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일붕 다함께 운영위원 (다함께를 대변해)
경제 위기의 대가를 노동계급이 치르게 만들려고 각국 지배계급은 강력한 정부를 원하고 있다. 이명박의 지지율이 50퍼센트를 넘나드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불안정하고 제한적이지만 경기 ‘회복’ ― 일자리 없는 회복, 사장들을 위한 회복 ― 도 일조했다.
강화돼 온 정치적 억압과 결코 낮지 않은 이명박 지지율이 결합돼, 지방선거에서 ‘실용주의적’ 선택을 하도록 대중을 몰아가고 있다. 당선 가능성을 이유로 민주당(이하 참여당에도 해당하는 논의로 이해할 것)이라는 차악次惡을 택하겠다는 정서가 확산된 것이다.
그러나 부르주아(친자본주의) 정당들만의 정당 체제는 보수/진보 정당 체제보다 더 효과적으로 정치적 표현을 부르주아 공식 정치 쪽으로 돌려 제한하고, 계급적 불만을 무디게 만든다. 또한 미인대회나 게임을 연상케 하는 부르주아 정당 간의 경합과 광고 캠페인을 연상케 하는 용의주도하고 정교하게 고안한 이미지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진정한 이슈는 한 곁으로 밀려난다. 두 부르주아 정당만이 적법한 옵션인 양하는 제도적 협약을 창출함으로써 말이다. 제3당에 투표하는 것은 사표로 취급된다. 제3당은 제도적 경계를 넘은 기이하거나 극단적인 훼방꾼쯤으로 묘사된다.(이것이 TV 코미디 프로그램이나 9시 뉴스 등에 비쳐지는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처럼 부르주아 정당 체제의 명백한 목적은 좌파 정당 또는 노동계급 정당의 영향력 확대를 차단하거나 되도록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부자들은 흔히 한나라당(옛 이름을 거슬러 올라가면 신한국당, 민자당, 민정당, 공화당이었다)을 선호했지만, 때로 민주당이 필요하거나 적합하다고 여길 때는 민주당 지지도 결코 마다하지 않았다. 두 정당의 차이는 보수(우파)와 진보(좌파)의 차이가 아니라 ‘좀 더 보수적’과 ‘좀 더 자유주의적’의 차이다. 물론 민주당은 종종 포퓰리즘적 언사言辭를 구사해 대중의 지지를 구하려 하므로 이런 때, 특정 쟁점들을 둘러싸고 좌파(진보) 또는 노동자 정당은 불가피하게 민주당과 제휴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두루 알다시피 10년간의 민주당 정부 경험을 통해 그 전보다 훨씬 더 많은 대중이 민주당의 (친제국주의적·친시장경제적) 본질을 똑똑히 알게 됐다. 민주당이 ‘차선책’인 것처럼 비쳐지는 것은 오직 군사독재 정당의 후신인 한나라당과 비교되는 것을 통해서뿐이다.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이제 민주당은 차악次惡으로 널리 간주되고 있다. 한나라당이 노동자 임금을 20퍼센트 삭감하자고 주장하면 민주당은 터무니없다며 요란스럽게 반대하는 듯하다가 10퍼센트 삭감을 제안하는 식이라는 걸 대중은 안다. 그리고 ‘차악도 악은 악’이라는 급진 좌파의 주장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래서 민주당의 지지율은 여전히 한나라당의 지지율을 밑돈다.
그럼에도 차악론은 제3의 대안인 진보 정치의 최대 장애물이 되고 있다. 바로 차악론에 이끌려 민주노동당은 ‘야권 후보 단일화’라는 미명 하에 정치적 독립성을 사실상 포기하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1997년 대선과 2002년 대선에서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의 득표로 행여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될까 봐 노심초사한 사람들의 이의 제기로 진보진영은 내홍을 겪어야 했다. (그래서, 수도권의 진보신당 후보들이 지지율이 계속 올라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될 정도가 돼도 그냥 ‘Go’ 할 것인지는 다소 불확실하다.)
