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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위기의 최근 전개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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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갈수록 위험해지고 불안정해지고 있다는 얘기는 이제 진부한 것이 됐다. 금융 시장은 초조하게 “지정학 리스크”를 계산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래 가장 큰 전쟁이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스라엘은 모두가 빤히 보는 앞에서 인종 학살을 자행하고 있다. 화룡점정 격으로 미국에서는 “미국 우선”을 내건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재선됐다.
이런 사건들은 1989~91년 냉전 종식 이후 지배계급 사람들이 품은 기대가 완전히 무너졌음을 뜻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세계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 줄 것으로 내세워졌다. 그런 주장에 따르면, 세계는 갈수록 초국적으로 조직되고 국민국가는 갈수록 낡은 것이 될 터였다.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조차 그런 주장을 일부 받아들였다. 2000년에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는 공저 《제국》에서 “제국주의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 선언은 거의 즉시 반박됐다. 2001년 9·11 공격에 대응하여 조지 W 부시의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벌인 것이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그 전쟁의 결과는 서방 제국주의의 패배였다. 이제 우리는 극우 국수주의의 확산과 지정학적 경쟁의 격화를 목도하고 있다.
제국주의를 엄밀하게 이해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란 그저 한 강대국이 주변 나라들을 지배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발전의 산물이다. 러시아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은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라고 일컬었다. 자본주의는 임금 노동자 착취에 기초해 있고 경쟁적 자본 축적으로 추동되는 시스템이다.
현대 제국주의는 19세기 말에 등장했다. 자본 축적의 결과로 자본주의 시스템 내 개별 단위의 규모와 힘이 커졌다. 그 결과 자본들의 경제적 경쟁과 국가들의 지정학적 경쟁이 융합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국경 너머로 활동 영역을 넓히는 대기업들은 국가의 지원에 의존해야 한다. 한편, 전쟁이 산업에 의존하게 된 결과, 국가가 군사력을 키우려면 무기 체계, 병참, 기반 시설을 제공할 탄탄한 자본주의 경제 기반이 뒷받침돼야 한다.
제국주의는 여러 역사적 국면을 거쳤지만 그 기본 운동 법칙은 변하지 않았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국가 간 경쟁 체제다. 그 안에서 서로 경쟁하는 한 줌의 강대국들은 노동 대중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지배력과 착취를 놓고 쟁투를 벌인다.
이런 규정에 비춰 보면, 한 강대국을 다른 강대국보다 ‘진보적’이라고 보는 진영론은 잘못된 것이다. 제국주의는 언제나 복수형으로 존재했다. 즉, 제국주의는 몇몇 강대국들이 역내 또는 세계 지배를 두고 다투는 체제다.
1914~45년 양차 대전의 시기는 영국 제국주의가 자신의 패권을 지키려고 분투한 시기였다. 영국 제국주의를 경제적으로 앞지르는 두 강대국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하나는 미국이고 다른 하나는 독일이었다. 이와 비슷하게, 오늘날에는 이전 쟁투의 승자인 미국이 중국의 부상에 직면하여 자신의 패권을 지키려 분투하고 있고 이것이 오늘날의 상황을 지배하고 있다.
미국은 1960년대부터 서서히 다른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제가 쇠락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을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블록으로 결집시켜서 패권을 유지하려 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나토와 그 밖의 동맹들은 그 블록을 결집시키는 수단이었다. 또, 미국은 유럽연합의 결성을 돕고 유럽연합을 하위 파트너로 삼았다. 이것이 이른바 “규칙 기반 국제 질서”다.
미국은 냉전에서 소련을 상대로 거둔 승리를 이용해 그 질서를 진정으로 전지구적으로 확장하고 자신의 지배를 확고히 다지려 했다. 그러한 노력은 1993~2001년 민주당의 빌 클린턴 정부 때 특히 두드러졌다.
