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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내란 청산과 극우 팔레스타인·중동 이재명 정부 이주민·난민 긴 글

북·중·러 협력, 미국 제국주의에 맞선 진보적 대항마?

이 글은 9월 24~25일 노동자연대 서울 서부 지역 모임들과 동부 지역 모임들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한 발표문을 다듬은 것이다(영상 보기).

9월 3일 베이징에서 열린 전승절 열병식은 중국이 자신들의 군사력을 과시하는 장이었다. 중국 정부는 새 대륙간탄도미사일, 극초음속미사일, 무인잠수정, 스텔스 드론 등 신형 무기를 대거 공개했다. 이 중에는 아직 미국조차 실전 배치를 하지 못한 무기도 있었다.

그런 첨단 전력을 보며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과 그 파트너 국가들에게 유리했던 역내 군사력 균형이 돌이킬 수 없이 변했다” 하고 우려했다.

이 열병식 현장에 시진핑, 푸틴, 김정은이 나란히 등장해 크게 주목받았다. 북·중·러 정상이 66년 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그 뒤 10월 11일 북한의 조선로동당 창건 80주년 열병식에도 중국과 러시아는 각자 고위급 대표단을 보냈다. 그래서 많은 주류 언론들이 중국, 러시아, 북한이 이른바 ‘반미 연대’를 형성했다며 신냉전의 도래를 언급했다.

이런 북·중·러 협력이나 브릭스(BRICS)와 상하이협력기구(SCO) 같이 중국과 러시아가 중심이 된 비서방 국제 네트워크들에 기대를 거는 좌파들이 있다. 미국이 지배해 온 기존 국제 질서가 다극화된 새 질서로 전환되면서 미국 제국주의의 횡포가 견제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분명 최근 들어,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 개전 이후 중국, 러시아, 북한의 관계는 더 가까워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정말 미국의 패권에 맞서 항구적인 평화 실현에 이바지할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먼저 최근 북·중·러 3국의 관계 발전 양상과 그 맥락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가 이끄는 비서방 국가들의 네트워크가 과연 국제 반제국주의 운동에 이로운 편인지 아닌지를 따져 보고자 한다.

북·중·러 관계의 변화

9월 전승절 행사에 맞춰 중국을 찾은 푸틴은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 오랜 “우정과 상호 지원의 전통”이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두 강대국의 관계는 푸틴의 말과는 달랐다.

1950년대 중반부터 중국과 소련은 공공연히 갈등을 벌여 온 관계였다. 특히 1969년 국경인 우수리강에서 두 나라 군대가 대규모 유혈 충돌을 했고, 그때 소련은 중국에 대한 핵공격까지 검토했다.

우여곡절 끝에 열전 위기는 일단 가라앉았지만, 소련과 중국 양국은 유사시 상대방을 핵미사일로 공격할 태세를 유지했다. 그리고 중국은 소련을 견제하려고 미국 제국주의와 손잡았다. 1972년 마오쩌둥은 닉슨과 회담했다. 이처럼 냉전기에 중국과 소련은 첨예하게 대치한 지정학적 맞수였다.

중국과 러시아가 밀접해지기 시작한 것은 냉전이 끝나고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다. 제국주의의 세력 균형이 변하면서 두 국가가 서로 손잡을 필요가 커진 것이었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발돋움했고 그에 힘입어 지정학적 위상도 매우 높아졌다. 만약 미국이 그 추세를 방치하다가 세계 경제의 역동적인 중심이 된 아시아에서 중국에 밀려난다면 세계 패권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중국을 최대 위협으로 간주하고 중국 견제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또한 러시아는 동유럽으로 확장하는 나토의 동진에 위협을 느꼈다.

그러면서 중국과 러시아는 서방 제국주의의 공세에 공동으로 대응할 필요를 느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점령에 대한 대응으로 서방이 대러 제재를 가하자, 이를 계기로 중·러 양국의 경제·군사 교류가 전보다 활발해졌다.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직전에, 시진핑과 푸틴은 공동선언에서 나토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공동 대처할 의지를 표명했고, 중·러의 협력에는 “한계가 없다”고도 선언했다.

그렇다면 중국과 러시아의 협력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돼 왔는가?

