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글
트럼프, 흔들리는 국제질서와 한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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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트럼프 때문에 각국 지배자의 두려움과 걱정이 커졌다. 트럼프가 취임하자마자 쏟아낸 말과 조처들은 가히 아연실색케 하는 것이었다. 파나마 운하를 차지하기 위해 군사력 투입도 마다하지 않겠다거나, 버젓한 남의 땅 그린란드를 미국에 팔라고 압박하는 것은 외교 관행상 귀를 의심할 만한 얘기였다. 우크라이나의 광물과 에너지에 대한 갈취 의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도 그런 사례였다.
특히, 지난 2월 말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가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겪은 모욕은 미국의 우방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그날 트럼프와 밴스(각각 미국 대통령과 부통령)는 전 세계로 송출되는 카메라 앞에서 우방국 수반에게 면박을 주고, 모욕하고, 위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유럽의 동맹들과 아시아의 동맹들은 우크라이나처럼 모욕당하고 버림받는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했다.
얼핏 보면 누구도 못 말리는 미치광이 하나가 백악관에 들어앉아 국제 질서를 망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어떤 논평가 말마따나 트럼프의 행동은 “정치인보다는 갱단원” 같고, 동맹국에 대한 태도는 “동반자라기보다는 보호비를 갈취하는 것 같다.” 그러나 트럼프가 막무가내 깡패처럼 구는 것은 비이성적 행동이라기보다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미국의 패권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가령 우크라이나 전쟁 휴전 문제를 보자. 트럼프는 푸틴과의 협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려 하고 그 과정에서 우크라이나가 희생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본다. 나토가 그토록 공들여 지원해 온 곳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이 오랜 교착 상태에 빠진 현실을 생각하면 이것은 나름 합리적인 선택이다. 미 국무장관 마코 루비오는 “우리는 교착 상태에 빠져 질질 끄는 전쟁에 돈을 대고 있다”고 불평했다.
무엇보다, 트럼프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빠져 나와 중국의 부상에 대응하는 것에 집중하기를 바란다. 또, 그 전쟁을 통해 더 밀착하게 된 러시아와 중국을 떼어놓아 중국을 고립시키려 한다. 마치 1970년대 초반 닉슨 정부가 중국과 관계 개선을 해 소련으로부터 중국을 떼어놓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 뒤로 냉전 기간 내내 중국은 미국의 준동맹이었다.
이와 같은 트럼프 대외 정책은 미국의 힘을 보여 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미국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트럼프의 정책에는 흔히 ‘위협’이나 ‘압박’ 같은 단어가 따라붙고(미군 철수 위협, 방위비 분담 인상 압박 등) 닉슨의 “미치광이 전략”을 따라하는 트럼프의 스타일 탓에 정반대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닉슨은 자신이 핵무기를 사용할 만큼 비이성적이라고 상대국이 생각하도록 만드는 수법으로 양보를 얻어내려 했는데, 스스로 이를 “미치광이 전략”이라고 불렀다.)
2.
미국이 세계 곳곳의 문제에 동시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이 실제 현실이다. 미 국방부 정책 차관은 국방 전략, 미군의 구조와 해외 배치, 동맹 관계 등을 관할하는 자리인데, 트럼프가 신임하는 국방부 정책 차관 엘브리지 콜비는 “이제 그런 세계는 갔다”고 단언한다. 미국이 유일 초강대국 지위를 누리던 시기는 끝났다는 것이다. 콜비는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 이것은 중국의 부상 때문이다. 전 세계는 흔들리고 있다. 19세기 이래 처음으로 미국은 세계 최대의 경제력을 가졌다고 자랑할 수 없게 됐다. 그 결과로 우리는 소위 ‘강대국 간 경쟁’으로의 회귀를 목격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은) 중국이 아시아에서 형성하려는 패권을 거부하는 것”에, 즉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것을 막는 것에 힘을 집중해야 한다.
