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글
트럼프, 해리스, 격동의 미국 정치
〈노동자 연대〉 구독
이 기사는 필자가 노동자연대 공개 토론회 ‘트럼프, 해리스, 격동의 미국 정치’에서 했던 발제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두 달도 남지 않은 미국 대선은 유례가 드문 정치적 격동 속에 치러지고 있다.
7월 13일 트럼프 암살미수 사건이 있었고, 2주 후에는 바이든이 대선 후보에서 사실상 끌려 내려왔다. 이 사건들은 미국의 쇠락과 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바이든의 후보 사퇴는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이 부상해 바이든에게 결정타를 날린 결과이기도 하다. 현직 대통령이 항의에 밀려 재선 출마를 접은 것은, 1968년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 밀려 재선을 포기한 민주당 대통령 린든 존슨 이후 처음이다.
애초에 바이든이 별다른 기대를 얻지 못했음에도 대통령이 된 것도 정치적 격동의 결과였다. 2020년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M)’ 운동이 트럼프를 위기에 빠뜨렸다. 이에 대응해 트럼프는 극우 운동을 적극 부추겼고, 그 극우가 2021년 1월 6일 국회의사당에 난입하자 미국 지배계급은 트럼프가 선을 넘었다고 보고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바이든 정부하에서도 대중운동은 계속됐다. 우익의 임신중지권 공격에 맞선 항의가 대표적이지만, 이민자 권리 방어 운동 등 여러 차별 반대 운동, 극우 반대 운동도 계속됐다. 그보다 작지만, 생활고에 맞선 노동자들의 파업도 꾸준히 증가했다.
그럼에도 올해 대선은 좌파가 부상하기는커녕, 트럼프 재집권이 가시화되고 바이든의 부통령이 그에게 박빙으로 맞서는 구도로 진행되고 있다.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은 매우 현실적이다. 사기꾼 억만장자, 미국과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망가뜨리고 죽음으로 내몬 자, 성범죄를 저지르고 온갖 증오를 퍼뜨리는 극우 인사가 백악관에 재입성할 수도 있는 것이다.(관련 기사: 본지 339호 ‘트럼프에 반대해야 하는 이유’)
이는 애초에 트럼프의 부상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조건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트럼프가 출마한 지난 두 차례 대선 때보다 극우의 세계적 부상이 훨씬 두드러진다. 이번에 트럼프가 재선하면 전 세계 극우·파시스트가 환호하고 기세가 오를 것이다.
이는 미국과 전 세계 노동계급에 중대한 위협을 제기할 일이다.
팔레스타인 인종학살 공범, 친기업 후보 해리스
그렇다면 미국의 평범한 사람들은 이런 트럼프를 막기 위해 해리스를 찍어야 할까?
민주당은 해리스를 바이든과 차별화하려고 해리스를 이스라엘에 쓴소리도 하는 인물로 포장하고, 해리스의 유색인종 여성 정체성을 적극 부각시킨다.
이는 민주당이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에 의해 큰 타격을 입었음을 보여 주는 동시에,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 임신중지권 방어 운동, BLM 운동 등을 지지한 광범한 사람들을 민주당 표로 다시 끌어들이려는 시도다.
하지만 해리스는 부통령으로서 바이든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며 이스라엘의 인종 학살을 지지해 왔다.(관련 기사: 본지 514호 ‘카멀라 해리스, 이스라엘 지원해 온 또 다른 장본인’)
해리스는 출마 선언 1주일도 안 돼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이 트럼프를 이롭게 한다고 비난했고, 이스라엘의 학살할 ‘권리’(‘자위권’)를 줄곧 옹호하고 있다. 해리스가 당선된다면 그는 지금까지 그래 왔듯 이스라엘을 계속 지원할 것이다.