그러나 미국 최초의 노동자 정당 소속 대통령 후보였던 유진 뎁스(1855-1926)는 “원하지 않지만 갖고 있는 것에 투표하기보다는 원하지만 갖고 있지 않은 것에 차라리 투표하겠다”고 말했다. 그보다 훨씬 전인 1848년 마르크스도 노동계급은 가능하다면 자신의 정치적 후보를 내세워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선 가능성이 전혀 없어도 노동자들은 자신의 후보를 내세워 자신의 독립성을 보존하려 해야 하고, 자신의 세력을 계산하려 해야 하고, 자신의 혁명적 태도와 정당적 입장을 대중 앞에 내놓으려 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노동자들은 민주당the Democrats의 주장, 예컨대 노동자들이 자체 후보를 내세우는 바람에 민주 진영the Democratic Party이 분열되고 수구 인자들이 이길 수 있게 된다는 주장에 혹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얘기들의 궁극적 의도는 모두 프롤레타리아를 속이는 것이다. 그런 독자적 행동으로써 프롤레타리아 진영이 이루려는 진보는 대의 기구에 몇몇 수구 인자들이 있게 됨에 따른 불이익보다 비할 데 없이 더 중요한 것이다.[1]
엥겔스도 미국 사회주의자들이 미국 노동자들의 독자적 노동자 정당 결성 노력을 지지하라고 조언했다. 그래서 1886년 뉴욕 중앙노조가 뉴욕광역시 독립노동당을 결성해 뉴욕시장 선거에 후보로 헨리 조지를 내세웠을 때 엥겔스는 그를 지지했다. 《진보와 빈곤》(살림출판사, 2007년)의 지은이로 오늘날에도 유명한 헨리 조지는 사실 노동운동 출신도 아닌 중간계급 포퓰리스트였는데도 말이다. 곧,
이제 새로 운동에 입문한 나라에서 실로 결정적인 첫 걸음은 노동자들이 독자적인 노동자 정당을 결성하는 것이다. 독자적 노동계급 정당으로서 [다른 정당들과] 구별된다면야 결성 방식은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런데 우리 예상보다 훨씬 일찍 이 행보가 내디뎌졌다. 이 점이 중요한 것이다. 이 당의 첫 강령이 뒤죽박죽이고 매우 불충분하다는 점, 또 이 당이 헨리 조지를 후보로 내세웠다는 점은 덧없기는 해도 불가피한 결점이었다. 대중에게는 진화할 시간과 기회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실수에 실수를 거듭하며 추동되고 쓰디쓴 경험으로 배우는 자기 자신의 운동이 있어야만 ― 형태가 어떻든 그들 자신의 운동이라면 ― 그런 기회도 얻게 될 것이다.[2]
엥겔스는 1893년 미국인 동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국에서는 “두 지배 정당에 던지지 않은 투표는 죄다 사표처럼 보이게 만드는 정체政體”가 노동자 정당의 결성에 방해가 된다고 지적했다.[3] 그럼에도 1880년대에 그랬듯이 일시적일지라도 제3의, 노동계급의 대안이 가능할 때가 있다고 엥겔스는 강조했다. 그런 경우에 사회주의자들은 양대 부르주아 정당에 맞서 일종의 항의성 계급 투표를 호소할 수 있다. 부르주아 주류 정당 체제에 균열을 내고 독자적인 노동계급 정치를 위한 공간을 열기 위해서 말이다.
거의 30년 뒤인 1920년,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은 노동자 정당이 선거 운동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것들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4] 곧,
· 평상시보다 훨씬 더 폭넓은 범위의 사람들에게 사회주의적 선전을 할 수 있다.
· 공직에 당선된 사회주의자는 자신의 직위를 활용해 자본주의를 폭로하는 선전·선동을 할 수 있다.
· 주류 정당들의 부패와 특정 계급 친화성을 폭로한다.
· 선동 등을 통해 제도권 바깥 투쟁의 조직을 지원한다.
·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한계를 들춰낸다.
부르주아 주류 정당 체제는 미국의 사례로 보듯이 노동조합에 기반을 둔 대규모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형성을 억제하는 구실을 한다. 1930년대처럼 독자적 노동자 정당의 성장을 지지하는 노동계급 대중의 정서가 강한 상황에서 최대 좌파이자 노동계급 정당인 공산당은 운동을 이와 다른 방향으로, 민주당 지지로 돌리는 구실을 했다. 오늘날 노동계급의 경제적 조직과 정치적 조직이 모두 약한 상황에서 차악론次惡論은 더욱 기승을 부려 미국 노동계급에게는 노동계급적 대안은커녕 제3의 대안조차 거의 또는 전혀 없다.