이것을 깨달은 게 트럼프가 처음은 아니었다. 미국의 패권이 큰 압박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중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면서부터였다. 패권에 대한 압박은 2007~08년 미국발 금융 위기로 더 심화됐다. 이에 따라,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구축한 경제적·지정학적 질서는 균열되고 약화된 반면 중국의 부상은 탄력을 받았다. 그러자 2011년 오바마는 중국의 부상을 막고자 미국 전략의 “중심축을 아시아”로 이동했다.
아시아로 중심축을 이동한 뒤 미국은 성과를 거뒀을까? 별로 그렇지 못했다. 2021년 중국 GDP는 미국 GDP의 75퍼센트로까지 따라잡았다. 구매력 평가로 비교하면, 2022년 중국 GDP는 미국보다 19퍼센트나 큰 것으로 나타났다(세계은행). 중국은 AI, 반도체 등 첨단기술 분야에서 미국을 바싹 따라잡았고 군사력 측면의 추격도 위협적이었다. 가령 중국은 2021년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를 우회할 수 있는 극초음속미사일을 개발했는데, 그 시험발사를 보고 미국인들은 소련이 인공위성을 최초 발사했던 ‘스푸트니크 순간’을 떠올리며 경악했다.
미국은 “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을 선언한 뒤에도 중동의 수렁에서 빨리 빠져나오지 못했다. 마침내 2021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했지만, 이듬해 다시 우크라이나 전쟁에 말려들었다. 바이든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멋지게 승리해 러시아를 약화시키고 중국에도 대만 문제에 관한 교훈을 주려 했다. 하지만 뼈아픈 교훈을 얻은 쪽은 미국이었다. 중국은 미국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몰두하는 동안 세계적 영향력을 더 키웠다. 중국이 미국의 중요한 동맹인 사우디아라비아와 그의 숙적 이란 사이의 관계 정상화를 중재해 세계를 깜작 놀라게 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그리고 트럼프도 지금 우크라이나와 중동에서 공약대로 잘 빠져나오고 있지 못하다. 그런 탓에 벌써부터 트럼프 정부 내 모순과 분열이 감지된다. 얼마 전 부통령 밴스가 예멘 공습은 “실수”라며 반대한 사실이 《디 애틀란틱》의 폭로로 드러났다. 그는 미국의 주요 외교 안보 수장들과의 메신저에 이렇게 썼다.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미국의 무역량은 3퍼센트인데 유럽은 40퍼센트가 통과한다. 국민은 미군의 후티 공격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할 위험이 있다. 대통령은 이 공격이 자신이 유럽에 보내는 메시지와 얼마나 불일치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수출에 크게 의존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은 세계의 주요 해상 관문 통제권에 무심할 수 없다. 후티는 홍해를 지나는 서방의 선박을 공격하면서 중국 선박은 통과시켜 주고 있다.
트럼프 2기의 안보 진용은 확고한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주의자들로 채워져, 1기 때처럼 기존 안보기구 “어른들”의 입김으로 오락가락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예멘 공습을 둘러싸고 힐끗 드러난 견해 차이만 봐도 그럴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트럼프의 오락가락은 MAGA주의에 대한 그의 안보 진용의 확신 부족 때문이 아니라 미국의 약화에 따른 모순된 처지에서 비롯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어쨌든 트럼프 정부가 중국의 부상에 대응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보고 중국 견제 수위를 더 높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세계가 두 차례 세계대전을 낳은 20세기 전반부와 많이 닮았다고 지적한다. 당시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지정학적 갈등과 경제적 경쟁이 맞물려 세계대전들이 발생했다고 봤다. 지정학적 경쟁은 국가들이 영토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경쟁하는 것을 뜻하는데, 자본주의하에서는 그것이 자본들의 경쟁이라는 특징과 통합됐다는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냉전 시기에는 동/서 두 진영 사이의 갈등이 주된 양상이었다. 한 쪽은 미국과 그 동맹들, 다른 쪽은 소련과 그 동맹들이었다. 동/서 냉전 시대의 경쟁은 주로 군비 경쟁 형태를 띠어 경제적 경쟁과 지정학적 경쟁은 부분적으로 분리됐다. 그러나 냉전 해체 후, 근래 우리는 다시 경제적 경쟁과 지정학적 경쟁이 맞물리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 있다.