이런 해리스에게 투표하는 것은 미래의 인종 학살 공범(트럼프)을 막기 위해 현재의 인종 학살 공범(해리스)을 지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의 투지와 대의를 크게 훼손할 일이다.(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또한 해리스는 유색인종 정체성을 내세우면서도, 엄격한 국경 통제를 공약하고, 중남미 출신 이민자들을 범죄자로 매도하는 인종차별 언사를 쏟아 낸다. 그는 현 정부하에서도 강도 높은 이민 통제를 주도해 “국경의 여황제”라는 별명이 붙었다. 해리스는 자신이 트럼프보다 이민 통제에 더 유능하다고 부각시켜 보수 표를 뺏겠다는 계산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트럼프와 극우의 인종차별적 공격에 정당성을 부여해 그들을 이롭게 하고, 이미 차별받는 이민자들의 삶을 더 망가뜨리는 일이다.(관련 기사: 본지 509호 ‘트럼프의 이민자 공격 베끼는 바이든, 오히려 트럼프를 강화시킬 것’)
한편, 민주당은 해리스의 부통령 후보 티머시 월즈를 친서민 개혁가로 포장하고 “중산층 살리기” 공약을 잇달아 내고 있다.
하지만 월즈가 후보 지명 전, 주지사로서 추진한 복지는 지배계급 주류가 정한 한계를 결코 넘어서지 않았다.(관련 기사 본지 515호 ‘미국 민주당의 뻔뻔한 해리스/월즈 포장’)
해리스가 ‘밥상 물가’를 잡겠다며 내놓은 식료품 가격 인상 규제 공약은 제목만 있을 뿐 구체적 내용이 전혀 없다. 그리고 중산층 생계 안정을 지원한다는 세금 감면 및 보조금 지원 공약은 기업 투자를 촉진하는 정책이다.
그러면서 해리스는 “현 정부의 방침을 계승해, 대통령이 된 후에도 프래킹*을 금지하지 않겠다”고 밝혀 석유화학 기업주들에게 구애했다.
해리스와 월즈의 진짜 청중은 제국주의자들, 군 장성들, 대자본이다. 해리스가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가족 가치와 법질서를 수호하는 정부, 부자 감세와 군비 증강을 추진하는 정부를 약속한 이유다.
그들은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의 일부다. 애초에 트럼프 부상과 귀환의 가장 큰 책임이 그들과 그들이 구현하는 정치에 있다.
바이든/해리스가 소생케 한 트럼프
2021년 바이든과 해리스는 미국 사회를 위기에서 구출하겠다고 약속하며 취임했다. 그 구출이란, 미·중 간 제국주의 경쟁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미국 자본주의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었다.
바이든은 중국과 경쟁하는 첨단 산업 부문에 막대한 지원을 제공하고, 트럼프의 관세 공격을 계승해 중국을 압박하고, 동맹국들을 결집시켜 중국을 포위했다.
이런 정책은 지정학적 위기를 심화시켰다. 인도-태평양 전역에서 긴장이 고조되고 군비 증강이 가속화했다. 바이든은 러시아를 상대로 한 우크라이나 대리전을 기회 삼아 나토를 강화하고 확대했다.
거기에 더해 바이든이 지원하는 이스라엘의 인종 학살이 현재 중동에서 확전 위험을 키우고 있다. 이제 미국은 아시아·중동·우크라이나, 세 전선에 동시에 대응해야 하는 처지다.
바이든은 사회적 양극화 극복과 서민 구제를 약속했지만, 바이든 정부가 투입한 자금 대부분은 기업 지원에 돌아갔다. 정부의 서민 구제는 한시적 조처에 그치거나 자본가 계급이 용인할 수 있는 좁은 범위 안에 머물렀다.
게다가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물가가 급등해 서민 생계비 위기가 극심해졌다. 가뜩이나 미적지근하던 기대가 차게 식어, 임기 후반 내내 바이든 지지율은 30퍼센트대에 머물렀다.(이는 지난 트럼프 정부의 동 시기 지지율과 엇비슷한 것이다.)
트럼프는 바이든 정부하에서도 서민의 친구를 자처하며 생계비 위기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이용해 부상했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분노의 방향을 지배계급 전체(트럼프도 그 일원이다)가 아닌 “리버럴 엘리트”로 뒤틀며, 인종차별을 부추기고 이민자를 속죄양 삼는 거짓 해법을 제시한다.
