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 쿠데타 세력 비호해 온 국가기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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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일 이후 3개월 반이 지났다. 그러나 현재까지 검찰이 쿠데타 관련 중요 임무에 종사한 혐의로 기소한 사람은 윤석열을 포함해 겨우 20명이다. 그중에서 구속 기소된 자는 9명밖에 안 된다.
피의자 대부분이 국가기관의 고위 관료인 점을 고려할 때 그들을 구속하지 않는 것은 증거 인멸의 여지를 더 주는 것일 뿐 아니라 반격의 기회를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경찰 지휘부 중에 기소된 수는 3명, 구속은 2명, 그나마도 경찰청장 조지호는 1월 말 보석으로 풀려났다.
쿠데타 가담·용인 세력이 버젓이 활개 치고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최근 경찰은 대규모 인사 개편을 단행해 쿠데타 가담자들을 대거 승진시켰다. 가령 서울경찰청장 직무대리에 승진 임명된 박현수는 쿠데타 당일 경찰청장, 행안부 장관 등과 수차례 통화한 인물인데, 경찰청장 공백 상태에서 사실상 경찰 일인자 구실을 하게 됐다.
쿠데타 당시 서울경찰청 8층 상황실에서 국회 봉쇄 지휘에 적극 가담한 오승진 전 안보수사부장은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단장으로, 그 지휘에 따라 국회로 직접 출동한 다섯 명의 서울경찰청 기동단장들은 다섯 개 지역의 경찰서장으로 임명됐다. 여기에는 쿠데타 당일 국회 포위에 직접 가담하며 수사관까지 파견했던 영등포경찰서도 포함돼 있다.
구속 기소된 군 지휘부는 6명이다. 거기에는 민간인인 전 전보사령관 노상원도 포함돼 있다. ‘노상원 수첩’에는 쿠데타 이후 “수거”(체포·고문·살해) 대상자만 500명이 넘는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러나 검찰은 이 수첩을 손에 넣고도 어떠한 피고인의 공소장에도 관련 내용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불구속 기소까지 합치면 군에서는 12명이 기소됐다. 그러나 쿠데타 수행에서 군이 가장 핵심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축소된 수사일 것이다. 가령 검찰은 쿠데타 당일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며 병력 동원을 주도한 방첩사의 1처장 정성우를 아예 불기소 처분한 바 있다.
쿠데타 명분을 만들려고 북한을 도발한 위험천만한 행위들에 대한 ‘외환죄’ 수사는 국가 안보를 이유로 쏙 들어갔다. 오물풍선 대응 “원점 타격” 명령, 평양 무인기 사건, 북한 전방 4개 군단 공격 계획, 최근에는 공격헬기인 ‘아파치’ 부대의 훈련을 북방한계선에서 진행해 북한을 도발하려 했다는 의혹까지 나오는데도 말이다.
더구나 국정원 관련자들은 성역이라도 되는 듯 단 한 명도 기소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에는 검찰의 은폐 공작도 연관돼 있을 수 있다. 쿠데타 당일 검찰과 국정원이 소통해 중앙선관위로 출동했다는 의혹은 꾸준히 제기돼 왔다. 검찰은 국정원 파고들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내각 책임자들은 또 어떤가? 최상목은 윤석열에게 비상입법기구 예비비 지시 문건을 받고 곧바로 일명 F4 회의(최상목·한국은행장·금융위원장·금융감독원장)를 소집해 자금의 무한 공급을 결정했다. 최상목뿐 아니라 내각 핵심 멤버들은 비상계엄 법률 검토(법무부), 언론사 단전·단수 지시(행정안전부) 등 윤석열과 함께 쿠데타를 준비하고, 집행하고, 방조했다.
그러나 검찰은 12월 3일 ‘계엄 국무회의’ 참가자 중 윤석열과 국방부 장관 김용현을 뺀 나머지 9명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윤석열의 일방적인 통보만 있는 ‘회의’였다는 것이다.
12월 4일 윤석열 안가에서 회동한 것으로 알려진 행안부 장관 이상민, 법무부 장관 박성재, 대통령실 민정수석 김주현 등은 경찰이 수사하고 있다. 그러나 수사 진척 발표는 2~3개월째 감감무소식이다. 그 사이 이들은 휴대폰을 교체했다.