우선, 중국과 러시아는 브릭스나 상하이협력기구 등의 새로운 비서방 국제기구들을 창설해 협력하고 있다. 가령 상하이협력기구를 통해 중국과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지역을 관리하고 그 지역에서 서방의 영향력 확장 시도를 견제하고 있다. 브릭스는 달러화가 아닌 새로운 기축 통화 촉진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브릭스는 응집력 있는 집단이 아니어서 대안적 화폐를 제공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최근 이집트·이란·인도네시아·UAE 등 이른바 글로벌 사우스의 몇몇 신흥국들이 추가로 가입하며 그 세가 확장됐다.

우크라이나 전쟁 개전 이후 중·러의 경제적 관계는 더 깊어졌다. 서방이 러시아 경제를 무너뜨리겠다고 달려들었을 때, 중국과의 교역이 러시아의 숨통을 틔워 줬다. 러시아는 서방에 의해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서 퇴출된 후 중국의 위안화 국제결제시스템(CIPS)을 무역 결제 시스템으로 활용하고 있다. 러시아의 대외 무역에서 중국의 비중은 2021년 18퍼센트에서 2023년 현재 33퍼센트로 증가했다. 러시아는 석유와 천연가스를 중국에 대량 판매해, 지난해 기준 러시아산 원유가 중국 전체 에너지 수입의 거의 20퍼센트에 이른다. 반대로 중국은 반도체나 공작 기계 등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것들을 러시아에 수출하고 있으며, 러시아 국내 시장에서 서방 소비재의 자리를 중국산이 대체했다.

중국과 러시아의 군사 협력도 발전했다. 상하이협력기구 차원에서 정기적 연합 훈련이 진행돼 왔고, 미국과 중국이 힘을 겨루는 동아시아의 주요 해역에서 합동 해상 훈련도 자주 하고 있다. 지난해 중국과 러시아는 동해에서만 연합 훈련을 5차례나 벌였다. 중국군은 러시아의 군사 기술과 무기를 받아들여 무기 수준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북한도 중국·러시아와 전보다 더 밀착하고 있다. 이는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 변화에 맞춰 북한의 대외 행보가 변했음을 의미한다.

좌파 일각에서는 북한이 오랫동안 “반제 자주”의 한 길을 일관되게 걸어 왔다고 여긴다. 하지만 냉전 종식 이후 북한 외교의 실제 궤적은 그런 신화에 정확히 들어맞지 않는다.

냉전이 끝나고 북한 정권은 안보 위협에 대응해 핵과 미사일 개발에 힘을 쏟는 한편, 미국과의 관계 개선으로 고립에서 벗어나 세계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숨 쉴 틈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래서 북한 정권은 기회가 될 때마다 친구가 될 의사가 있음을 미국 측에 전달했다. 예컨대 1992년 김용순 조선로동당 국제담당 비서가 김일성의 특사 자격으로 뉴욕에 갔고, 주한미군이 중국 견제에 주력하고 북한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그 주둔을 용인할 수 있다는 김일성의 의사를 미국 정부에 전달했다.

그렇지만 그런 시도는 매번 미국에 의해 좌절됐다.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파탄 난 후 김정은 정권은 중국과 러시아에 더 밀착하는 새로운 길을 모색한 듯하다. 특히 2021년 8월 아프가니스탄 철군으로 미국 제국주의의 약화가 더 도드라져 보이자 그 방향성이 더 뚜렷해졌다.

지난해 북한은 러시아와 ‘포괄적 전략 동반자 조약’을 맺어 강력한 군사·경제 협력에 합의했다. 이때 김정은은 북한과 러시아가 동맹이 됐다고 말했다. 이후 북한은 러시아 쿠르스크에 군대를 대규모로 파견해 러시아의 전쟁을 도왔다. 북한 당국의 발표만 봐도, 많은 북한 청년이 쿠르스크 전선의 소모전에서 희생됐다. 김정은 정권은 그 청년들의 피를 대가로 러시아로부터 경제와 군사 지원 등 반대급부를 기대하고 있다.