한국도 1990년대 동안 부르주아 주류 정당 체제 하에서 독자적인 노동자 정당의 건설은 큰 제약을 받았다. 1997년 1월 대파업과 11월 ‘IMF 공황’의 효과로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이 당선 직후부터 자신의 ‘친서민’ 공약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버리자 1990년대 노동운동이 “노동자 정치세력화”라고 부른 노력은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그 성과가 바로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이었다.
민주노동당은 2004년 노무현 탄핵 반대 운동의 거대한 물결을 올라타고 그 해 4월 15일 17대 총선에서 10석을 얻어 제3당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무현의 배신으로 공식 정치가 오른쪽인 이명박과 한나라당 쪽으로 쏠린 상황에서 치른 18대 총선(2008년 4월 9일)에서는 분당의 후유증까지 겹쳐 이전 의석의 절반만을 가까스로 챙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직후 촛불운동의 거대한 물결이 일자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은 분당 사태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촛불운동의 효과가 수면 아래로 들어간 요즘에도 민주노동당은 내가 다른 글에서 캘리니코스를 따라 2008년의 일변一變으로 규정한 새로운 정세가 제공할 기회에 더해, 머지않아 이명박의 공공지출 전면 공격에 대한 노동계급의 대중 저항이 제공할 기회를 내다보며 독자적인 노동자 정당 건설 노력을 지속할 수 있다. 이 과정에 필수적인 전략과 전술은 진보연합이다. 민주당이 다시 떠오른 계기인 노무현·김대중 전직 대통령 사망 정국 전까지만 해도 민주노동당은 진보연합에 헌신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뒤로 민주당이 공식 정국의 주도권을 다시 쥐게 되면서 민주노동당의 고질적인 포퓰리즘(민중주의: 부패하고 특권적인 한줌의 엘리트에 맞서 나머지 “각계각층 국민의 대중이 계급을 초월해 단결하자는 사상)이 전면 부상했다. 물론 민중주의는 노동자주의(희석된 신디칼리즘)와 함께 한국 등 신흥공업국 노동계급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사고이자 정서다. 따라서, 노동조합에 기반을 둔 다른 개혁주의 정당인 진보신당도 캘리니코스가 말한 “민중주의와 노동자주의의 개혁주의적 변증법”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좀 길지만 인용할 가치가 있으므로 그대로 옮기겠다.[5]
1980년대의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대해 쓴 책[South Africa: Between Reform and Revolution을 가리킴 ― 최일붕]에서 나는 그곳 노동자 운동이 노동자주의와 민중주의 사이에서 동요해 왔음을 지적했다. 나는 이것이 남아프리카공화국 특유의 현상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더 일반적인 사례의 하나일 뿐이다.
이집트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20세기 전반부에 영국 지배 하에서 산업화하기 시작한 그 나라의 노동자 운동이 당시 어떻게 갈피를 못 잡고 갈팡질팡했는지를 알 수 있다. 때때로 이집트 노동조합들은 제2차세계대전 때까지 부르주아 민족주의 정치인들[주로 Wafd당 ― 최일붕]의 유력한 영향을 받았다. 때때로 노동자들은 이에 반발해 본질적으로 경제적 쟁점에만 집중하고 더 광범한 정치적 문제들은 무시하는 신디칼리즘에 따라 행동했다. 마침내 그들은 나세르와 진보적 반제국주의를 표방하던 그의 군사정권의 유력한 영향을 받게 됐다.
또 다른 예는 브라질이다. 브라질 노동자당(PT)은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 발전한 전투적인 노동조합 운동으로부터 출현했다. 그런 PT당이었건만 그들의 정치도 민중주의·민족주의 사상이 강력히 득세했다.
노동자주의와 민중주의 사이의 이러한 동요 또는 결합은 신흥공업국 사회의 결합된 불균등 발전이 반영된 것이다. 산업 노동계급이 급속히 형성됐지만, 다른 많은 요인들이 있다. 민족 억압의 역사, 노동계급에 대한 억압, 해결되지 않은 민주적 ― 또한 때때로 민족적 ― 문제들, 억압당하는 비프롤레타리아나 반프롤레타리아 등등의 요인들 말이다. 이 모든 요인들 때문에 신흥 노동계급은 민족주의·민중주의 정치를 잘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 흔한 결과는, 노동자들이 민중주의 정치의 일정 요소를 받아들였다가 민중주의자들이 아무것도 가져다주는 게 없자 그에 반발해 다시 신디칼리즘 방향으로 튀는 것이다. 그때 노동자들의 반응은 정치와의 관련을 배격하는 것인데, 문제는 사회 성격상 노동자들이 정치적 문제를 단순히 무시해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민중주의 정치 쪽으로 견인당하게 된다.
