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리얼리스트’ 총학생회의 편의주의 유감
정병호
고려대 당국이 학생들의 본관 항의 농성에 대해 강경 탄압에 나서고 언론이 학생들을 ‘패륜아’ 취급하기 시작하자, 일부 좌파들은 무원칙한 편의주의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총학생회 선거에서 당선한 전국학생행진(구 연대회의) 경향의 ‘리얼리스트’ 선본은 마녀사냥 공세에 시달리는 학생들을 방어하기는커녕 “4월 5일 본관 점거 및 처장단 감금에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는 제목의 성명서를 통해 신속하게 농성 학생들을 비난했다.
이들은 이번 사건이 ‘감금·폭력’이었다는 학교측의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여 학생들을 비난했다. 학교 당국에 대한 비판은 오히려 부차적이었다. 심지어 같은 경향의 경영대 학생회장은 “폭력적인 행위를 저지하기 위한 집회를 준비”하겠다며 한때 우파 학생회와 비슷한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이들의 편의주의적 태도 때문에 좌파의 분열이 만천하에 드러나자, 학교 당국은 더욱 자신감이 높아졌다. 학교 당국은 이번 기회에 작년 이건희 저지 시위를 주도한 좌파들을 무력화하고자 무려 19명에게 징계소환장을 발부했다.
소환 대상자의 절반은 농성을 주도한 ‘다함께’ 회원들이었고, 3분의 2가 ‘다함께’와 ‘노동해방학생연대’와 ‘유쾌한 정치’ 등 진정한 좌파들이었다.
물론 소환대상자 중에는 ‘리얼리스트’ 총학생회장단도 포함됐다. ‘리얼리스트’ 선본은 ‘다함께’ 회원들이 후보였던 ‘Act NOW!’ 선본과의 차이를 부각하려고 농성을 비난했지만 그 비난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이렇듯 학교 당국은 편의주의 경향의 약점을 이용하여 먼저 급진 좌파를 고립시키고, 이를 통해 고려대 학생 운동 전체를 공격하려 하고 있다. 이는 작년 이건희 저지 시위 때부터 학교 당국이 써먹던 수법이다.
따라서 징계 대상자들은 일치 단결해서 학생들의 농성을 방어하는 입장을 굳건히 고수해야 한다. ‘리얼리스트’ 총학생회도 자신들의 부적절한 입장을 철회하고, 징계 반대 투쟁에 헌신적으로 나서야 한다.
□ 진정한 좌파의 주도력이 중요하다
전국학생행진 경향의 편의주의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작년 이건희 저지 시위 직후에도 이들과 반미청년회 경향은 사과와 유감 표명 등 편의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전국학생행진 경향은 이번 고려대 총학생회 선거에서 체 게바라 이미지를 차용했듯이 종종 진정한 좌파 이미지를 내세운다. 그러나 실제로 첨예한 논쟁이 수반되는 투쟁이 벌어질 때는 온건화 압력에 타협하곤 한다. 왜 그럴까?
첫째, 정치적 개인주의가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소련 몰락 이후 노동계급 중심성을 버리고 다양한 피억압 집단의 영향력을 동일하게 강조하는 ‘정체성 정치’를 수용했다.
그러다 최근에는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개인의 권리(소위 ‘인권의 정치’)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이번 사건에 대해서도 전국학생행진 경향의 경영대 학생회장은 학생들의 행동이 “천부인권이자 기본권인 신체의 자유”를 침해한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둘째, 이들의 활동이 학생회 운영에 주되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학생회는 모든 학생들을 포괄하고 있으므로, 보수적인 학생들의 여론도 반영해야 한다는 압력에 노출되기 쉽다.
문제는 첨예한 대립이 존재할 때 누구 편에 설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들은 대립의 가운데에서 시시각각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단호한 주장을 “강변”이라고 치부하며, 자신들의 편의주의를 “우애로운 소통”이라고 포장한다.
이런 태도가 선거에서 중간적 학생들의 표를 얻는 데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만, 이번 경우와 같이 실제 운동을 건설하는 데서는 커다란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럴 때 진정한 좌파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다함께’ 고려대 회원들은 마녀사냥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첫 총학생회 선거 도전에서 17퍼센트나 득표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는 작년 이건희 저지 시위 이후 단호하게 운동을 건설하려 노력한 결과였다.
이러한 노력을 계속하는 과정에서 일관된 투사들의 네트워크를 건설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