트럼프의 핵심 기반은 그가 성장시킨 인종차별적 극우 운동이다. 트럼프는 극우 사상을 공론의 장으로 끌고 들어오고, 열광적인 대중 집회를 열어 극우에 자신감을 불어넣고, 소규모 극우 단체들에게 전국적으로 알려질 기회를 제공한다.
극우의 사회적 기반은 중소기업 소유주, 소자영업자, 전문직들이다. 이들은 노동계급과 달리 자비로 군대 수준의 무장을 갖추고 주 경계를 넘나들며 인종차별적 폭력을 일상으로 벌일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중심축 구실을 하며 대기업 권력층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자극해, 자신보다 광범한 유권자층을 트럼프 표로 모으고 트럼프 재선 가도의 핵심 동력을 제공하고 있다.
그저 트럼프에게 투표(정부 심판 투표를 포함한)하는 일부 대중과 트럼프가 그런 사람들의 표를 모으는 중심축(인종차별적 극우 운동)을 구분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좌파가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트럼프 지지자들의 ‘온당한’ 요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끌리게 된다. 그러면 대중의 분노를 극우적으로 뒤틀며 인종차별적·반동적 정치를 강화하는 운동의 위험에 제대로 맞서지 못하게 된다.
지금 상황은 트럼프가 처음 부상했던 당시의 역학이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트럼프는 미국이 수십 년 동안 위기로 썩어 들어가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미국 정치인들은 1970년대에 시작된 장기 불황에 대응해 1980년대 이래로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시행했다. 그 결과 대다수 미국인의 삶이 망가졌다. 산업 부문들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고, 사회 안전망은 긴축으로 파탄 났다. 반면 부자들은 국가의 구제를 받고 번영을 누렸다.
경제 위기는 미국 패권의 위기와 맞물렸다. 미국이 중동 전쟁에서 실패를 겪는 동안 중국을 비롯한 경쟁국들이 부상했고, 미국은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대응하며 모순과 한계를 거듭 드러냈다.
2008년 집권한 민주당 오바마는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경제 위기에서 부자들만 구제해 환멸을 샀다.
환멸과 분노가 쌓이며 정치 양극화가 심화됐고, 트럼프는 그 오른쪽 주자로서 부상했다. 트럼프는 모든 것을 빼앗겼다고 느끼는 사람들과, 언제나 공화당에 돈을 대고 표를 모아 주던 부유한 엘리트층을 능수능란하게 단합시켜 2016년 대선에서 승리했다.
당시에 미국 지배계급 대다수는 트럼프를 마뜩잖아 했다. 특히, 트럼프가 그들의 패권 전략, 즉 경제적·지정학적 동맹 네트워크를 통해 패권을 추구하는 전략의 일부를 교란시킨 것을 크게 못마땅해 했다.
하지만 그들은 트럼프가 제공하는 막대한 기업 감세를 기꺼이 누렸고, 트럼프가 부추기는 인종차별과 반이민 정서가 나름 유용하다고 여겼다. 공화당 정치인들은 트럼프가 모은 표를 탐내 극우 언사를 한껏 차용했다.
그러는 동안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엉망진창이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트럼프는 팬데믹을 방치해, 죽지 않았어도 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트럼프는 당선 첫날부터 임기 내내 줄곧 항의에 직면했다. 그 절정은 2020년 BLM 운동이었다.
맞물리는 위기
2021년 대통령이 된 바이든과 민주당은 트럼프를 제거하려고 사법 공격을 가했지만, 이는 트럼프의 반항아 이미지 강화에 도움이 됐을 뿐이다.(관련 기사: 본지 455호 ‘재판으로 트럼프의 위협이 더 커질 수 있다’)
그런 가운데 극우는 공화당 하부 조직을 장악해 친트럼프 인사들을 공직에 올려, 공식 정치에 대한 트럼프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공직에 진출한 친트럼프 인사들은 공식 정치를 교란하는 한편 이민 통제, 임신중지권 공격 등 반동적 정책을 펴 기층에서의 우익적 급진화 심화에 힘을 실어 줬다.