신자유주의가 옛 스탈린주의 국가들과 개발도상국으로 수출됐고, 세계무역기구(WTO)가 설립됐다. 그 목표는 미국 기업·은행이 세계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이윤을 추구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한편, 나토와 유럽연합이 동부·중부 유럽으로 확장됐다. 러시아가 여기에 반발했지만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러시아가 “역내 강국”에 불과하다고 무시했다.
그러나 미국의 전략은 역풍을 맞았다. 신자유주의를 전 세계에 강요하려는 시도는 잇따라 저항을 촉발했다. 1999년 이후로 일어난 ‘반세계화’ 운동, 2011년 아랍 세계의 봉기,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 직전인 2019년 말의 저항들이 그런 사례다.
금융 규제 완화는 1930년대 이래 가장 거대한 경제 위기를 2007~2009년에 촉발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이 겪은 패배는 미국 군사력의 한계를 보여 줬다. 세계 금융 위기 이후 더뎌진 경제 성장은 193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지정학적 경쟁을 격화시켰다.
여기에 더해 미국의 패권을 가장 위협하는 일로서, 산업을 급속히 발전시킨 중국이 미국의 “대등한 경쟁자”로 부상했다. 세계 금융 위기의 여파 속에서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은 세계 최대의 제조업 수출 경제를 이끌게 됐다. 중국 산업을 기술적으로 업그레이드하려는 시진핑의 계획은 미국 패권의 핵심 경제 기반을 위협했다. 그 기반이란 7대 기술 기업 — 알파벳, 아마존, 애플, 엔비디아,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테슬라 — 으로 대표되는 첨단 기술 부문이다.
더 저렴한 전기차를 생산하는 BYD와 같은 중국 기업들의 급성장은 미국과 유럽의 자동차 산업을 심각하게 위협했다. 한편, 중국은 미국을 서태평양에서 몰아내기 위해 군사력을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아시아가 세계 자본주의에서 가장 역동적인 지역인 만큼 중국이 그 목적을 달성한다면 미국의 패권은 끝장날 것이다.
2017~2021년의 트럼프 1기 정부는 이런 변화에 대한 대응이었다. 트럼프는 세계 금융 위기가 낳은 결과에 대한 분노를 인종차별과 국수주의로 뒤틀어서 표현하고 미국의 “끝없는 전쟁”을 규탄했다. 가장 중요하게는 중국을 상대로 경제 전쟁을 개시했다. 그러면서 다른 주요 수출국들, 특히 독일을 상대로도 경제 전쟁을 벌이겠다고 위협했다.
바이든은 트럼프가 도입한 관세를 유지했다. 그리고 서방의 첨단 기술 제품에 대한 중국의 접근을 차단하려고 애쓰면서 경제 전쟁을 격화시켰다. 또, 거액의 국가 보조금으로 미국 제조업 기업들의 대(對)중국 경쟁력을 강화시키려 했다.
바이든 정부와 트럼프 정부의 가장 큰 차이는 트럼프가 나토와 중동의 우방들을 못마땅해 한다는 데 있다. 트럼프는 우방들이 미국의 군사력에 무임승차하고 경제적으로 미국을 등쳐먹고 있다고 여긴다.
반면, 바이든은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 구축한 동맹 체계를 재건하려 했다. 그런 노선에 따라 바이든 정부는 클린턴 정부와 오바마 정부에서 활약한 “규칙 기반 국제 질서”의 열렬한 옹호자들을 국가 안보 기구에 잔뜩 기용했다.
바이든이 동맹 체계를 재건하려고 애쓴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 동맹 체계를 중부·동부 유럽으로 확장하려는 클린턴과 부시의 노력이 역풍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2013~2014년 우크라이나의 소위 “존엄성 혁명”은 우크라이나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세력을 키워 주고 우크라이나 정치 엘리트들을 대거 서방 진영으로 기울게 만들었다.
미국 등 나토 동맹국들은 우크라이나군을 지원하고 우크라이나의 안보 기관과 정보 기관을 재편하기 시작했다. 2015년 2월 우크라이나 남동부의 친러시아 지역이 우크라이나로 재통합되는 것을 허용하고자 체결된 ‘제2차 민스크 협정’은 서방의 무관심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압력에 의해 휴지 조각이 됐다.