또한 서방 경제로부터 고립된 북한 경제에 중국과의 교역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중국 경제의 국제적 위상은 최근 몇 년 새 더 강해졌다. 이번에 베이징에서 시진핑을 만난 김정은은 양국의 “호혜적 경제·무역 협력을 심화”하자고 제안했다. 북한 노동자의 중국 파견 확대 등 경제 협력을 강화해 만성적인 대중 무역 적자가 줄어들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런 세력 균형 변화 때문에, 설사 나중에 트럼프와 김정은이 다시 만나게 돼도 북·미 협상의 의미 있는 진전이 이뤄지기는 전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북·중·러의 협력을 응집력이 강한 동맹으로 볼 수는 없다.

한·미·일 삼각 협력과 같은 다자간 협력 메커니즘이 북·중·러 3국 사이에는 없다. 현재 북·중·러 3국의 관계는 중·러, 북·중, 북·러 같이 양자 간 제휴로만 이뤄지고 있다. 또한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맥락 속에서 협력 관계가 증진된 것이어서,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중장기적으로 이 국가들 간의 밀착이 계속 발전될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될 법하다.

트럼프 정부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어 하는 것도 이 계산법에 따른 것이다. 전쟁이 끝나야 중국과 러시아의 틈을 벌릴 책략의 여지가 생긴다고 보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본가 계급을 가리켜 “서로 싸우는 형제들”이라고 했듯이, 중국·러시아·북한, 이 세 자본주의 국가들도 서방의 압박에 맞서서 죽이 맞기도 하지만 서로 이해관계가 달라 충돌하기도 한다.

가령 러시아 지배계급은 연해주나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러시아가 보기에 중앙아시아는 옛 소련의 일부였던 만큼 자국의 전통적인 세력권에 속하고 연해주는 제정 러시아가 청나라한테 빼앗은 지역이다. 그런 지역들에서 인프라 투자, 인력 진출 등으로 중국의 존재감이 커지는 게 내심 불안한 것이다.

중국도 북한군의 쿠르스크 파견 등 북·러의 군사적 밀착을 달가워하지 않는 듯하다. 러시아와 북한의 군사 협력이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겨냥한 한미일 동맹이 강화되는 빌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북·러 밀착으로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도 줄어들 수 있다. 북한의 핵개발 문제도 중국과 북한 사이에 거북하고 껄끄러운 쟁점이다. 이렇게 상충하는 이해관계들이 있어 북·중·러의 제휴는 어느 정도 제한적일 공산이 크다.

그렇지만 미국이 관세 전쟁과 군사력 배치로 대중국 견제 수위를 높이고, 한미일 동맹이 갈수록 체계화되며, 일본과 한국 정부가 공언한 대로 역대급 군비 증강을 지속하는 점 등은 북·중·러 3국이 서로를 까다롭고 불편하게 보면서도 필요한 파트너로 여기게 만드는 요인들이다.

그러나 그렇게 중국, 러시아, 북한 간의 협력이 증대된다 한들, 그것이 국제 노동계급에 이롭고 평화 실현에 기여하는 것인가? 당장 북한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지하고 거기에 군대와 무기를 대는 것은 “반제”와 “자주”에 어긋날 뿐더러 우크라이나 전선과 한반도에서 위험 고조에 일조하는 행위다. 북·중·러의 협력은 그 어떤 진보적 구실을 하기는커녕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행보와 마찬가지로 역내 정세를 불안케 할 뿐이다.

중국과 러시아도 제국주의 국가다

9월 중국 전승절 기간에 맞춰 중국 톈진에서 열린 상하이협력기구 정상회의에서 중국과 러시아 등 참가국들은 “주권 평등에 기초한 다자주의,” “국제 관계의 진정한 민주화”를 주창했다. 북한의 김정은도 전승절 행사에 참석해 그런 목소리에 힘을 보탰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가 과연 그런 슬로건들에 어울리는 행보를 해 왔는가?

세계적으로 지정학적 분열이 심화되고 갈등이 커지면서, 많은 급진좌파들이 진영 논리를 지지하고 있다. 제국주의를 미국의 패권으로 축소하고 중국과 러시아를 제국주의 국가가 아니라 미국을 견제하는 ‘진보적’ 균형추라고 본다.

