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 탄압과 사상의 자유:
20년 전 송두율 교수 마녀사냥을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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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가 몇몇 노동운동가의 북한 연계설을 앞세워 국가보안법 수사를 요란하게 벌이고 있다.
북한 연계설은 (참이든 거짓이든) 진보 운동을 분열시켜 약화시키기 딱 좋은 무기다. 이번 수사가 소위 “간첩단” 사건 수사라고 보도되자 관련자들을 방어하는 목소리가 크지 않다.
지난해 국가보안법 7조에 관한 헌법재판소 위헌 심리 때 좌파들이 앞다퉈 국가보안법 폐지 기자회견들을 연 것을 떠올리면 아쉬움이 그만큼 크다.
그 덕분에 국정원과 경찰은 민주노총과 보건의료노조의 중앙 사무실을 아주 보란 듯이 압수수색할 수 있었다. 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도 북한 연계자로 지목된 간부의 개인 책상과 물품 수색에 (마지못해서이지만) 협조했다.
국가보안법을 이용한 탄압에서 ‘방어할 만한’ 사상을 선별해 대응하는 것은 운동의 분열을 방치하는 효과를 낸다. 20년 전 송두율 교수 사건을 돌아보면 이 점이 잘 드러난다.
37년 만의 귀국
송두율 교수는 1967년 독일로 유학을 간 후 해외 반독재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던 실천적 철학자이다. 학문 연구와 통일 운동 차원에서 여러 차례 방북했지만 고향인 한국에는 2003년까지 귀국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이 송 교수는 독일 국적을 취득했다.
독재 정권 시절뿐 아니라 민주당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후에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때문에 입국할 수가 없었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망명한 주체사상 철학자이자 북한 고위 관료 출신 황장엽이 송 교수를 북한 권력서열 23위인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지목한 탓이다.
그러다가 노무현 정부 첫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초청 형식으로 9월 22일 입국했다. 초청자들이나 송 교수나 “설마 노무현 정권 아래서 무슨 일이 있겠는가 [하고] 현실을 낙관[했다.]”
송 교수는 회고록 《미완의 귀향과 그 이후》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했고 국정원과 법무부 등 주요 국가기관도 냉전적 사고로부터 자유로운 분들이 책임을 맡고 있[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라고 하는 준 국가기관이 초청하는데 신뢰하지 않을 수 없었죠.”
노무현 자신이 민주화 운동과 인권 변호사 출신이었다. 노무현 정부 초대 국정원장에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초대 회장인 고영구 변호사가, 국정원 기획조정실장에는 진보적 북한학자 서동만 교수가 임명됐다. 검찰 수사를 지휘하는 강금실 법무부장관도 민변 출신이었다. 송 교수의 귀국 실무자들도 민변 변호사들이었다.
그러나 송 교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국가보안법 탄압과 마녀사냥이었다.
마녀사냥
사전에 국정원은 청와대, 독일 대사관, 송 교수 측과 형식적 조사를 약속했다. 하지만 송 교수가 조사를 받으러 오자 돌변해, 변호인 입회를 불허하며 송 교수를 고립시켜 놓고 북한 노동당의 최고위급 간부라는 자백과 북한 내부 정보 진술을 강요했다. 구속된 후, 검찰도 변호인 입회를 불허했다.
그때 한나라당(국민의힘의 전신) 대표 최병렬은 “해방 이후 최대의 거물 간첩 사건”이라며 국정원 수사 상황을 공개했다. 그러자 언론들도 본격적으로 마녀사냥에 나섰다. 언론들은 “‘독일 석학’이라는 탈을 쓴 ‘비밀 노동당원’”이라며 송 교수를 물어뜯었다.
그들은 사회운동과 좌파까지 겨냥했다. “주한미군 철수론, 한총련, 안티조선운동 등의 배후에 송두율 교수가 주장한 ‘내재적 접근론’이 존재한다.”
공안 당국은 심문 과정에서 송 교수를 맹비난하는 언론 칼럼들을 지속적으로 보여 주며 송 교수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했다. 송 교수는 이렇게 회고했다. “이른바 한국 사회의 여론을 주도하는 지식인들이 내 문제를 밖에서 지금 이렇게 보고 있으니 잔말 말고 수사에 협조하라는 것이다.”