미국 국내 정치의 위기는 대외 정책의 위기와 맞물렸다. 트럼프파 의원들은 미국의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을 문제 삼으며 사상 최초로 하원의장을 해임하고 이후 입법 과정을 사실상 마비시켰다.
트럼프는 재선하면 우크라이나에서 즉각 발을 빼겠다고 해 유럽 지도자들의 패닉을 자아냈다.
이 발언에는 유럽 동맹국들이 우크라이나 전선을 맡고 미국은 중국 전선에 집중해야 한다는 전략적 고려가 깔려 있다.
대외 정책에서 트럼프와 민주당의 차이를 과장해서는 안 된다. 트럼프와 민주당 모두 호전적 제국주의자들이고, 중국 견제가 최우선이 돼야 한다는 데에 동의한다.
재임기에 트럼프는 미·중 무역 전쟁을 일으켜, 전임 오바마 정부 때 추세로 존재하던 대중(對中) 적대를 본격화했다. 그리고 바이든은 트럼프의 중국 적대 정책을 지속하고 더 철저하게 만들었다. 바이든 정부하에서 중국 적대는 정부 정책의 핵심 강령이 됐다.
해리스가 당선되면 바이든의 이 방침을 계승할 것이다. 이미 해리스는 한미일 3국 동맹 강화 등을 통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영향력을 제고하겠다고 공약하고 있다.
트럼프 역시 트럼프대로 자신이 해리스보다 중국을 더 강도 높게 억지하겠다고 공언한다. 예컨대 대만 문제에서 트럼프의 언사는 민주당보다 더 호전적이다.
이는 누가 당선되든 인도-태평양 지역 전반에서 긴장이 첨예해질 공산이 크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 그 전선의 일부인 한반도에서도 긴장과 불안정이 커질 것임을 시사한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친분’이 한반도 긴장 완화의 요인일 수 있다는 일각의 관측이 (트럼프의 해악을 보아 넘기는 단견임은 차치하고라도) 비현실적인 까닭이다.(관련 기사: 본지 518호 ‘트럼프가 되면 한반도에 긴장 완화 상황이 올까?’)
그런데 바로 같은 이유에서, 트럼프가 당선해도 우크라이나를 운명에 맡기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면 미·중 간 세력 균형에 큰 영향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트럼프와 민주당 사이에 차이도 있다. 바이든의 패권 전략은 다른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을 미국 주도 블록으로 결집시키는 것을 바탕으로 한다. 반면 트럼프는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기 때문에 기존 미국 동맹국들과 일부 불협화음을 낼 수 있다.
한편, 이렇게 국내외의 위기가 맞물리는 가운데 트럼프가 득을 보는 것이 필연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미국 국외의 위기가 다시 국내 정치의 격동과 맞물리는 가운데 대중운동이 정치 지형을 흔든 사례인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을 살펴보는 것이 유용하다. 앞서 지적했듯 이 운동은 바이든에게 결정타를 가해 결국 그의 재선 도전을 좌절시켰다.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은 트럼프에게도 타격을 입혔다. 이 운동이 캠퍼스 점거 물결을 타고 정치의 중심으로 부상한 4~5월, 바이든보다 강경한 어조로 이스라엘을 옹호한 트럼프의 지지율도 동반 하락했다.
저항을 옭아매는 차악론과 정체성 정치
지금 트럼프가 부상하는 데에는, 모든 잠재력과 급진적 정서를 민주당으로 흡수시켜 온 미국 좌파 정치의 한계도 책임이 있다.
현재 버니 샌더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AOC) 등 민주사회주의 운동의 주도적 인사들과, 전미여성기구(NOW), ‘휴먼라이츠캠페인’(HRC),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 흑인무슬림지도자위원회(BMLC) 등 미국의 주요 여성·유색인종 단체들이 해리스를 지지하며 민주당 선거 운동에 매진하고 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정치가 작용하고 있다. 첫째, 실질적 변화가 의회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는 개혁주의이고, 둘째는 해리스가 유색인종 여성이라는 점에 배타적 강조를 두는 정체성 정치다.