그러나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 등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제국주의를 그렇게 이해하지 않았다. 이 전통에서 제국주의는 한 강대국이 약소국들을 지배하는 것으로 극도로 협소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제국주의에 대한 올바른 정의는 자본주의가 임금 노동자 착취에 기초해 있고 경쟁적 자본 축적으로 추동되는 시스템이며, 제국주의는 그 발전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즉, 국경을 넘어 경쟁을 벌이게 된 기업들이 국가와 융합하면서 벌어지는 국가들 간 경쟁이, 소수의 강대국들이 세계와 노동계급에 대한 지배력과 착취를 놓고 쟁투를 벌이는 경쟁 시스템으로 발전한 것이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핵심이다.

그런 규정에 비춰 보면, 한 강대국을 다른 강대국보다 ‘진보적’이라고 보는 진영 논리는 잘못된 것이다. 제국주의 국가는 언제나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존재했고, 비록 미국의 힘과 위상에는 못 미치지만(최근 많은 진영론자들은 미국 힘의 약화를 일면적으로 지적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과 러시아도 제국주의 국가다. 중국, 러시아, 북한의 협력 관계도 또 다른 제국주의적 세력망에 불과하다.

어떤 이들은 중국과 러시아의 국제 정치적 행위를 미국 제국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본다. 가령 중국이 남중국해 영토 분쟁에 뛰어든 것은 제국주의적 침략 야망 때문이 아니라 “영토 보전의 일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국제적 경쟁 체제의 한복판에 있고, 그래서 미국과 마찬가지로 자국 자본들의 이익을 증대하기 위해 제국주의 강대국으로서 행동한다.

중국 지배계급에게 남중국해 지배력 확보는 합리적 선택일 수 있다. 중국 경제가 ‘세계의 공장’이 되면서 중국 국가의 전략적 우선순위도 바뀌었기 때문이다. 안전한 해상 교통로 확보가 대외 무역과 에너지 수입이 많은 중국 경제에 사활적인 과제가 된 것이다. 그런데 미국이 서태평양 바다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은 중국에게 불안한 것이고, 그래서 가능한 한 미국을 동쪽으로 밀어내려고 한다.

이처럼 중국은 자신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 속에서 나름의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전략이 남중국해 주변국들을 압박하고 미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하며 지역의 불안정을 높이고 있다.

주권 존중을 주창해 온 중국도 갈수록 자신들의 힘을 이용해 공세적 외교를 벌이곤 한다. 시진핑은 일체의 타협 없이 자국의 “핵심 이익”을 지키겠다고 말해 왔다. 그 핵심 이익에는 대만이나 티베트 외에 아프리카, 중동, 남미 등 세계 곳곳에 진출한 중국 기업들의 이익도 포함된다. 특히 시진핑은 반드시 대만을 중국에 통합하겠다고 선언했고 중국군은 대만을 포위하는 군사 훈련을 빈번하게 벌이고 있는데, 이는 분명 대만인들의 자결권을 무시한 제국주의적 압박이다.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푸틴 정권은 대러시아 국수주의를 부추기고 조지아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며 자국 주변 지역에서 배타적인 세력권을 확보하려고 해 왔다. 더 나아가 미국이 중국과의 경쟁에 초점을 맞추는 틈을 이용해 중동과 아프리카 등지에서 운신의 폭을 넓히며 시리아의 독재자 아사드 등을 지원했다.

따라서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하는 브릭스나 상하이협력기구 같은 국제기구들도 결국 호혜로운 국제 질서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도 자본주의의 토대 위에서 기존의 국제 세력 균형을 자국에 유리하게 재편하려는 제국주의적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다.

브릭스는 미국의 동맹보다는 응집력이 덜한 블록이지만, 그런 기구의 성장은 미국의 국제 질서 장악력이 상당히 약화됐음을 보여 준다. 브릭스 회원국들은 대부분 서방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도 고려해 주지 않는다는 불만을 갖고 모인 신흥국들이다.