가령 트럼프는 중국에 어마어마한 관세를 매기며 이를 이용해 다른 나라들을 중국과의 경제적 연계에서 떼어내려 하고, 이를 중국에 대한 군사적 압박 및 포위와도 연결시키려 한다. 트럼프가 “원스톱 쇼핑”(일괄 타결)이라는 이름으로 관세 협상과 방위비 문제를 연계시키려 하는 것이나, 최근 중국 선박에 입항료를 부과하는 것도 이를 잘 보여 준다. 트럼프는 입항료 부과 대상에 중국 기업이 운영하거나 소유한 선박뿐 아니라 중국에서 건조된 선박까지 포함했다. 이것은 세계 선박 수주 점유율 1위(65퍼센트)인 중국 조선업을 겨냥하는 동시에 중국 해군의 성장도 겨누고 있다. 미국은 조선업이 바닥 수준이라 한국의 도움을 받고 싶어하는데, 최근 한국을 방문한 트럼프 측근 프레드 플라이츠 미국우선주의정책연구소 부소장은 그 목적이 “중국 해군의 성장을 따라잡기 위해”서라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이처럼, 미국은 중국과의 경쟁을 위해 자국 경제를 뒷받침하는 일에 적극 개입하며 애국주의로 방향을 틀고 이를 군사 전략과도 연계시키려 애쓰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20세기 초반을 떠올리는 것은 기우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한반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4.
냉전 해체 후, 아시아 지배력을 둘러싼 강대국간 관계 변화와 트럼프의 변덕스러운 외교 안보 정책이 맞물려 미·중 간 충돌이 실제로 발생할 수 있다. 한반도는 그러한 충돌의 한 경로가 될 수도 있는 곳이다. 흔히 한반도는 대만, 남중국해, 동중국해 등과 함께 이런 충돌의 방아쇠, 도화선, 인화점으로 불린다.
일각에서는 트럼프가 김정은과 다시 만나 관계 정상화를 시도하겠다고 한 데 기대를 걸고 있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대화로 한반도 긴장이 완화되려나 하고 말이다. 소련 붕괴 후 북한은 줄곧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바랐다. 이를 위해 주한미군 주둔을 용인하는 등 상당한 양보도 할 태세가 돼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계속 퇴짜를 놓으며 북한 핵을 빌미로 한미일 동맹을 강화하고 이 지역의 군사력 우위를 유지하는 정책을 추진해 왔다. 그런데 트럼프는 북한을 중국에서 떼어내기 위해 과감하게 김정은과 손잡을지도 모른다는 관측이 있는 것이다.
트럼프가 1기 정부 때 김정은과 “브로맨스”를 보여 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북미관계는 “화염과 분노”로 시작해 떠들썩한 브로맨스를 거쳐 빈손으로 끝났다. 그런데도 근래에 트럼프는 자기 1기 임기 중에 북한 핵과 미사일 실험은 중단시키지 않았느냐고 성과를 치켜세운다.
그러나 김정은의 생각은 다를 것이다. 트럼프 1기 당시 김정은은 트럼프와 무려 27통의 친서를 주고 받았는데, 2019년 8월 마지막 편지에는 이렇게 썼다. “각하께서 해 주신 것은 무엇이며, 저는 우리가 만난 이후 무엇이 바뀌었는지에 대해 인민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어떠한 조치들이 완화되었다든가 제 국가의 대외 환경이 개선되기라도 했습니까? 군사훈련이 중단되었습니까? 미국이 이를 압박과 대화를 통한 대북 정책의 성공으로 자평한다면 큰 실수일 것입니다. 각하께서 우리의 관계를 오직 당신에게만 득이 되는 디딤돌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면, 나를 주기만 하고 아무런 반대급부도 받지 못하는 바보처럼 보이도록 만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김정은이 반대급부로 원했던 것은 한미연합훈련 중단, 평화협정, 제재 완화였다. 그러나 그중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미국 측은 “최종적이고 완전하며 검증 가능한 비핵화”부터 돼야 한다며 북한 측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고집했다. 왜 북한이 선(先) 비핵화를 거부하는지는 스티븐슨 공과대학교의 핵무기 역사가 알렉스 웰러스틴의 지적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북한더러 ‘미쳤다’고 말한다. 그러나 북한이 할 수 있는 ‘가장 미친 짓’은 핵무기로 자신을 위협하는 적국을 앞에 두고 핵 억제력을 포기하는 것이다.”