의회에 초점을 맞추고 대중 행동을 그 보조물로 여기다 보면,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는 미국의 양대 주류 정당 중 하나를 이용해야 한다는 ‘현실론’과, 그나마 민주당이 낫다는 차악론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차악’ 해리스를 ‘최악’ 트럼프에 맞선 ‘진보적’ 대안으로 포장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버니 샌더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AOC) 등 민주사회주의 운동의 주요 인사들이 줄곧 해 온 일이다.
그들은 반트럼프 언사로 명성을 얻고, 미국뿐 아니라 한국의 개혁주의 좌파들에게도 큰 기대를 샀다.
하지만 바이든-해리스 정부 임기 내내 그들은 민주당 정부의 노선을 정당화하고 진보적으로 포장해 주며 대중의 실망을 샀다.
민주사회주의 의원 모임 ‘스쿼드’는 바이든 정부의 이스라엘 지원 문제를 두고 임기 첫해부터 분열했고, ‘스쿼드’의 주축인 오카시오-코르테스 등은 이스라엘이 전쟁 할 권리(‘자위권’)을 지지해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의 대의를 저버렸다.
스스로 민주당의 포로가 되는 행보로 민주사회주의 의원들은 좌파로서 신망을 잃었지만, 그들 자신은 민주당 내에서 지도부 쪽으로 가까이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
이런 행보는 미국 정치에서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수십 년 동안 수많은 활동가들이 민주당을 통해 개혁을 이루겠다며 민주당에 투신했고, 그럼으로써 대중의 열정과 에너지를 저항이 아니라 민주당 내 쟁투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끌고 들어갔다.
민주당은 이를 이용해 대중의 변화 염원을 옭아매는 데에 아주 능숙하다. 아래로부터 투쟁이 분출하면 민주당은 당근과 채찍을 내민다. 당근은, 입법과 재정 지원으로 활동가들이 요구를 성취하도록 돕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채찍은, 투쟁이 민주당이 정한 한계를 넘어서면 공화당을 돕는 격이라고 협박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대중에게 민주당 투표만이 유일한 선택이라는 생각을 각인시키고 나면, 민주당은 우파 달래기에 매진한다.
물론 트럼프와 공화당이 더 고약한 정치를 대표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좌파가 민주당을 편들면, 대중의 삶을 망가뜨려 온 자본가 양당 중 택일이라는 거짓된 선택지에 스스로 갇히는 것이다. 이는 정치 전반에 대한 대중의 환멸을 키워 현재 트럼프가 서민의 대변자를 자처하기 쉽게 만들고 있다.
오랫동안 미국의 혁명적 좌파들이 민주당을 “운동들의 무덤”이라고 부른 까닭이다.
정체성 정치
이런 과정에서 정체성 정치는 매우 중요한 구실을 했다. 정체성 정치는 특정 차별을 받는 집단의 구성원 모두가 같은 이해관계를 공유한다는 정치라고 일단 정의할 수 있다.
인종차별·성차별·성소수자 차별에 맞선 전투적 대중운동들이 벌어졌던 1960년대가 지나고 탄압과 후퇴의 1970년대가 오면서 정체성 정치가 미국 사회운동에서 우세하게 됐다.
물론 차별이 만연한 세상에서 정체성은 저항의 촉매가 될 수도 있다. 공통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조직된 운동이 때로 중요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정체성 정치에는 중요한 한계가 있다. 인종, 성, 성 지향 같은 정체성은 계급을 넘나든다. 하지만 특정 차별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예컨대 미국 흑인들 대부분의 삶은 인종차별로 철저히 망가졌지만, 지배계급과 상층 중간계급에 속한 소수 흑인들은 인종차별을 경험하면서도 차별에 의존해 존속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수혜자가 돼, 체제를 지키려고 한다.