2000년에 정권을 잡은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은 줄곧 권위주의적 신자유주의와 군사력 증강으로 러시아 제국주의를 재건하려 해 왔다. 그리고 그 재원을 에너지 수출로 마련했다. 그러나 푸틴이 이끄는 러시아 제국주의는 취약했다. 구속 수감된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 보리스 카갈리츠키는 그런 러시아를 “주변부 제국”이라고 일컬었다.
러시아는 오직 핵무기 덕분에 미국·중국과 함께 1부 리그에 포함될 수 있었다. 서방에 구애하다 거절당한 푸틴은 일종의 차르 시대 대(大)러시아 국수주의를 대안으로 삼았다. 또, 푸틴은 중동과 아프리카로 러시아의 영향력을 뻗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특히 미국 제국주의와 프랑스 제국주의가 그 지역에서 겪은 낭패를 잘 이용한 덕분이었다.
2022년 2월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도박을 감행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신속하게 장악하기를 기대했지만 그 기대는 금세 빗나갔다. 서투르게 전진해 오는 러시아 기갑 부대에 맞서 우크라이나군은 효과적으로 항전했다. 미국 등 나토 동맹국들은 서둘러 우크라이나에 무기 체계와 전문 인력, 특수 부대를 보내어 우크라이나의 전쟁 노력을 지원했다.
바이든 정부는 그 대리전을 통해 러시아의 국력을 소진시키고 러시아를 고립시키기를 바랐다. 또, 미국, 유럽연합, 영국, 스위스, 그 외 서방 국가들이 재빨리 러시아에 금융 제재를 가하면 러시아 경제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고 기대했다.
미국의 기대대로만 되지는 않았다. 2023년 우크라이나의 ‘대반격’은 실패했다. 러시아 경제도 무너지지 않았다. 푸틴의 경제 관료들의 수완 덕분이기도 하지만 중국의 경제 지원이 핵심적이었다. 서방이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을 끊기 시작하자 중국은 인도 등 다른 주요 개발도상국들과 함께 러시아에 에너지 시장을 제공해 줬다. 또, 중국 기업들은 러시아가 전쟁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첨단 기술 제품을 공급했다.
바이든은 러시아, 잠재적으로는 중국에 맞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을 결집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은 우크라이나 전쟁 전인 2021년에 체결된 오커스 협정으로 이미 진행 중이었다. 그 협정에 따라 미국과 영국은 오스트레일리아에 핵잠수함을 제공해 주기로 했다. 그 핵잠수함은 서태평양에서 강화되고 있는 중국의 해군력을 견제하는 데 쓰일 것이다. 한편,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의 군사적 보호와 미국산 셰일가스에 대한 유럽의 의존을 여실히 드러냈다.
역사적으로 나토는 북아메리카 국가들과 유럽 국가들의 동맹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나토는 갈수록 전지구적으로 활동하는 서방의 동맹을 표방하고 있다. 이러한 나토의 견제 대상을 유럽 주둔 미군 사령관 크리스토퍼 카볼리는 “적대국들의 축”이라고 일컬었다. 러시아·중국·이란·북한을 뜻하는 말이다. 이제 나토 정상 회의에는 나토가 말하는 “파트너들,” 즉 오스트레일리아, 이스라엘, 일본, 뉴질랜드, 한국 등도 참여한다. 이러한 세계적 쟁투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의 충돌로 포장된다.
바이든 정부는 ‘전시 자유주의’라고 할 만한 것의 등장을 나타낸다. 세계 수준에서 자유주의적 제국주의는 세 전선의 전쟁 또는 전쟁 위협에 대응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우크라이나이다. 또 다른 전선은 중동이다.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선제 공격 이래 바이든 정부가 취한 정책은 서방 제국주의의 중동 지배 전략에서 이스라엘이 수행하는 핵심적 구실을 확인시켜 줬다.