당시 북미대화가 어그러진 건 존 볼튼이나 폼페이오 같은 안보기구 “어른들”의 방해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영변 핵시설 폐쇄와 대북 제재 완화를 맞바꾸자는 김정은의 타협안을 거부한 것은 트럼프 자신이었다. 게다가 트럼프는 김정은에게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중지’ 약속을 받아내자마자 남한과의 방위비 분담금 협상 등 딴 곳으로 관심을 돌렸다.
이번에는 어떨까? 트럼프는 김정은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북한 측 응답도 부정적이지는 않다. 대화가 열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김정은의 말마따나, 그가 바보가 아니라면 지난 번처럼 트럼프 좋은 일만 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첫째, 미국의 행동은 미국의 말을 뒷받침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미국이 대화를 원한다면 군사훈련을 중단하라고 요구했지만 미국은 군사훈련을 지속하고 있다. 지난 3월 한미연합훈련을 한 데 이어 4월 15일에도 미국의 3대 전략폭격기인 B-1B를 동원해 한미연합훈련을 했다. B-1B은 적의 지하벙커까지 융단 폭격할 수 있는 전략폭격기로, 이를 훈련에 동원했다는 것은 미군이 김정은 제거 작전을 연습했다는 뜻이다.
둘째, 트럼프 1기 때에 견줘 동아시아 세력관계도 크게 변했다. 한반도 문제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늘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 간의 경쟁 구도다. 그런데 소련 붕괴 후, 북한이 경제적으로 크게 의존해 온 중국은 지난 30년 동안 위상이 크게 올랐고 이는 최근 몇 년 새 더 확연해졌다. 소련 붕괴 후, 경제난에 시달린 북한에게 중국과의 무역은 생명줄 구실을 했는데, 북한 무역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5년 이후 90퍼센트를 넘어섰고 2021년에는 96퍼센트에 육박했다(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우크라이나 전쟁 동안 북한과 러시아의 관계도 긴밀해졌다. 2024년 북한과 러시아는 ‘포괄적 전략 동반자 조약’을 맺어, 강력한 군사 협력 및 경제 에너지 분야 협력도 약속했다.
물론 중국, 러시아, 북한 간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다. 북중 관계도 그렇다. 소련 붕괴 후, 북한은 중국의 후견에 의존하지 않고 핵 프로그램을 발전시켰는데, 이라크의 후세인이나 리비아의 카다피처럼 되지 않으려는 것이지만 중국에는 껄끄러운 문제다. 영변 핵시설과 풍계리 핵실험장이 중국 국경과 가까운 데다 북한 핵이 남한과 일본의 핵무기 개발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은 북한에 압박도 가하고 제재도 가하지만 자칫 북한 체제가 붕괴하지 않을 정도로 수위를 조절한다. 북한 체제 붕괴로 중국이 미국의 동맹과 국경을 마주하게 된다면 중국의 안보에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동아시아 세력관계의 변화 속에서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 측에 전보다 좀 더 밀착하고 있다. 로버트 칼린 스탠포드대학교 국제안보협력센터 연구원은 그런 징후를 처음 보인 것이 2021년 8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수 직후였다고 지적한다. “사실상 아프간 철수는 전 세계에 미국이 강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 이후] 북한이 새로운 정책에 나선 첫 징후를 보았습니다.”(《미국 외교는 왜 실패하는가》)
