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연 전국민중연대 정책위원장은 《이론과 실천》 신년호에 ‘상설연대체’ 건설 과정에 대한 평가를 냈다. 그는 "’상설연대체’ 건설을 앞장서 추진한 주체들의 형식주의적 사업방식에 대해 통렬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연대운동 발전에 대한 기층 의지의 반영에서 출발하지 못했고 특정 정파가 지레 결론까지 다 낸 채 동의를 구했다는 것이다.
"’상설연대체 건설론’은 하나의 결론과 이론체계를 갖고 제안되었다. 필요성과 성격, 건설방도와 경로 등 상설연대체 건설에서 제기되는 주요 논점들에 대해 완결된 제안을 내놓음으로써 이미 정해진 결론에 동의를 요구하는 것처럼 되었을 뿐만 아니라 특정정파의 조직노선으로 받아들여졌다."(67∼68쪽)
표현은 완곡하게 돼 있지만 날카롭고 통렬한 반성적 평가가 아닐 수 없다. 상설연대체 건설 논의를 이끈 한 지도자로서 쉽지 않았을 반성을 출발점으로 삼은 정대연 정책위원장의 평가를 높이 사고 싶다. 아쉽게도 와이셔츠의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정대연 정책위원장의 반성은 이미 진척된 논의의 무게에 눌려서인지 한국진보연대(준) 건설에 반영되지 못했다.
나는 이런 관점을 그 논리적 최종 귀결까지 밀어붙이고 이를 연대체 건설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으로 여전히 남는 문제를 몇 가지 지적하려 한다.
잘못 끼워진 첫 단추
‘다함께’는 상설연대체 건설 논의가 민중연대 조직발전 논의를 넘어 다른 단체들과의 논의로 나아갈 즈음부터 한국진보연대 준비위가 출범하기 직전까지(대략 9월 중하순부터 12월 중순까지) 이 논의 과정에 참가했다. 그러나 최근에 큰 벽에 부딪혔다.
2005년 하순 ‘단일연대연합체’라는 이름으로 상설연대체 건설이 제안됐을 때, ‘다함께’는 그것이 NL 경향의 이론 체계에 바탕해 목표와 성격("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의 정치적 조직적 기초")이 설정돼 있어 진정한 연대 노력으로 볼 수 없다는 점에서 그것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사안별 연대체의 의미를 깎아내리거나, 민주노동당의 역할을 의회 전담 기구로 자리매김하려 하거나, 지나치게 타이트한 운영을 모색하는 것 등도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여름쯤 ‘NL 이론 체계에 따라 단일연대연합체의 성격, 건설 방도와 경로 등이 제안됐다’는 반성적 평가가 정대연 정책위원장으로부터 나왔다. 그런 식의 제안이 진보진영의 단일연대체 건설이라는 진정한 취지에 오히려 방해가 됐다는 것이었다. 물론 단일연대체 추진 진영 안에는 ‘다함께’ 측의 비판이 오해에 바탕한 것일 뿐이라는 주장이나, 반한나라당 전선이 필요하다는 입장, 사안별 연대체를 해소해야 한다는 입장 등이 여전히 있었다.
그럼에도 ‘다함께’는 반전과 반신자유주의 운동에서 연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다수의 쟁점을 둘러싼 새로운 유형의 공동전선을 건설하는 것이 의미 있다는 대의를 우선하며 (NL 내부 논의가 답습되지 않기를 바라며) 상설연대체 논의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우리는 상설연대체가 작은 효과라도 내려면 몇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며 다음 같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사안별 연대체의 중요성을 인정해야 한다. 둘째, 계급 연합을 추진해선 안 된다. 셋째, 민주노동당의 역할을 의회주의적으로 축소해선 안 된다. 넷째, 정치적·조직적으로 느슨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우리는 상설연대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단체들이 만나 그것이 어떤 합의에 기초해 만들어져야 하는지 등을 논의해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상설연대체 건설을 위한 간담회(11월 17일)에는 이런 논의가 주요 안건으로 오르지도 않았다.
많은 단체 관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은 비효율적이거나 쓸모없거나 심지어 일을 지연시키는 방해 요인으로 여겨지는 듯했다. 상설연대체 건설 주도 단체들은 연대를 위한 자기 변신의 필요성을 깊게 돌아볼 여지를 두지 않고 조직 구조와 준비위 출범 등의 일정에만 관심을 집중했다.