대통령경호처는 쿠데타 모의의 핵심 연결 고리 구실을 했고, 쿠데타 가담자들이 사용한 비화폰 서버의 압수수색을 가로막았다. 그런데 검찰은 경호처 차장과 경호본부장에 대한 경찰의 구속영장 신청을 세 차례나 반려하다가 3월 18일에야 비로소 법원에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영장 청구 내용이 충실한지는 알 수 없다.)
그 사이 증거 인멸할 여유를 준 것이나 다름없다. 더구나 윤석열이 석방된 상황에서 관저 압수수색은 더욱 쉽지 않을 것이다.
법리에 따라?
법원도 별로 다르지 않다. 구속 취소 판결을 내린 지귀연 판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서부지법 폭동으로 극우 시위대에게 된통 당하고도 여태 윤석열 파면 결정 하나 못 내리고 있다.
법원은 쿠데타가 사법부 일각도 겨냥했음을 알면서도 그에 반발하기보단 계엄하에서의 ‘후속 조치’를 논의하는 회의를 열었다. 윤석열이 직접 계엄 해제를 발표해 쿠데타가 확실히 미수로 돌아간 뒤에야 “안도한다”는 입장문을 냈다.
공수처가 대통령 관저를 압수수색하려 했을 때도 중앙지법은 경호처가 그것을 막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
국가인권위, 국민권익위의 행태도 가관이다. 인권위는 “윤석열의 방어권을 보장하라”는 결정문을 채택했고, 권익위는 쿠데타 사흘 뒤에 윤석열 비판 성명을 낸 소속 위원 4명에 대한 중징계를 시도하고 있다. “상관인 대통령의 처벌을 주장”하고 “야당 입장에 치우친 것”이 국가공무원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국가기관들에게 법리는 늘 부차적인 요소로, 정치적 판단 뒤에 따라오는 명분일 때가 훨씬 많았다.
기층의 윤석열 반대 대중운동이 상당한 압력을 가해, 국가기관들을 위축시킬 때에만 그들을 다소 물러서게 만들고, 진상을 일부라도 실토하게 만들 수 있었다.
예컨대 윤석열 체포는 고비 고비를 넘겨 2차 시도에서 성공했는데, 그렇게나마 체포가 가능했던 것은 윤석열의 투철한 수호 부대로 보이던 대통령경호처가 내부적으로 분열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군사 쿠데타 미수가 일으킨 커다란 충격과, 국회 탄핵안 가결로 자신감이 올라 1월 중순까지 계속 수십만 규모로 이어지던 윤석열 반대 운동의 효과였다.
그러나 정세의 세력 균형은 결코 고정돼 멈춰 있는 것이 아니다. 윤석열 체포 이후 극우들이 서부지법 폭동 등 광적으로 날뛰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정치적 효과가 있는 것을 깨닫고 기세가 높아졌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우파 결집이 일어나 검찰과 법원은 노골적으로 윤석열이 석방되게 돕거나 허용했다.
기층 운동의 힘을 키워야만 국가를 뒤로 물러서게 할 수 있다. 그러지 않고 국가기관에 대한 기대와 의존성을 부추기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는 체제의 불평등을 해결·완화하기는커녕, 강압적인 힘을 동원해 그 체제를 수호하는 기구다.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지배계급의 가장 효과적인 정치 조직이다.
그런 점에서 이재명 민주당 대표뿐 아니라 진보당 등 좌파조차 법리적 이유로 일찍부터 “윤석열 파면은 정해진 수순”이라 낙관한 것은 위험하다. 특히 민주당이 1월경부터 국정 안정을 부쩍 강조하며 최상목 내각과의 협력을 추진한 것은 친민주주의 진영 측을 방심하게 하고, 윤석열과 극우 운동에는 기회를 준 것이다.
좌파라면 민주당의 이런 타협주의적인 면을 분명히 비판해야 한다.
선거로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국가기관의 본질적인 비민주성이 바뀌지도 않을 것이다. 더구나 현재의 국가기관들에는 윤석열의 쿠데타를 옹호하는 자들이 수두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