이런 상황에서 김정은이 미국 측의 확실한 양보 없이 대미 관계 개선에 매달리며 중국과의, 또 러시아와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 것 같지는 않다.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이런 조건 변화, 또 북한의 핵무력 강화라는 변화 덕분에 미국과 북한이 트럼프 1기 때와는 달리 핵 감축 협상을 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전망하기도 한다. 미국이 북한에 선(先) 비핵화를 요구하지 않는다면 대화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지긴 하겠지만, 중단과 감축을 거쳐 최종 비핵화로 가는 과정에는 미국이 이런저런 빌미로 어깃장을 놓을 수 있는 난관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무엇보다, 북한의 핵 보유를 사실상 인정하고 감축 협상을 한다면 미국의 중요한 아시아 동맹들인 일본과 한국 측의 협조를 얻어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설사 대화가 잘 되고 심지어 평화협정이 맺어지더라도 그것이 한반도 평화를 보장할까? 우선, 미국이 약속을 이행할지의 문제가 있다. 미국이 북미 합의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약속을 뒤집은 사례를 이 자리에서 장황하게 나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트럼프가 동맹인 한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이나 방위비분담특별협정(SMA)조차 무시하는 마당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더 근본적인 문제도 있다. 설사 북미 대화가 잘 되더라도 그것이 미국과 중국 사이의 패권 다툼을 끝내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동아시아 갈등은 북한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북한은 미국이 중국을 겨냥해 동맹과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한 빌미일 뿐이다. 트럼프 자신이 누누이 말하듯이 가장 중요한 것은 중국을 상대하는 것이고, 미국에게 북한과 남한은 중국과의 게임을 위해 이리저리 움직여 보는 체스판의 말일 뿐이다.
5.
트럼프의 등장이 한반도에 가져올 변화로 중요하게 꼽히는 또 다른 문제는 한미동맹이다. 동맹에 관한 트럼프와 그 측근들의 기본 인식은 동맹들이 미국의 역량을 축내고 미국에 부담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부통령 밴스는 “미국 납세자들을 등쳐먹는 나라들의 무임승차를 더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동맹들에게 모욕적인 말을 쏟아냈다. 한국에 대해서도 말하기를, 지금껏 미국 덕에 평화와 번영을 누렸으니(“무임승차”) 이제 미국이 제공해 준 군사적 보호에 대해 보상하라고 한다. 그게 싫다면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면서 말이다.
이것은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세계 패권을 구축해 온 방식과는 확실히 다르다. 미국은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 등을 창설하고 그 질서 내로 다른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을 통합시켰고, 세계 도처의 미군 기지 네트워크로 이를 뒷받침했다. 이처럼 미국은 세계 지배력을 위해 동맹들에 크게 의존했는데, 이제 트럼프는 동맹들을 미국 등쳐먹는 존재로 치부하며 변화를 추진하는 것이다.
그간 누가 누구를 등쳐먹었는지, 정작 보상받아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일단 말을 참겠다. 다만, 지금 트럼프가 동맹들을 드잡이 한다고 해서 동맹이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님을 지적하고자 한다. 생각해 보라. 아시아에 위치하지도 않은 미국이 다른 국가들의 도움 없이 어떻게 아시아에서 우위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미국은 태평양에 있는 자국령 섬들보다 일본과 한국에 훨씬 더 많은 미군을 주둔시키고 있다.
물론 한국은 미국에게 가장 중요한 아시아 동맹은 아니다. 미국 국방부 정책 차관 엘브리지 콜비는 《거부 전략 — 강대국 분쟁 시대 미국의 국방》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과 오스트레일리아는 [미국의 동맹과 방어 범위에] 명백히 포함돼야 하지만, 다른 나라들이 포함되어야 하는지는 자명하지 않다.” 특히 “일본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일본 없이는 반[중국]패권연합은 거의 확실히 실패할 것이다.”