그렇지만 브릭스 회원국들도 노동계급과 빈민을 착취하고 지배하는 데서는 서방과 다르지 않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좌파 학자이자 활동가인 패트릭 본드는 브릭스가 친기업적 의제를 추진하며 그 회원국들은 자기 지역 내에서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활성화하고 정당화하며 확대한다”고 비판했다. 브릭스가 말하는 “남남 협력”이란, 미국과 서방의 대기업들이 아니라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의 대기업들이 글로벌 사우스 내에서 더 많은 기회를 얻겠다는 의미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중국이 차관과 대출을 이용해 남반구 나라들에 진출하는 방식도 서방 강대국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가령 중국은 일대일로를 통해 개발도상국들에 막대한 대출을 제공하는데, 그 돈은 주로 현지에서 중국 업체를 이용하고 중국 자재를 조달하는 데에 지출된다.

일대일로에 참여하려고 중국한테서 돈을 빌렸다가 못 갚게 되면, 중국은 상당한 대가를 요구할 수 있다. 실제로 스리랑카가 빚을 갚지 못하자, 2017년 중국은 그 대가로 스리랑카 함반토타 항구를 99년간 운영할 권리를 가졌다.

패트릭 본드는 중국이 아프리카 현지 독재자들과 맺는 제휴 관계도 비판했다. 가령 짐바브웨 독재 정권은 중국의 투자로 직접 이득을 봤다. 중국 기업은 다이아몬드 매장층 개발 지원의 대가로 짐바브웨 군부에 9,800만 달러를 줬다. 아프리카에서 중국은 서방 제국주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지역 정치에 개입하고 현지 권력자들의 부패에 연루되고 있는 것이다.

야수를 쓰러뜨리려면

오늘날 미국과 중국 등 강대국들의 대결은 상이한 생산양식 간의 충돌이 아니라 세계자본주의 시스템 내부에서 벌어지는 쟁투이며 제국주의간 경쟁이다. 따라서 중국, 러시아와 이른바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이 결합된 네트워크들이 부상해도 미국 제국주의의 헤게모니가 야기하는 문제들을 상쇄하거나 완화시켜 주지 못한다. 오히려 지정학적 분열은 강화되고 제국주의적 갈등은 더 격화될 뿐이다.

그리고 세계 각국의 지배자들은 미국이나 중국 또는 그 둘 다와 협력해 자국의 위상을 높이려 한다. 그러나 자국 지배계급의 위상이 높아질수록 노동계급은 더 큰 착취와 억압에 시달릴 뿐이다.

따라서 제국주의를 쓰러뜨리고 항구적 평화를 쟁취하려면 제국주의 시스템을 지지하는 지배계급에 맞서 노동계급의 저항과 국제주의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싸우는 제국주의 국가들 중 한쪽을 지지하기를 거부해야 한다.

어느 강대국이 더 공격적이냐, 또는 누가 더 방어적인가는 전혀 본질적인 쟁점이 아니다. 110년 전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노예 100명을 소유한 노예 소유주가 노예 200명을 소유한 노예 소유주에게 대항해 ‘공정한’ 노예 재분배를 요구하며 전쟁을 벌인다고 상상해 보라. 이런 사례에 ‘방어적’ 전쟁이나 ‘조국 방위’ 전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명백히 역사적으로 오류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는 약삭빠른 노예 소유주가 평범한 사람들을 속이는 순전한 기만일 뿐이다.”

무엇보다 혁명적 국제주의자들은 자국의 전쟁 노력을 반대해야 한다. 친서방 나라인 한국의 혁명적 좌파는 서방 제국주의에 협력하려는 자국 정부의 대외 정책과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대중 운동 건설에 주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서는 서방 제국주의를 권위주의의 위협에 맞서는 민주주의 세력으로 착각하는 또 다른 형태의 진영 논리를 우선 비판해야 한다. 그런 시각을 받아들인 서방 좌파들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나토와 러시아 간의 대리전임을 보지 못해 혼란에 빠졌다.

한국의 경우, 앞으로 중국에 맞서 대만의 자결권을 지키겠다는 미국의 위선적 주장에 좌파가 현혹되지 않고 한국 정부가 미국을 지원해 대만 문제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반대하는 것이 더 중요해질 것이다.