이러한 동요를 끝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진정으로 혁명적인 정당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진정한 혁명적 정당이 존재한다면 그 당은 경제와 정치를 결합시켜, 노동자들의 경제투쟁 및 경제적 불만과 국가권력 문제를 서로 연관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나라의 좌파에서는 전형적으로 스탈린주의 정치가 득세해, 노동자주의와 민중주의 사이에서 갈팡질팡 갈피를 못 잡고 동요하는 양상을 끝장내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강화하기만 할 뿐이라는 것이 문제다.
흔히 노동자주의와 민중주의의 이러한 변증법은 개혁주의 정당의 발전을 촉진할 수 있다. 개혁주의도 노동자주의와 민중주의 사이의 오락가락에 내포돼 있는 경제와 정치의 분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남아프리카공화국 공산당과 브라질 노동자당은 그 나라들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로의 전환 과정에서 본질적으로 사회민주주의 정당 구실을 했다. [중략]
이러한 상황 전개를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의 위대한 전투성이 대중적인 혁명적 의식으로 곧장 나아가는 단순하고 단선적인 운동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1970년대 남부 유럽의 스페인·포르투갈·그리스와 198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브라질의 경험은 개혁주의 조직들이 매우 빨리 발전해서 노동계급에 대한 영향력을 장악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주의 조직은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한다. 체제[세계 자본주의 체제―최일붕]의 위기와 개별 경제들의 위기로 개혁주의 정당들의 운신의 폭은 아주 제한돼 있다. 예컨대 오늘날 남아프리카공화국 공산당(SACP)은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만델라 정부가 민영화와 공공지출 삭감과 노동시장 유연화 따위를 추진하는 것을 지원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이러한 일들이 노동계급이 1980년대에 투쟁으로 획득한 성과에 주요한 공격을 가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한국과 같은 나라들에서 전개된 노동자 운동을 일종의 학습 과정으로서, 즉 새로운 노동계급이 자신의 힘을 보여 주고 자신의 권력을 느끼고 상이한 해결책들을 시험해 보는 학습 과정으로 봐야 한다.
이제 자기 주장의 소수 경청자들을 노동계급 속에서 획득할 수 있는 혁명적 조직이 있는 한은 그러한 학습 과정의 결과는 그 조직이 기대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조직이 영향력을 획득하려면 노동자 의식이 작용하는 모순된 방식과 개혁주의의 본질에 대해 명료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 개혁주의의 본질을 이해할 때만 개혁주의의 허를 찌를 수 있다.
여러 해에 걸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험에서 일반화해 온 나는 신흥공업국이 ‘자본주의 사슬의 약한 고리’ ― 레닌의 말을 빌어 표현하면 ― 라는 견해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특히 이들 나라 노동계급 의식의 발전 문제 같은 복잡한 문제를 혁명적 조직이 이해하기만 한다면 그 앞날은 실로 낙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캘리니코스의 실천적 결론을 되새겨봐야 한다. 만일 근본적 사회변혁 운동가인 우리가 노동계급 대중의 (모순된) 의식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그 의식과 제대로 소통하지도 못한다면 우리는 도태되고 개혁주의자들이 계속 승승장구할 것이다. 우리는 한편에 민주당과 무원칙하게 연합하는 실용주의자들이 있고 반대편에 광범한 노동자 대중의 (모순된) 의식을 이해하지 못한 채 추상적인 ‘좌파적’ 슬로건만 남발하는 종파주의자들 사이에서 당혹스럽고 난감한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러면, 노동계급의 의식은 어떤가? 분명 민주당 정권이나 민주당 지자체의 공격을 직접 당해 본 노동자들을 포함한 적잖은 노동자들은 다시는 민주당에 투표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훨씬 더 많은 노동자들은 민주당이 미워도 한나라당의 집권 연장을 저지하려면 민주당에게 투표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두 노동자 집단 모두와 소통하려면 우리는 분명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 기권이나 어정쩡한 준準기권 입장은 절대 안 된다.
· 제1선호 투표: 먼저,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에 투표함으로써 민주당/참여당이 아닌 진보적 대안을 지지해야 함을 분명히 하자.(두 진보 정당이 경합하는 선거구의 경우에는 둘 중 좀 더 좌파적인 후보에게 투표해야 한다.) 이유는 앞에서 상세히 설명했다.