결국 송 교수는 변호인도 없이 고립된 조사 과정에서 북한 노동당 입당 사실을 털어놨다. 그러자 진보 진영은 분열했고, 일부는 속았다며 대놓고 전향과 반성을 요구했다. 당시 본지의 전신인 〈다함께〉는 국가 탄압과 마녀사냥에 반대하며 송 교수의 사상·표현의 자유를 옹호했다.
송 교수는 공안당국이 요구한 북한 정보 제공과 노골적 전향 등은 거부했지만, 북한 노동당 탈당, 대한민국 헌법 준수, 처벌 감수, 독일 국적 포기 등의 입장을 발표한다. 국가 탄압과 마녀사냥, 진보진영 일부의 등돌림 속에서 본인 사상의 자유를 일부 양보한 것이다.
징역 7년형을 선고한 1심 판결 전후로 국내외 각계 인사들이 한국 정부에 항의했다. 송두율 교수의 스승인 위르겐 하버마스뿐 아니라 노벨문학상 수상자 귄터 그라스, 미국의 급진 역사학자 하워드 진, 미국의 저명한 평화운동가 놈 촘스키 등 저명한 지식인들이 송두율 교수 마녀사냥을 규탄했다. 국제사면위원회는 송 교수를 양심수로 지정했다.
‘송두율 교수 석방과 사상·양심의 자유를 위한 대책위원회’가 결성돼 그의 석방과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했다.
2004년 7월 21일 고등법원은 송 교수 본인이 인정한 북한 노동당 가입과 북한 방문 이외의 대부분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부푼 기대를 품고 37년 만에 고향에 온 송 교수는 열 달 동안 야만적인 탄압과 마녀사냥에 시달리다 마음의 상처와 천식을 얻은 채 독일로 돌아갔다.
노무현 정부의 위선
노무현 정부는 송 교수에게 완벽한 위선자들이었다. 노무현이 국회에서 “국제사회에 한국의 폭과 포용력”을 보여 주자고 연설한 날, 송 교수는 검찰에 여섯 번째로 출두해 조사를 받았다. 법무부장관 강금실은 검찰과 자신이 “다를 게 뭐 있나” 하며 검찰의 구속수사 방침을 수용했다.
1년 뒤 노무현이 “국보법은 독재시대의 낡은 유물.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내야 한다”고 말했음에도 그 진정성을 믿기 어려웠던 이유다.
결국 노무현 정부와 당시 여당 열린우리당은 국회 과반수 의석을 가지고도 국가보안법을 개정·폐지하지 않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국가보안법이 악법이란 점을 인정했지만 그것을 그대로 놔뒀다. 국정원 개혁을 말했지만 국정원의 대공수사권도 폐지하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의 국정원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비밀) 협상을 주도했으면서도, 국가보안법 사건(‘일심회’ 사건)을 터뜨려 민주노동당 분열에 일조했다.
박근혜 퇴진 촛불 운동 덕에 집권했다가 또다시 대중에게 환멸을 안겨준 문재인 정부도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2024년에) 경찰로 이관하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즉시 폐지하는 것이 아니었고, 그조차 경찰 권한 강화 차원이었지, 억압 기능 약화 목적이 아니었다.
역대 민주당 정부도 체제를 앞장서서 수호하는 기관과 악법을 유지하는 데 이해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체제 수호 위한 핵심 억압 기관, 국정원
국정원은 박근혜 퇴진 촛불 운동 같은 거센 압력이 있을 땐 슬쩍 움츠러들었다가도 국면이 달라지거나 정권이 우파로 바뀌면 다시 나대는 일을 반복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국정원은 탄압과 공작의 전면에 나섰다. 그중 극히 일부가 발각돼 처벌됐는데, 윤석열은 그조차 되돌리고 있다. 두 정부의 국정원장들이 모두 사면·복권됐다.
2003년 마녀사냥 당시 송두율 교수 수사를 담당한 정점식은 “미스터 국가보안법”으로 불렸던 황교안 라인의 공안검사다. 황교안이 박근혜 정부의 첫 법무부 장관이 됐을 때 그 밑에서 통합진보당 해산TF 팀장을 맡았고, 그 공으로 대검 공안부장까지 올랐다. 검사 시절 윤석열과 가까웠던 덕분에 여당의 새 친윤 지도부에 포함됐다.