한국에 관해서는 그보다는 덜 기꺼운 논조로 이렇게 말했다. “한국을 포함하는 것은 몇 가지 이유에서 어려움을 감내할 만하다.” 그 이유는 첫째, 발전된 경제 덕분에 반[중국]패권연합에 기여할 수 있는데, 친[중국]패권연합으로 돌아서면 손실이다. 둘째, 일본 방어를 위해 중요하다. 셋째, 세계에서 가장 능력 있는 군대를 가지고 있어 대북한 자체 방어를 넘어 장차 미국과 함께 중국의 잠재적 공격을 방어하는 쪽으로 재조정할 수 있다.
요컨대 트럼프와 그 측근들이 원하는 것은 한미동맹의 해체라기보다 재조정이다. 북한 위협은 한국이 자체적으로 대응하고, 안보 비용도 스스로 대고, 주한 미군은 대만해협 위기 대응에 주력하겠다는 것이다. 지난 3월 말 〈워싱턴포스트〉가 입수해 보도한 트럼프 정부의 〈임시국가방위전략지침〉을 봐도 이 점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중국과의 잠재적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미 국방부 장관 헤그세스는 “중국은 유일한 위협 세력이며 중국의 대만 점령을 막고 미국 본토를 방어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밝혔다.
그런데 이런 동맹 재조정이 미국 뜻대로 순탄할까?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방위비 분담금은 대폭 올리면서도, 대북 대응은 스스로 해야 하고, 게다가 대만 해협 위기에 휘말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주한미군의 주된 임무가 한국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면, 왜 미군이 계속 한국에 주둔해야 하고, 그 주둔비를 왜 한국이 내야 하는가? 한국인들이 납득할 것 같지 않다.
물론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국이고 그 강점을 지렛대로 동맹국들에게 자기 뜻을 관철하려 한다. 한덕수 같은 명백한 친미주의자들은 미국의 “은공”을 강조하며 저자세이고, 이재명도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트럼프와의 케미”를 강조한다.
그러나 전처럼 우방국에 ‘은공’을 제공하기보다 부담을 떠넘기려는 트럼프의 계획은 엄청난 모순과 위험을 안고 있다. 트럼프는 우방들을 중국에서 떼어내려 하지만, 수출로 먹고 사는 한국은 2003년 이래 계속 1위 수출국인 중국을 무시하기 어렵다. 방위비 분담금 인상 부담도 만만치 않다. 트럼프는 매년 14조 5천억 원을 내라고 요구하는데, 이는 지난해 10월 미국과 합의한 액수인 1조 5천여억 원의 10배 가까운 액수이다. 이렇게까지 올리지는 못하겠지만 인상이 복지와 교육 같은 다른 예산을 압박할 것은 뻔하다.
게다가 과연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트럼프가 한국의 안보를 지켜줄 것이냐는 의구심 때문에 독자적 핵무장론이 공공연히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대선 후보 홍준표와 나경원이 핵무장론을, 한동훈이 핵 잠재력 확보를 주장한다. 민주당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아서 친명계인 박선원 의원과 전 통일부 장관인 이종석 등은 핵무장까지는 아니어도 핵무장 능력을 확보하자고 한다.
당장의 핵무장 시도보다 더 가능성이 큰 것은 군비 증강이다. 트럼프 1기 시절에 문재인은 5년간(2020~2024) 무려 290조 원을 투입하는 대규모 군비 증강을 추진했다. 덕분에 한국의 군사력 순위는 그의 재임 기간에 세계 12위에서 6위로 뛰어올랐다. 차기 정부도 ‘자주 국방’ 이름으로 군비 대폭 증강에 나설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트럼프가 요구하는 군비 지출 증액과 결국 다를 바가 없는 것 아닌가.
유럽에서는 이미 이런 일이 시작되고 있다. 유럽연합은 지난 3월 8000억 달러(약 1100조 원) 규모의 유럽 재무장 계획을 발표했다. 영국과 프랑스뿐 아니라 독일도 재무장에 적극 나서고 있다. 독일 연방의회는 ‘부채 제한’에 얽매이지 않고 군비 지출을 할 수 있도록 개헌까지 했다.