서방 제국주의가 이스라엘을 중시하는 이유 하나는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중동에서 충직한 우방 구실을 해 왔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중동산 에너지의 중요성을 도로 키웠다. 또, 앤 알렉산더가 말한 이스라엘의 “디지털 군국주의”(미국의 막대한 지원에 기초한) 덕분에 이스라엘은 서방 자본주의의 소중한 경제·안보 파트너이다.
2024년 가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공격할 때 미국의 태도는 약간 변했다. 이스라엘에 필요한 무기를 지원해 주면서 이스라엘의 민간인 학살에 관해 늘어놓는 위선적 불평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중동에 어떤 식으로든 질서를 “다시 확립”할 수 있다는 환상에 대한 열광이 더 커졌다.
잠재적으로 가장 위험한 세 번째 전선은 아시아다. 바로 이 전선에서, 세계의 양대 경제가 치열하게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이 전선에는 여러 잠재적 발화점이 도사리고 있다. 대만에서는 정권을 잡은 정치 세력이 독립을 추구하고 있고, 중국은 그것이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또, 남중국해와 동중국해에서 벌어지는 영토 분쟁들도 있다. 미국의 대(對)우크라이나 정책과 대(對)이스라엘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는 국제관계학자 존 미어샤이머는 핵 전쟁의 위험이 가장 큰 곳은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라고 경고한다.
상이한 전선들의 상호작용은 그 위험을 더 키우고 있다. 미어샤이머가 지적하듯이 베냐민 네타냐후는 미국을 이란과의 전쟁으로 끌고들어가려 한다. 그런데 이란은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하는 주요 개발도상국들의 모임인 브릭스의 회원국이다. 이란과 북한은 러시아에 미사일을 공급하고 있다. 또, 이란은 러시아에 드론을 공급하고, 북한은 러시아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포탄을 공급한다.
현재 북한의 특수 부대가 러시아 쿠르스크 지방(지난해 8월 우크라이나가 침공한 지역)에 투입돼 있고 영국이 제공한 스톰섀도우 미사일의 표적이 됐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북한군 파병은 그동안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직접 제공하지는 않던 남한 정부가 그 정책을 재고하는 구실이 됐다.
시리아 아사드 정권이 예기치 않게 갑작스럽게 몰락한 것도 상이한 전선들의 상호작용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사례다. 아사드 정권은 두 핵심 우방인 이란과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몰두한 탓에 약화돼 있었다. 그리고 아사드의 몰락은 푸틴에게 큰 타격인데, 푸틴이 시리아를 중동·북아프리카 진출 기지로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대국들의 축”이라는 레토릭을 어떤 응집력 있는 동맹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최근에 발표된 한 연구에 따르면, “중국·러시아·이란·북한은 모두가 함께 제휴하는 국가군으로 흔히 묘사되지만, 그들 사이의 협력은 대부분 양자 협력이다. 현재까지 가장 중대한 협력 사례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맥락 속에서 이뤄진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 협력이 이어질지는 불확실하다.”
모든 제국주의 국가들은 마르크스가 자본가 계급 일반을 가리키며 말했듯이 “서로 싸우는 형제들”이다. 그들의 이해관계는 서로 맞아떨어지기도 하고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중국 지배자들은 미국과 러시아 둘 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신경을 빼앗기고 있는 것에 흐뭇해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이 직접 전쟁에 참여한 것은 도를 넘는 일로 여길 수 있다고 〈파이낸셜 타임스〉는 지적한다.
“국민대학교의 북한 전문가 안드레이 란코프는 이렇게 지적한다. ‘북한군 파병은 긴장을 높이는 행보이고, 중국은 이를 전혀 반기지 않을 것이다.’ 중국이 보기에 북한군 파병은 ⋯ 한반도의 위태로운 세력 균형을 깨뜨릴 위험이 있다. 러시아와 북한의 밀착은 동아시아에서 미국·일본·한국의 군사 동맹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미 중국 정부는 그 동맹의 목적을, 증대하는 중국의 세력을 억제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제국주의 경쟁의 복잡다단한 체스 게임이 전개되는 가운데 바이든하에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심각한 외교적·이데올로기적 후퇴를 겪었다. 첫째, 자유주의적 제국주의 블록은 2022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경제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나 고립시키는 데에 실패했다. 미국의 핵심 중동 우방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에너지 카르텔인 ‘오펙 플러스’(OPEC+)에서 러시아와 계속 협력했다. 미국의 또 다른 중동 우방인 이집트와 아랍에미리트(UAE)는 브릭스에 가입했다. 애초에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이뤄져 있었던 브릭스는 이제 에티오피아와 이란으로도 확장됐다.