심지어 국정원은 해외 교민들을 ‘잠재적 간첩’으로 간주하고 감시와 공작을 자행했다. 송 교수를 옭아맨 근거도 그런 공작의 산물이었다. 송 교수가 북한 고위 지도부 일원이라며 국정원이 내놓은 결정적 증거는 독일에 파견된 북한 측 관리의 북한 보고용 파일인데, 이는 국정원이 독일 교포 사회에서 벌인 첩자 침투 공작으로 입수한 것이었다.
국정원 같은 생래적인 억압 목적의 기관은 개혁될 수 없다. 오로지 해체돼야만 한다.
사상·표현의 자유, 남북 왕래의 자유
국정원 같은 기관들의 마수에 맞서려면 국가보안법과 그 적용에 반대해 사상의 자유를 일관되게 옹호해야 한다.
관련자의 사상이 방어 받을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순간, 국가보안법이 노리는 분열 효과에 걸려드는 것이다.
송두율 교수가 북한 사회를 “내재적 접근”을 통해 봐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좌파적 민족주의의 견해다. 그러나 그가 북한 사회를 무비판적으로 옹호한 것은 아니었다. 국정원이 핵심 증거로 들이댄 북한 측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나온다.
“그는 순수한 부르주아 ... 남과 북에 대하여 명백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있는데 ... 그에게 한번 짭짤하게 말해주려 하다가도 정세 변화와 기분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 통일전선 대상이라는 점을 고려하여.”(김형태 변호사 회고)
국정원은 자기 정당화를 위해 송 교수를 한결같이 모략했던 것이다.
한편, 국가보안법 탄압이야말로 법 적용의 자의성과 계급간 이중 잣대를 보여 준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며 방북한 문익환 목사, 문규현 신부, 임수경, 소설가 황석영은 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았다. 반면 임수경 씨와 같은 행사에 참석했던 노태우의 심복 박철언은 처벌받지 않았다.
1998년 현대 창업주 정주영과 함께 방북한 동아일보 기자단은 김일성의 항일 전투를 보도한 1937년 동아일보 인쇄판을 금으로 제작해 김정일에게 선물했고, 같은 때 중앙일보 회장 홍석현은 김정일에게 보석이 박힌 시계를 선물했다. 그러나 평양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던 2000년 여름, 송 교수는 친북 인사라는 이유로 귀국이 좌절됐다.
그럼에도 송 교수가 1973년 북한 노동당에 입당했던 일 때문에, 진보 진영 일부는 방어는커녕 송 교수에게 전향을 압박하거나 등을 돌렸다.
송 교수 입국을 추진했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한 상임이사는 이렇게까지 말했다. “[입당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들어온다고 해도 막았을 것 …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구속 수사밖에는 없다.”
송 교수 귀국 다큐멘터리 〈경계도시 2〉에 이런 모습을 그대로 담은 홍형숙 감독은 이렇게 꼬집었다. “그동안 부정해 온 국가보안법의 잣대를 진보 스스로 송 교수에게 적용하는 모순에 빠진 것이다.”
진보 진영의 분열 때문에 송 교수 본인은 고립감을 더 크게 느꼈을 것이다. 평생을 독재와 분단 종식을 위해 헌신하면서 쌓아 온 자기 사상을 스스로 일관되게 방어하지 못한 데에는 이런 상황이 영향을 줬을 것이다.
이는 송 교수 본인에게도 상처로 남았지만, 한국의 진보 측에게도 나쁜 선례를 남겼다. 이때 이미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은 분열한 것이다.
송 교수가 민족 재통일과 좌파 민족주의 관점에서 북한 노동당에 입당하고 북한 인사들과 교류한 것은 그의 사상을 그 나름의 방식으로 실천한 것이다. 그러나 그 방식은 폭력적이지 않고 평화적인 것이었다.
그는 말과 글로 자신의 견해를 표현했을 뿐이다. 서로 상대의 주장과 사상을 말과 글로 비판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그의 주장과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국가보안법을 이용한 탄압에서 물러서고 양보하는 것은 잘못된 접근이다. 국가보안법은 사상의 자유 자체를 부정하는 희대의 반민주 악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