결국 특정 정치경향의 이론 체계를 바탕으로 제안된 상설연대체는 그 틀을 새로 짜는 과정 없이 그럭저럭 ‘고'(Go)를 한 셈이다. 이미 초동주체들의 합의가 확고한 만큼 논의를 새로 시작할 수도 없다는 딜레마가 역력했다. 진정한 연대를 위해서는 주도적 단체들이 ‘대주주’로서 이런 노력에 솔선했어야 했는데 말이다.
상설연대체 주도 세력들은 이 점을 새겨봐야 한다. 이런 문제에 대한 각고의 고민 없이, 상설연대체가 난관을 겪는 이유로 "과잉된 정파간 주도권 다툼"(68쪽) 같은 문제를 병렬한다면 다른 정파들에게 책임을 똑같이 물리려는 것으로 비치기 십상일 것이다.
연대의 원리
정대연 정책위원장은 "무엇보다도 차이를 존중하고 공통점을 찾아 단결하는 지혜를 실질적으로 발휘할 필요가 있다"(73쪽)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문제는 이것의 올바른 적용인데, 바로 이 점에서 한국진보연대(준)은 더 넓은 연대를 보장하는 방식을 마련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다함께’는 앞서 제기한 네 가지 조건 가운데 특히 네 번째 것, 즉 정치적·조직적 느슨함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첫째부터 셋째까지는 실천 속에서 입증돼야 하는 문제였다. 느슨함이야말로 상설연대체가 진정으로 연대체답게 운영되고 자민통 강령을 공유하지 않는 반자본주의적 좌파가 그 속에서 열의 있게 활동할 의의가 있는가를 판단하는 직접적 잣대였다.
정치적 느슨함이란 각 단체의 정치적 독립성이 보장되고 독자적 행동권이 보장되며 서로 비판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을 뜻한다. 그런 속에서 다수의 쟁점들(예컨대 전쟁 반대, 신자유주의 반대, 억압과 차별 반대, 시민적·정치적 자유 옹호)을 둘러싸고 함께 투쟁하는 것이다.
만일 각 단체가 자기 고유의 이데올로기와 목표를 연대체에 강요하려 한다면 각 단체간 갈등과 충돌이 불가피해진다. 그러므로 각 단체는 타협을 감수해야 한다. 예컨대 전쟁반대·신자유주의 반대에 동의할 단체들은 많아도 이것을 "민족 자주"와 "반미"라는 특정 경향의 강령과 이데올로기에 맞추려 한다면 동의하지 못할 단체들이 생길 것이다. 그래서 ‘다함께’는 노동계급 중심성이나 국제주의를 내세우지 않았다.
‘다함께’가 생각하기에, "차이를 존중하고 공통점을 찾아 단결"하는 최선의 방식은 상설연대체에서는 합의될 수 있는 공통점에 바탕해 활동을 조직하고 차이점은 각자 자신의 조직을 통해 선전·선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대연 정책위원장의 생각은 이와 정반대다. "차이 존중"을 위해서는 각 조직의 변별적 의견을 상설연대체가 죽 나열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상설연대체 건설 논의에서는 이것이 "민족 자주"를 강령으로 넣을 것인지 말 것인지 문제로 표면화됐다. ‘다함께’는 "민족 자주"가 특정 정치경향의 고유 표지이므로 그것을 "강대국의 패권주의 반대"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은 반전·반신자유주의 운동에 포함돼 있는 단체들(상설연대체에 앞으로 참가할 수도 있는)이 두루 동의할 만한 것을 내놓은 것이지 ‘다함께’ 입맛에 맞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몇몇 단체들은 결코 "민족 자주"를 뺄 수 없다고 했고, 이 때 정대연 정책위원장이 제시한 대안은 "민족 자주"와 "강대국의 패권주의 반대"를 병렬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반미"를 둘러싼 논란에서도 똑같이 나타났다. ‘다함께’가 "반미반전투쟁"이라는 표현을 "반전투쟁"으로 수정하자고 했을 때 몇몇 단체들이 결코 "반미"를 뺄 수는 없다고 했고, 정대연 정책위원장은 "반미반제"와 "반전평화"를 병렬하자고 했다.
하지만 ‘다함께’가 제안한 "강대국의 패권주의 반대"에 비해 "민족 자주"와 "반미"가 특수 표지이므로 ‘병렬’은 진정한 병렬이 아니다. 반전·반신자유주의 세력이 두루 합의할 만한 구호와 "민족 자주"를 ‘병렬’하자고 하는 것은 다른 단체들에게 NL의 강령을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은 연대를 위한 자세가 아니다.