· 제2선호 투표: 다음으로, 진보 정당이나 다른 진보적 세력이 출마하지 않아 마땅한 대안이 없는 선거구에서는 진보적 노동자들이 민주당/참여당 후보를 개혁적으로 여길 경우 그에게 비판적 투표를 해야 한다.
어떤 선거에 대해서든 우리의 입장은 전술적인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의 후보를 출마시키든 다른 단체에 투표하든 우리의 최대 주안점은 노동자들의 자신감을 높이는 것과 그들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비록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차이가 정책 면에서는 너무 근소해서 거의 없다시피 할지라도 노동자들의 자신감이라는 점에서는 누가 당선되느냐가 실제로 차이를 낳는다. 만일 민주당이 이긴다면 감격이나 열광 따위는 없겠지만 안도와 안심이 있을 것이다. 한나라당이 재집권하기 어렵게 됐다는 안도감 말이다. 한나라당이 이긴다면 광범한 노동자들의 사기 저하가 있을 것이다. ‘사회 보수화(우경화)’론이 고개를 들고 심지어 판을 칠 것이다. 진보적 대안 부재 지역에서 노동자들이 개혁적으로 여기는 민주당/참여당 후보에 대한 비판적 투표를 호소함으로써 사회주의자들은 민주노동당원을 포함한 수많은 노동자·학생 활동가들과 소통하고 연대할 수 있다.
선거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민주당 소속 자치단체장들은 공공지출 감축 압력 하에서 오래지 않아 한나라당 소속 단체장과 본질적으로 그다지 다르지 않게 행동할 것이다. 국가 부채 위기로 각국 정부는 재정 긴축 정책을 실시하고 있고, 한국 정부도 ‘재정 건전성’을 줄곧 강조하고 있다. 정부의 이 같은 ‘재정 건전성’ 강조에 대해 외국계 금융사는 국가 채무의 절대 규모보다는 증가 속도에 우려를 나타냈다. 메릴린치증권사(송기석 전무)는 4월 11일 “남유럽 재정 위기 이후 외국인들은 한국의 국가 채무가 너무 빠르게 증가하는 것 아니냐고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확장적 재정정책의 결과 국가 채무가 전년보다 18.4퍼센트 증가한 뒤에도 11.3퍼센트(2010년) 9.7퍼센트(2011년) 6.3퍼센트(2012년) 등 증가 방침을 세운 정부 정책이 우려스럽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한국의 GDP대비 국가 부채는 2008년 30.1퍼센트에서 올해 35.6퍼센트로 뛸 전망이다. IMF는 한국의 재정적자가 내년에 -4.7퍼센트로 급증할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이는 OECD국가들 중 가장 빠른 속도다.
승리한다 해도 부르주아 개혁주의 정당인 민주당의 운신의 폭은 좁을 수밖에 없다. 결국 민주대연합 노선은 민주노동당의 집권 프로젝트임에도 재검토에 부쳐져야 한다는 압력을 받을 것이다. 제3의 (진보적)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노동자들이 개혁적으로 여기는 민주당 후보에게 비판적 투표를 하는 것은 이 미래 논쟁에 참여하는 활동가들과 우리가 소통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이 활동가들의 일부는 우리가 경제 위기의 효과에 맞서 함께 싸우게 될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제1선호 투표인 진보 투표의 대상이 없는 지역에서는 노동자들이 개혁적으로 여기는 민주당 후보에게 표를 던질 만도 하지 않은가. 물론 요령 있는 비판과 함께 말이다.
1 Karl Marx, "Address to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Communist League," in Padover, Saul K.(ed) 1971, On Revolution, McGraw-Hill, New York , p 117. [↑본문]
2 Engels to Friedrich Adolph Sorge, Marx and Engels 1995, Collected Works, Vol. 47, Engels: 1883-1886, Progress Publishers, New York, p 532. [↑본문]
3 Engels to Frederick Adolph Sorge, December 2, 1893, in Marx and Engels 1979, Marx and Engels on the United States, Progress Publishers, Moscow, p 333. [↑본문]
4 Riddell, John 1991, The Communist International in Lenin’s Time, Vol. 1: Workers of the World and Oppressed Peoples, Unite! Proceedings and Documents of the Second Congress, 1920, Pathfinder Press, New York, pp 470—479. [↑본문]
이 글은 필자가 4월 중순에 열린 다함께 특별대의원협의회에서 발표한 것을 극히 일부분만 수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