계급 분단선을 무시하면, 차별 반대 운동이 피차별 정체성을 공유하지만 체제 수호가 이득이 되는 지배계급 일부와도 동맹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빠지기 쉽다.
미국에서 이런 생각은 “주류화 전략”으로 표현됐다. 1960년대 말 차별 반대 운동의 보조물로 등장한 주류화 전략은, 차별받는 집단의 일원을 자본가 계급이 지배하는 공식 정치권에 입성시켜 이들을 통해 차별을 완화(혹은 철폐)한다는 전략이다.
주류화 전략의 사회적 기반은 권력층에 편입되고자 하는 여성·성소수자·소수인종 중간계급이었다. 이 계층들은 1960년대 평등권 운동의 여파 속에서 피차별 집단 내 소수에게 계급 상승(체제 내화)의 기회가 열리며 성장했고, 정체성 정치를 통해 주류화 전략을 정당화했다.
주류화 전략은 민주당의 구미에도 맞았다. 민주당은 차별 완화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여성·성소수자·소수인종을 당·정 고위직에 등용해 차별 반대 염원을 흡수하고 운동을 단속하는 전략을 취했다.
주류화 전략은 흑인 대통령 오바마의 당선으로 정점에 이르렀지만, 동시에 그 모순도 첨예하게 드러났다. 오바마는 대다수 흑인들의 삶을 전혀 개선하지 않았고, 흑인 살해에 항의하는 BLM 운동이 분출했을 때 군경을 동원해 그 운동을 진압했다.
그럼에도 정체성 정치는 민주당 차악론과 맞물리며 지난 몇 년 동안 벌어진 운동들에서도 여전히 강하게 작용해 왔다.
2020년 대선 당시 BLM 운동이 바이든 차악론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데에는, 민주당이 당시 무명 정치인이던 해리스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해 차별 반대 염원을 공략한 영향이 있었다.
그래서 바이든과 해리스가 BLM 운동의 주요 요구를 모두 반대했음에도, 인종차별 반대 운동의 지도적 단체들은 거리 운동에 대한 동원을 중단하고 바이든-해리스에 대한 투표를 호소했다. 하지만 운동 내에서 그에 맞선 대안 전략이 제기되지 않아, 운동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소강 상태로 빠졌다.
2022년 임신중지권 방어 운동 때도 마찬가지였다. 선출되지 않은 대법원 판사들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한 직후부터 전국 수백 개 도시에서 항의가 분출했다.
하지만 이 운동의 지도적 단체들은 정체성 정치를 고리로 민주당과 강하게 유착돼 있었고, 대규모 항의 운동의 열기를 여성 부통령 해리스를 앞세운 민주당에 대한 투표로 이끌고 갔다.
그 덕에, 바이든의 민주당은 임신중지권을 지키는 실질적 조처를 전혀 하지 않았음에도 반우익 정서를 이용해 그해 말 중간선거에서 상원을 수성할 수 있었다.
이런 길들이기 시도에 맞서려면 정체성 정치의 약점을 직시하고 계급투쟁에 기초한 혁명적 좌파의 대안 전략이 제시돼 운동에 명료함을 부여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을 수행했어야 할 급진적·혁명적 좌파들은 탄압과 후퇴의 1970년대를 거치며 혼란에 빠졌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맹위를 떨치기 시작한 정체성 정치를 공유하거나 거기에 타협해, 그 정치가 낳는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혁명적 좌파들은 운동에서 진정한 대안이 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운동의 혼란에 휘둘려 무기력해지고 운동에서 주변화되거나, 정체성 정치의 분열적 성격의 영향을 받아 그들 자신이 분열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일부 급진 좌파들은 민주당 차악론에 휘둘리거나, 제3 선거 정당 만들기에 몰두하며 또 다른 선거 중심주의 정치를 받아들이거나, ‘운동 자체’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태도로 운동에 용해돼 버렸다.
