적 마르크스주의가 혁명 직전 상황의 특징이라고 규정한 것에 아직 들어맞지 않는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는 혁명 직전 상황의 필수적인 특징 세 가지를 다음과 같이 든다.
1. 지배 계급이 자기네의 지배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지배를 유지할 수 없다고 느낀다.
2. 피지배 계급도 “더는 못 참겠다, 일어서자”고 느낀다.
3. 중간 계급은 전통적 정당들을 더는 신뢰하지 못하고 크게 동요하기 시작한다.
차례차례 살펴보자.
1. 지금, 지배 계급이 자기네의 지배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지배를 유지할 수 없다고 느끼고 있지는 않다. 윤석열의 군사 쿠데타는 1980년 전두환 쿠데타와 달리, 또는 1973년 칠레 피노체트 장군의 쿠데타와 달리 지배 계급이 학수고대하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배 계급은 사후적으로도 윤석열을 확고히 지켜주지 않았다. 아마 그들은 이재명이 대통령 되는 것도 그리 탐탁하지는 않겠지만 윤석열이 금세 또다시 사고치는 것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헌재도 이렇게 밝혔다. “이 사건 계엄 선포 당시 정치상황과 사회상황이 전시·사변에 해당한다거나 적과 교전 상태에 있었다고 볼 수 없음은 명백하다.”
2. 노동 계급도 “더는 못 참겠다, 일어서자”고까지 느끼지는 않는 듯하다: 탄핵 국면에서 노동계급의 자세는 절박하거나 필사적이지는 않았다고 보였다. 노동계급 사람들이 자기 계급 고유의 요구들을 절박하게 제기하거나, 계급 고유의 행동을 하자고 자기 지도자들에게 강력히 촉구하는 움직임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3. 중간 계급이 전통적 정당들을 더는 신뢰하지 못하고 크게 동요하기 시작한 것도 아니다. 물론 특히 소상공인들과 실직자들은 물가 상승과 정부의 긴축 재정, 여전히 높은 대출 금리 등으로 가장 커다란 고통을 받고 있다. 그래서 주로 그들이 극우 대중 운동의 기반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파시즘처럼 독자적 강령과 정당을 추구하기보다는 아직 국힘당을 지지하는 것에 머무르고 있다.
이런 계급 역학을 보건대 당장에 노동계급 혁명이 일어날 공산은 크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한 가지 매우 중요한 변수가 있다. 제국주의 때문에 어느 한 나라의 문제가 국제적 문제로 전환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특히 레닌이 이를 강조했다. 제국주의간 지정학적 충돌은 순식간에 사태를 달라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가령 타이완을 놓고 미국과 중국이 크게 충돌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한반도나 한국 국내 상황도 엄청난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제국주의하의 이러한 국제적 역학을 두고 1924년 루카치는 “혁명의 현실성”이라고 부르며 레닌의 핵심 사상이라고 지적했다. “혁명의 현실성”은 구체적으로 다음 세 가지를 뜻한다.
(1) 국민 대중의 민주주의 염원과 민주주의적 요구들은 단지 국내의 권위주의 정권과 충돌할 뿐 아니라 제국주의 열강과도 충돌하게 된다.
(2) 제국주의 때문에 민중 혁명을 그 논리적 결말에 도달하게 할 세력은 노동계급밖에 없다.
(3) 미래의 혁명이 현재의 길라잡이가 된다.
하나씩 살펴보겠다.
(1) 민주주의를 위한 민중 혁명은 제국주의의 반대에 부딪힌다는 명제다. 윤석열이 비록 미수에 그쳤지만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가장 주된 동기(좌파 척결)의 근저에는 지정학적인 맥락이 있었다. 윤석열의 쿠데타 기도는 단지 그와 그의 아내의 부패 문제를 둘러싸고 민주당이 공격한 것 때문만이 아니다. 민주당은 명태균 게이트 등을 언급하며 전적으로 윤-김 사기꾼 부부에만 집중하고 있는데, 미중간 제국주의적 갈등이라는 명백한 배경은 애써 언급을 피하고 있다. 그러나 윤석열의 쿠데타는 특히 중국과 북한 그리고 이 국가들을 지지하는 일부 좌파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재명도 그런 좌파의 일부(그것도 지도자)로 여겼던 것이고.
그리고 윤석열과 극우는 미국 측도 이재명을 믿지 못한다고 보고 있다. 사실 미국 의회조사국은 지난해 12월 23일 보고서 하나를 냈는데 거기서 이런 진술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전 한국 지도자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중국을 비판하는 태도를 갖고 있었는 데 반해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이런 태도에 의문을 제기했다.”
요컨대 윤석열을 몰아내고자 하는 민중 혁명은 미국 제국주의와 충돌할 공산이 매우 크다.