그렇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일부 좌파처럼 반제국주의의 주체를 국제 노동계급이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 등 소위 ‘진보적’ 국가군으로 보는 진영 논리를 따르게 되면, 그것은 논리적으로 좌파가 그 국가 지배계급과 연대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협력과 책략을 반제국주의의 주된 요소로 중시하며 아래로부터의 연대와 저항에는 덜 주목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진영 논리는 소위 ‘진보적’ 국가들에서 노동계급과 빈민이 자국 정부와 지배계급에 저항할 때 이를 외면하게 만들 수 있다. 내부에서 벌어지는 계급투쟁이나 소수민족 반란이 그 국가들의 힘을 갉아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좌파 일부가 러시아의 체첸 등 소수민족 억압을 외면하거나 홍콩 항쟁에 대한 시진핑 정부의 탄압을 변호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지금도 네팔 반정부 시위를 두고 일부 반미자주파 활동가들은 서방이 배후 조종한 “색깔 혁명” 시도라고 의심하고 있다. 이번 시위로 무너진 네팔 정부가 앞서 일대일로 참여 등 중국과의 경제적 관계를 강화했고 총리가 직접 중국 전승절 행사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부패에 네팔 대중의 불만이 쌓이다가 폭발했음을 중시해야 한다. 네팔 항쟁에서 노동자와 농민 운동이 성장하고 새로운 좌파가 등장하기를 바라는 것이 지금으로선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중국이 미국을 견제할 균형추라고 보는 좌파들 대부분은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중국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한국 국가가 미국 중심 외교에서 벗어나 중국과 러시아 등에 적대하지 않는 “평화 공존”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가령 이해영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신세계 질서》(2023년 출판)라는 저서에서 “각국이 전략적 자율성을 발휘할 중간지대 혹은 중립공간의 창출이 [한국이] 우리 지역에서 만들 수 있는 최대치”라고 주장했다. 진보당도 “북한, 미국, 중국과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는 중립 외교를 제안하며, 그것이 이재명 정부의 ‘실용 외교’와 상호 보완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생각은 친민주당 자유주의자들의 인식과 커다란 접점이 있다. 그들도 대부분 국제 질서가 다극화된 질서로 전환되는 것에 대비해 외교 관계를 전보다 더 다변화할 필요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제국주의 국제 질서 안에서 평화적인 지역 협력 구도를 만들어 불안정과 분열을 피하겠다는 구상은 공상적이다. 제국주의의 위기는 국가가 외교적 기예를 발휘해 근본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직 제국주의 질서 그 자체를 분쇄하는 것만이 항구적 평화를 위한 유일한 대안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의 인종학살 전쟁에서 우리가 목도하고 있듯이, 점증하는 위기 속에 제국주의 국가들이 문제를 무력에 호소해 해결하려는 경향이 점차 강화되고 있다. 이 야수들의 폭주를 막으려면 반제국주의 운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진영 논리는 어떤 형태가 됐든 그 막중한 과제를 실현하는 데 걸림돌이 될 뿐이다.

제국주의는 우리 사회의 최상층을 이루는 자들이 쟁투를 벌이는 문제이지만, 그 대안은 철저하게 아래로부터 건설돼야 한다. 그런 대중 투쟁은 경쟁하는 제국주의 세력권을 가로질러 서로를 고무하며 성장할 수 있다. 1980~1981년 폴란드 연대노조 운동 이후 한국의 1987년 항쟁 같은 저항 물결이 일었고, 그다음에는 1989년 동유럽 민주 혁명과 중국 천안문 항쟁이 잇달아 벌어졌듯이 말이다. 2011년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분출한 아랍 혁명도 이집트 같은 친미 국가와 시리아 같은 소위 ‘반미’ 국가 모두를 휩쓸면서 진행돼, 민중 저항이 중동의 제국주의 지배 질서를 크게 뒤흔든 바 있다.

지금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에 맞선 강력한 세력이 돼 있지만, 이들 세력 안에서 분열과 도전이 부상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특히 노동계급과 천대받는 사람들의 저항이 폭발할 수 있는데, 그러면 이는 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낳을 것이다.

따라서 제국주의에 일관되게 반대하고 그 대안을 효과적으로 건설하려면 우리에게는 마르크스주의적 계급 이론에 기초한 혁명적 정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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