일본은 한층 적극적이다. 트럼프 재선 직후 열린 미일 정상회담에서 일본은 방위비를 2027년까지 트럼프 1기 때의 두 배로 증액하기로 했다. 올해 일본 방위비는 역대 최대 규모인 8조 6691억엔(약 82조 5800억 원)으로, 증액하지 않은 현재 추세로도 2027년에는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위 군사 대국에 오를 전망이었다. 일본은 아베 총리 시절 아시아에서 중국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겠다며 “일본의 귀환”을 선언한 이후 군사력 증강과 저돌적인 정치·군사적 조처를 마다하지 않는 세력 과시를 해 왔다. 20세기 전반부에 일본이 아시아에서 한 짓을 생각하면 일본의 재무장은 무시무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트럼프의 동맹 조정 시도는 이처럼 세계를 더 위험하게 만들고 있다. 미국의 동맹들이 각자도생 책략을 펴고 나름의 득을 챙기려 하면서 세계는 지정학적으로 더 위험해지고 있는 것이다.
6.
한국은 2000년대 첫 20여 년을 ‘경제는 중국에 안보는 미국에’ 의존해 왔다. 이제 트럼프 2기를 맞아 한국의 모순은 더 심해질 것이다.
전통적 우파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이재명이 대통령이 된다 해도 한미동맹 유지에 힘을 쏟으며 타협을 거듭할 것이다. 이재명은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한미동맹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없다”며 “한미일 3국 관계를 강화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 했다. 또, “중국과의 관계에서 얻는 것보다 미국과의 관계 악화로 잃는 것이 더 많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누가 차기 정부를 차지하든 모순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으며 소위 ‘국익’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이재명은 실용주의를 강조하며 “균형을 관리”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지정학적 위기가 가하는 압력 때문에 국제적 갈등은 물론이고 국내 정치의 첨예한 분열과 위기를 피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런 상황은 노동자 등 서민들의 고통을 가중시킬 것이 뻔하다.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되든 한미관계에서 발생하는 고통의 대가를 노동자 등 서민에게 떠넘기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경쟁력만이 살 길이라며 기업 감세와 규제 완화 등을 추진하면서 노동자들에게는 노동시간 연장이나 임금 삭감 등의 희생을 강요할 수 있다. 또, 군비 대폭 인상은 경제 상황 악화로 오히려 증액돼야 할 복지비를 옥죄는 것으로 이어지기 쉬울 것이다. 물론 복지를 희생시켜 군비를 증강해도 대만 해협의 군사 갈등에 휘말릴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 좌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트럼프 2기, 더 균열되고 위험해질 세계에서 반제국주의 운동의 중요성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이런 운동을 건설하는 데서 유념해야 할 점을 몇 가지 짚어 보겠다.
첫째, 트럼프의 아시아태평양 전략과 한국 정부의 협조에 반대할 때 트럼프의 북미대화는 하나의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다. 물론 미국이 북한을 적대시하는 것보다는 긴장 완화가 약간은 낫다. 그러나 이것이 미국이 중국과의 대결에 집중하기 위한 것인 한은 한반도 평화를 가져올 수도, 아시아 평화의 지렛대가 될 수도 없다. 한반도 문제가 미국과 중국 등 강대국 경쟁 구도 안에 놓여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지난번 트럼프-김정은 대화를 놓고 남한 좌파 다수가 범한 오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그때 좌파들 다수는 북미 대화가 한반도 평화를 보장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정작 트럼프의 인도태평양전략 추진과 그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협조를 보지 못했다. 심지어 한국에 대한 일본의 경제 보복을 북미 관계 변화 과정에서 “패싱” 당한 일본 측의 대응으로 오인하면서, 문재인 정부가 부추긴 반일 애국주의 열풍에 협조했다. 트럼프는 일본을 “패싱”하기는커녕 이미 발표한 인도태평양전략에서 일본을 가장 중요한 동맹이라고 규정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트럼프가 2018년 중국과의 무역전쟁을 시작하고 2019년 인도태평양전략을 발표하는 등 이 지역의 긴장이 심화되는 바로 그때, 정작 좌파들 다수는 북미 대화와 심지어 트럼프에 기대를 걸면서 반제국주의 운동의 핵심 문제들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둘째, 트럼프에 반대하되 ‘국익’이라는 포퓰리즘적 개념에 근거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이참에 우리 국익에 맞게 한미동맹을 재정립하자’는 주장이 인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되면 자칫 차기 정부가 내세울 수 있는 ‘자주 국방’ 논리에 취약해질 수 있다. 실제로 문재인 정부는 전시작전통수권 환수 추진을 명분으로 군비를 대폭 증강했다. 전시작전통수권 환수 문제는 지금도 한미동맹 재정립의 핵심 쟁점으로 꼽힌다. 국익 논리로는 또한 ‘트럼프의 압박 앞에 전 국민이 힘을 모으자’며 복지비 삭감 등 희생을 강요하는 것에 제대로 맞서기도 어렵다.