21세기 초 대안 세계화 운동이 분출하거나 2010년대 초 이래의 정치 양극화로 급진적 대안에 대한 관심이 커질 때, 급진적·혁명적 좌파들이 그런 급진화 물결과 효과적으로 관계 맺고 운동 속에서 성장하지 못한 이유다.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은 그런 고리를 끊을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이 운동의 커다란 부분은 인종 학살을 지원하는 바이든의 민주당에 여전히 적대적이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이 겪는 부정의에서 미국 사회에 찌든 부정의를 발견하고, 인종 학살 공범 바이든에게서 그 부정의를 낳은 기성 권력층을 본다.
그러나 그렇다고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이 민주당의 포섭 시도에서 원천적으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예컨대, 민주당 대선 후보를 뽑는 예비경선 당시 바이든을 공격한 ‘지지 후보 없음’ 운동의 사례를 보자. 이 운동은 수십만 명을 참여시키며 주목을 끌었지만, 적절한 때 민주당과 결별하고 독립적인 항의로 나아가지 못해 상징적인 수준에서 끝났다.
이후 그 운동은 분화돼, 일부는 개인적으로 민주당을 떠나 거리의 운동에 합류했다. 그러나 ‘지지 후보 없음’ 운동의 지도적 인사들을 포함한 다른 일부는 민주당 안에서 해리스를 지지하며 해리스에게서 이스라엘에 대한 쓴소리를 좀 더 끌어내는 데에 몰두했다.
그러나 철저한 자본가 정당인 민주당은 자신의 우선순위를 민주주의에 두지 않는다. 민주당 안에서 압력을 형성해 민주당을 바꾸겠다는 전략이 거듭 막다른 길에 봉착한 이유다.
좌파는 과거의 사례에서 교훈을 끌어내, 지금 운동이 선거에 발목 잡히지 않고 성장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명료함을 부여해야 한다.
아래로부터 투쟁이 중요하고, 해리스 지지는 거기에 방해 된다
두 달 후 당선자가 정해진다 해도 미국의 정치적 격동은 계속될 것이다. 그 격동을 낳은 미국 사회의 심대한 위기가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해리스가 당선된다면 이는 바이든 정부의 연장을 뜻할 것이다. 새 민주당 정부는 현 민주당 정부의 노선 그대로, 미국 지배계급을 이롭게 하는 친기업·친제국주의 정책을 계속 집행할 것이다.
해리스와 민주당이 대표하는 정치는 파멸을 안겨 주는 자본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정치다. 그들은 극심한 빈곤과 불평등, 핵 강대국 간 충돌, 기후변화 재앙을 불러오는 주역이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미국에서, 또 아시아와 세계 곳곳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미래를 망가뜨리고, 거기서 극우가 득을 보게 해 준다. 해리스 지지가 극우의 성장을 막을 방책이 전혀 아닌 이유다.
해리스 투표가 극우에 맞선 방벽이 될 수 있다는 차악론의 더 큰 문제는, 진정으로 극우에 맞설 세력인 노동계급 대중을 투표라는 턱없이 좁은 공간으로 옭아매고, 그 대중의 운동을 전진시킬 급진적 중심축이 운동 내에서 성장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는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항의가 민주당에게서 독립적으로 계속 전진해야, 선거 전이나 후나 계속될 위기 속에서 투쟁을 효과적으로 건설하고 진정한 혁명적 대안의 기초를 놓을 수 있다.
8월 19일 민주당 전당대회장 앞에서 시위했고 이제 10월 초 가자 전쟁 1년 전국 동시다발 행동을 준비 중인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은 그런 전진의 토대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전진은 저절로 이뤄지지 않는다. 운동을 투표소 안으로 겁박하는 잘못된 정치에 맞서 계급투쟁에 기초한 대안 전략을 제시하는 혁명적 좌파 정치가 운동 속에서 성장해야 한다.
그런 혁명적 좌파는 병든 사회의 증상뿐 아니라, 중첩된 위기를 낳고 심화시키는 이 체제 전체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혁명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미국의 정치적 격동은 그런 혁명적 좌파 건설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뚜렷이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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