브릭스는 미국이 주도하는 동맹에 비해 지정학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나 응집력이 덜한 블록이다. 브릭스 국가들은 서로 이해관계가 충돌하기도 하고, 브라질·인도·남아프리카공화국처럼 서방 제국주의와 긴밀한 관계에 있기도 하다. 미국 달러를 대체할 기축 통화를 마련하자는 제안은 여전히 몽상에 가깝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들은 미국의 국제 질서 장악력이 상당히 약화됐음을 드러낸다.
이는 지난해 11월 페루에서 열린 아펙(APEC) 정상 회의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났다. 라틴아메리카는 전통적으로 미국의 ‘뒷마당’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그러나 중국은 그 지역에 적극 진출해 투자를 제안하고 핵심 천연자원에 대한 접근권을 얻어내려 하고 있다. 시진핑은 그 아펙 정상 회의를 이용해 태평양 연안에 건설된 페루의 35억 달러짜리 거대 항구의 개항을 알렸다. 한편, 퇴임을 코앞에 두고 라틴아메리카를 방문한 바이든은 6500만 달러 규모의 마약 단속 정책에 블랙호크 헬리콥터 9대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하고, 캘리포니아에서 쓰던 중고 열차를 페루 수도 리마의 지하철에 기증했다.
조지타운대학교의 교수인 마이클 시프터는 이렇게 논평했다. “이는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한편에는 과거 잉카 제국의 영광을 떠올리게 하는 중국의 거대 항구가 있다. 반면, 바이든은 코카인 근절을 위해 헬리콥터를 몇 대 더 지원해 주겠다고 했다. 케케묵고 곰팡내가 나는 듯하다.”
미국의 국제 질서 장악력 약화는 가자 전쟁의 정치적 파장으로 더 심화됐다. 서방은 인종 학살에 공모했고, 바이든 정부와 독일 정부는 국제법상의 책임을 추궁받는 이스라엘이 이를 뻔뻔하게 거스르도록 부추겼다. 이는 소위 “규칙 기반 국제 질서”에 대한 신뢰를 크게 실추시켰다.
미국 제국주의는 늘 자신에 이로울 때만 자신의 규칙을 지켰지만, 서방의 위선이 이처럼 적나라하게 드러난 적은 없었다. 독일은 이스라엘에 대한 무조건 지지가 “국시”라고 고집하며, 시온주의에 반대하는 유대인 지식인들을 ‘캔슬’해 국제적 조롱거리가 됐다.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는 서방의 여러 나라뿐 아니라 개발도상국들에서도 곤두박질쳤다. 학생들의 캠퍼스 농성과, 대학 당국과 경찰이 농성 학생들에게 자행한 탄압은 서방 지배계급과 이스라엘의 밀접한 관계와 그에 대한 특히 청년들의 반감을 잘 보여 준다.
이스라엘에 맞서 국제사법재판소(ICJ)와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기된 소송들은 법치를 신봉한다고 떠들어 대는 주요 이스라엘 후원자들에게 커다란 이데올로기적 타격을 줬다. 개발도상국 중에서 자유민주주의가 가장 발전한 축에 속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브라질은 그 소송들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이 또한 미국의 패권에 금이 가고 있다는 징후다.
ICC는 이스라엘 총리 네타냐후와 전 국방장관 요아브 갈란트에게 전쟁 범죄 혐의로 체포 영장을 발부했는데, 이는 이데올로기의 위기를 더 격화시킬 수 있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기디언 래크먼은 “이스라엘이 서방을 분열시킬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스라엘은 미국에서 양당 모두의 전폭적인 지지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럽연합 정부들과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는 ICC의 제소를 인정할 공산이 크다.”