(2) 제국주의 때문에 민중 혁명을 그 논리적 결말에 도달하게 할 세력은 노동계급밖에 없다는 명제다. 민중 혁명이 성공하려면 노동계급이 혁명적 운동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한국 지배 계급은 미국과 극도로 밀접한 경제적, 정치군사적 관계를 맺어 왔다. 그런데 민주당은 지배 계급의 최선책이나 차선책이 되고자 하므로 미국 지배자들과 단절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따라서 민중 혁명을 이끌 능력은 노동계급에 있다. 노동계급이 힘을 한껏 발휘해 중간계급을 이끄는 것이 유일하게 성공 가능한 시나리오다.
노동계급이 중간계급의 지지를 받으며 민주주의와 국가 자주성을 구현하는 혁명, 바로 이를 두고 트로츠키는 연속혁명이라고 불렀다.
(3) 미래의 혁명이 현재의 길라잡이가 된다는 명제다. 혁명가들은 혁명의 전망을 먼 미래로 미뤄 두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적절한 전술 방침과 계획을 세우려면 미래의 혁명과 연결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혁명의 전망을 먼 미래로 미뤄 두면 우리는 불가피하지 않은데도 타협으로 이끌리고, 차악론으로 이끌리고, 선거를 사회 개혁의 주요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으로 이끌리고, 대세 추수로 이끌리고, 결국 혁명적 기회를 놓치게 된다.
혁명에 못 미치지만 대규모 항쟁의 가능성이 있는데도 혁명가들이 선거와 의회 참여를 통해 사회 개혁을 이루는 것에 주된 관심을 두는 것도 바로 혁명의 현실성을 인식하지 못한 결과이다.
오히려 혁명에 못 미치는 항쟁이 일정에 오르는 듯한 때 혁명가들은 혁명을 위한 조건들을 스스로 창출하는 데 일조해야 한다. 현재를 혁명적 미래 쪽으로 향하도록 틀어 버리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맺음말
사회의 위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주관적 요인이 그만큼 더 중요해진다. 1917년에 볼셰비키 당이 그저 멘셰비키 당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라. 특히 10월의 막중한 과업을 감당해 낼 수 있었겠는가. 계속 임시정부가 잘 하라고 압박을 가하는 수준에 머물렀다면, 또다시 반동적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트로츠키 말대로 “파시즘”은 이탈리아어 낱말이 아니라 러시아어 낱말이 됐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좌파가 대가를 톡톡히 치렀을 것이다.
물론 윤석열 정권은 파시즘이 아니고 그를 지키고자 아래로부터 등장한 극우 운동도 아직 파시즘으로 진화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노동자 조직과 좌파 조직을 깡그리 박살낼 능력과 의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개혁주의자들이 활동할 운신의 폭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재명이 설사 “수거” 당한다 해도 다른 개혁주의자들이 움직일 여지가 있다. 다른 개혁주의자들이 기회를 빼앗겨도 또 다른 개혁주의자들이 기회를 잡을 것이다.
역사를 통틀어 보면, 최악의 양극화 상황에서조차 개혁주의자들은 중간 지점을 찾으려 애썼고, 그런 길이 없는 때에도 그런 길을 내려 무진 애를 썼고, 안 되면 그런 길의 신기루를 만들어 냈다.
지금 정치적 상황의 혼란과 흐트러짐은 세계 자본주의의 구조적 원인들에 따른 것이다. 특히 제국주의적 충돌의 핵심 양상은 더는 강대국 대 약소국의 충돌이 아니라 강대국들끼리 충돌하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조건들은 계속 악화되고 있고, 일부 나라들에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기후 위기가 산불과 홍수로 비교적 가난한 사람들을 끔찍한 고통에 빠뜨리고 있는가 하면, 빈국에서 지진은 수많은 빈곤층 사람들을 죽음과 장애로 내몰고 있다.
바로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지배자들은 갈수록 권위주의적 지배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튀르키예 정부가 야당 유력 대선 주자를 비롯해 야당 정치인 100명을 체포한 것은 바로 한 달도 안 된 최근 사례일 뿐이다. 윤석열은 계엄 훨씬 전부터 정치적 억압을 강화해 오고 있었다. 윤석열이 대통령직에서 사라졌어도 미래 언젠가 또 다른 자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킬지도 모른다.
체제를 전복할 수 없고 그저 개혁할 수만 있다며 급진적이지만 수동성에 침잠해 있는 좌파는 그저 ‘정상성’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고 기원할 것이다. 그들은 위기를 일시적 에피소드나 초현실적 상황으로 보고 시스템 전복 호소를 윤석열 계엄만큼이나 비이성적이고 무모한 시도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혁명의 현실성” 덕분에 그런 기회가 왔는데도 못 보거나 놓치면 반동이나 심지어 반혁명에 직면할 것이다. 요컨대 시간이 갈수록 우리 앞에 제시되는 선택지는 1백여 년 전 폴란드계 독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경고한 것과 닮아가고 있다. 로자는 인류의 역사적 선택이 사회주의냐 아니면 야만이냐에 점점 근접할 것이라고 했다.
정말이지 우리는 자기만족에 빠질 여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