국익을 위한다며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들은 경쟁을 격화시키며 세계를 더 위험하게 만들 뿐이다. 군비 증강은 정부가 복지나 기후 위기 대응 등에 써야 할 돈을 파괴적인 곳에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각국 정부는 기후 위기 대안으로 탈탄소 경제를 말하면서도 실천하지는 않는데, 생산 비용이 늘어나 경쟁국에 밀릴까 두려워서다. 그렇게 군사력 증강에 돈을 쏟아붓는다 해도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 어느 국가가 무기 하나를 개발하면 다른 국가는 그것을 우회할 무기 체계를 개발하기 때문인데, 이를 ‘안보 딜레마’라고 부른다. 이처럼 ‘자주’라는 이름을 붙인다 해도 군비 증강은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며 세계를 더 위험하게 만든다.
셋째, 미국만을 제국주의로 보면서 다른 국가나 국가 연합이 미국을 견제하는 진보적 균형추가 될 것으로 기대해선 안 된다. 최근 북한이 핵무력을 증강하고 러시아, 중국과 밀착하자 좌파 일각에서 이런 기대가 은근히 높아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가 각각 신장 위구르나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벌인 일뿐 아니라 국내에서 노동자와 빈민, 소수 인종을 혹독하게 대하는 것을 보라. 중국이 일대일로를 추진하면서 주변국에 취하는 조처를 보면 워싱턴 컨센서스를 강요하며 저개발국 민중에 고통을 안긴 미국 뺨치는 경우도 많다. 북한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지하고 (남한과 꼭 마찬가지로) 그 전쟁에 포탄을 대면서 대가를 얻으려 하고 있다.
한편, 중국과 대만 간의 문제를 강대국과 그 인접 약소국 간의 문제로 보는 것도 부적절하다. 대만 문제는 점점 격화되는 미국과 중국 두 강대국 간 경쟁이라는 맥락 속에서 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결권을 보호한다는 미국의 위선에 속아 대만을 놓고 중국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미국의 전략에 일관되게 반대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서방의 많은 좌파가 우크라이나 전쟁이 미국과 러시아 간 대리전임을 보지 못해 혼란에 빠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제국주의는 강대국 하나가 나머지 국가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강대국들 간의 경쟁 체제다. 오늘날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그런 경쟁 체제의 표현이다. 오늘날과 유사하게 제국주의간 쟁투가 지배했던 20세기 전반부에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어느 한 제국주의를 지지하기를 거부하고, 자국 정부의 전쟁 노력 지지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진정한 평화로 가는 길은 제국주의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반제국주의 운동을 건설해야 한다. 트럼프의 세계 전략이 가져올 혼란과 위기, 그에 따른 대중의 고통은 저항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얼마 전 군비가 아니라 임금을 올리라며 하루 총파업을 벌인 그리스 노동자들은 좋은 사례이다. 미국에서 트럼프 반대 시위가 성장하고 있는 것도 희망을 보여 준다. 군비 증강이나 전쟁 지원, 이를 명분으로 한 복지 삭감 등에 대한 저항을 건설하려고 애써야 한다. 그와 동시에, 체제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 진정한 대안임을 이해하는 사람들 사이의 연계를 구축하려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