정대연 정책위원장은 "상설연대체를 건설함에 있어서 도저히 합의할 수 없는 문제가 과연 있을까? 만약 그런 것이 있어 단결을 어렵게 한다면 과감히 버리자"고 말한다. 이런 정대연 정책위원장의 고언을 상설연대체 건설 주도 단체의 지도자들이 곰곰이 생각해 줬으면 한다.
"민족 자주"를 상설연대체의 강령으로 택할 것이냐는 그 자체로 중요한 논쟁점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정치적 이견이 있지만 전쟁반대·신자유주의 반대 등에는 함께할 수 있는 단체들과의 연대를 위해 정치적 느슨함을 용인할 것인가 아니면 특정 정치 경향의 특수 표지를 고집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 말이다.
상설연대체를 건설하는 것 자체가 진정으로 중요하다면 이를 위해 불가피한 타협을 할 태세가 돼 있어야 한다. 상설연대체 주도 단체들이 연대를 위해 기존 정치문화와 활동 방식을 바꿀 필요를 깊이 돌아봤으면 좋겠다.
차이와 연대
정대연 정책위원장은 "연대는 생각이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차이가 있는 사람들이 이루어내는 데 그 묘미가 있지 않은가!" 하고 말했다. 정말이지 지당한 말이다. 차이가 없다면 단일한 조직만 있으면 되지 왜 연대체가 필요하겠는가?
그러나, 만약 차이를 치부로 생각한다면 연대체는 차이를 수용할 수가 없고 차이를 억누르려 하게 될 것이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짧은 상설연대체 논의 과정 속에서 이런 위험성을 봤다. 몇몇 쟁점에 대해 이견이 존재함을 문서에 명시해 달라고 요구했을 때, 주요 단체의 책임자 일부는 ‘이견 표기가 단결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부정적 견해를 폈다.
‘이견을 표기하지 않으면 아무 생각 없이 넘어갈 얘기도 토가 달리면 기층에서 논란거리가 된다’는 주장도 있었다. 현재 한국진보연대(준)은 상층 연대의 한계를 넘겠다고 하고 있는데, 상설연대체를 둘러싼 논란을 기층에 제대로 알리고 그에 적극 참가하도록 독려하지 않고 이를 이룰 수는 없을 것이다. 기층을 통제의 대상으로만 여겨서는, 그저 조직화의 대상(주체가 아니라)으로만 여겨서는 "기층의 정치적 자각과 결의[의] 뒷받침"(68쪽)을 받기가 어려울 것이다.
상설연대체 건설 제안서에는 ‘다함께’의 우려를 적극 반영해 "참가 단체들의 정치적 독자성을 존중"한다는 언급이 있다. 이것이 단지 문구가 아니라 연대체 운영의 정신이 되려면 참여 단체들이 서로의 실질적 차이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큰 차이가 있으면 연대 운동이 안 되고 차이가 해소돼야 연대 운동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예컨대 반전·반신자유주의 운동이 성장함에 따라 연대 운동이 발전하고 있지만, 운동 세력 내 이견이 줄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반전·반신자유주의 운동의 세계적 성장 속에서 고전적 전략 논쟁들도 다시 떠오르고 있다.
정대연 정책위원장처럼 "반전, 반신자유주의 투쟁이 공동으로 전개되고 있는 현실"이 "최근 진보진영에서 투쟁노선의 차이[가] 거의 없[는]" 것을 "증명"한다고 생각한다면, 연대 운동 속에서 차이를 인정할 필요가 무엇을 뜻하는지가 흐려질 수 있다. 혹은 반미 자주 의식이 확산됐다는 식의 아전인수식 프리즘을 통해 연대 운동을 구상할 우려가 있다.
결론을 말하면, ‘다함께’는 한국진보연대(준)이 느슨함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적극적 참가가 의미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럼에도 혹시 소극적 참가는 불가피할지도 모르므로 준비위를 걸쳐 본조직 출범에 이르는 과정을 관심있게 지켜볼 것이다. 설사 한국진보연대에 완전 불참하더라도 ‘다함께’는 지금까지처럼 사안별로 연대운동에 헌신적으로 참여할 것이다.
여러 달 계속된 상설연대체 논의 과정은 무엇이 연대를 구축하는 가장 좋은 방안인가를 돌아보게 하는 기회였다. 이를 통한 교훈이 연대체 활동에 조금씩이라도 적용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