트럼프의 백악관 귀환은 제국주의의 위기를 가속시킬 것이다. 경제적으로 트럼프가 대자본에 제공할 것들은 감세와 규제 완화 등 공화당의 전통적인 정책들이다. 그러나 캐나다, 중국, 멕시코 등지에서 오는 수입품에 더 높은 관세를 매기려는 트럼프의 노력은 세계 자본주의를 교란시키고 다른 주요 경제국들과 미국의 관계에도 차질을 줄 것이다. 트럼프가 세 전선에서 전개되는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의 전쟁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는 훨씬 불투명하다. 미어샤이머는 트럼프가 지난 임기 때 “블롭”(형체 없는 괴물), 즉 미국 안보 기구와의 충돌에서 대체로 패배했다고 지적한다. 어쨌든 트럼프는 적어도 중동 전선과 아시아 전선에서는 바이든보다 호전적이다.
트럼프는 대외 정책을 결정하는 데서 핵심적인 직책인 국무장관과 국가안보보좌관에 각각 마르코 루비오와 마이클 월츠를 임명했다. 그들은 공화당 내의 비교적 전통적인 대(對)중국 강경파에 속한다. 트럼프는 극렬 극우를 그 자리에 앉히지 않은 것이다. 월츠는 전임자와 회동한 뒤 이렇게 말했다. “미국 바깥의 적들은 지금이 기회라면서 미국의 전임 행정부와 후임 행정부를 이간질할 수 있겠다고 기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은 틀렸다. 우리는 한통속이다. 우리는 인수 과정에서 미국이라는 한 팀으로 뭉쳐 있다.”
트럼프는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변화를 일으킬지도 모른다. 트럼프는 “하루 만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해 이목을 끌었다. 좌우지간 상황의 논리가 일종의 교전 중단으로 향하고 있다. 비록 러시아군이 막대한 인명 손실을 내면서 더디게 전진하고 있지만, 전세는 압도적인 병참과 병력을 보유한 러시아 쪽으로 기울고 있다. 바이든은 우크라이나가 서방의 장거리 미사일로 러시아 영토 깊숙한 곳을 타격하는 것을 허용해 전쟁을 위험하게 키웠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가 바이든의 뒤를 따랐다. 바이든의 결정은 트럼프가 전쟁에서 손을 떼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을 수 있다. 이에 대응해 푸틴은 핵탄두를 장착하지 않은 중거리 탄도 미사일을 우크라이나에 쐈다. 유럽 어느 나라의 수도든 타격할 수 있는 미사일로 경고를 보낸 것이다. 그러나 푸틴에게는 트럼프의 제안이 무엇일지 두고 보는 편이 이롭다.
트럼프의 재선으로 유럽연합은 패닉에 빠졌다. 트럼프가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유럽연합도 푸틴의 자비에 내맡길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블롭,” 즉 미국의 안보 기구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20세기 내내 그랬듯이 미국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는 적대적인 강대국이 유럽 대륙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데에 있다. 그럼에도 유럽연합은 심각한 기능 장애를 겪고 있는 자신들의 금융 시스템을 우회하여 군비 지출로 돌릴 재원을 회원국들이 마련할 수 있게 할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미국의 동맹국들 중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가장 호전적인 영국도 빠듯한 국방 예산을 늘리려 할 것이다. 이처럼, 유라시아 대륙의 양극에서 군비 경쟁이 격화될 전망이다.
이것은 무시무시한 전망이다. 그래서 일부 국제 극좌파 경향은 이미 세계 대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아르헨티나의 노동자당(PO)과 이탈리아의 ‘혁명적 국제주의 경향’이 그런 주장을 한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복잡성과 모순들을 볼 때 그런 주장은 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지배적인 제국주의 강대국이 자신의 패권에 갈수록 강력하게 제기되는 도전에 맞서 점점 더 무력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아무리 좋게 봐도, 점점 심해지는 기후 재난 대처에 절실하게 필요한 자원을 터무니없이 낭비하는 것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인류 문명을 파괴할 수도 있다.
시리아 아사드 정권의 붕괴, 남한 대통령 윤석열의 계엄 통치 시도 등 더 빈번해진 급변 사태는 체제의 불안정이 급증하고 있음을 뚜렷하게 보여 준다. 세계적인 반제국주의 운동이 절실하다.
그러한 운동의 건설을 가로막는 장애물 하나는 급진적·혁명적 좌파의 상당한 일부가 두 가지 진영론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한다는 것이다. 더 전통적인 형태의 진영론은 인도나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많은 개발도상국에서 우세한 것으로, 제국주의를 미국의 패권으로 축소하고 중국과 러시아를 ‘진보적인’ 균형추로 보는 견해다. 그러나 이것은 기괴한 일이다. 푸틴은 신자유주의적인 형태의 제국주의를 한결같이 추구해 왔다. 그리고 개발도상국들은 중국과 외교적·경제적으로 협력해야 한다는 압박을 갈수록 크게 받고 있다.
새로운 형태의 또 다른 진영론은 서방 제국주의를 사실상 민주주의의 수호자이자, “적대국들의 축”으로 대표되는 권위주의의 위협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취급한다.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에서 영향력이 큰 이런 견해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미국에 맞선 베트남의 전쟁과 같은 민족 해방 전쟁으로 보게 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우크라이나에 군사 훈련, 무기, 자금을 제공한 나토의 지대한 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그 견해는 처음에는 있었던 듯도 했던 설득력을 모두 잃어버렸다. 이제는 영국의 전 [극우 — 역자] 총리 보리스 존슨조차 “우리는 대리전을 벌이고 있다”고 인정한다.
필자가 속한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과 국제사회주의경향(IST)은 제국주의를 시스템으로 정의하면서 그것에 반대한다. 이 글에서 설명했듯이 오늘날 세계 정치를 지배하는 것은 1914~1945년에 그랬던 것처럼 제국주의 간 쟁투다.
혁명적 국제주의 전통에 따라 우리는 어느 한 제국주의를 지지하기를 거부하고 자국 정부의 패배를 요구한다. 이는 혁명적 국제주의 전통의 선구자인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가 취한 계급적 방식을 복원하는 것이다. 그들 선구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세계가 제국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자본주의 지배계급과 나머지 압도 다수로 나뉘어 있다고 본다. 평화로 가는 길은 기업주들과 그들의 체제를 일소할 국제 사회주의 혁명에 있다.
그런 반제국주의 운동을 어떻게 건설할 수 있을까? 영국에서 SWP는 전쟁저지연합과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에서 활동하고 있다. 우리는 국제사회주의 경향 바깥에서도 우리와 같은 접근법을 취하는 동맹자들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래로부터 대중 운동을 건설하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그런 운동은 제국주의가 강요하는 고통에 저항하는 노동자들 속에서 일어나야 한다. 2021~2023년에 일어난 물가 급등은 기후 변화, 지정학적 요인에 의한 에너지 시장 교란, 전시 경제, 보호 무역의 강화 때문에 되풀이될 공산이 크다. 이는 더 빈번한 임금 인상 투쟁을 촉발할 것이고 그 투쟁들을 통해 노동자들은 체제에 도전할 자신감과 조직을 발전시킬 수 있다.
대중적 정치 운동의 효과도 중요하다. 가자 전쟁과 국제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의 성장은 제국주의의 본질과 제국주의에 맞서는 방법을 배우는 1년 간의 학습 과정이 됐다. 그 운동이 가라앉더라도 그 운동의 효과는 오래 지속될 것이고, 이후 제국주의에 맞서 분출할 또 다른 저항의 불쏘시개가 될 수 있다. 우리의 과제는 그러한 반제국주의 저항을 건설하면서도, 체제에 맞서야 할 필요성을 이해하는 혁명가들의 조직된 네트워크를 확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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