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지
장기 자랑 강요, 서울대 병원만의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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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 병원 간호사다. 최근 서울대병원 송년회에서 간호사들이 장기 자랑을 강요받고, 심지어 심사위원들이 “옷을 벗었으면 1등 줬을” 것이라며 간호사를 성적 대상화한 것이 이슈가 됐다. 그런데 이는 서울대병원만의 문제가 아니다.
간호사들은 대부분 적어도 한 번씩은 장기 자랑을 경험한다.
나 역시 같은 병동의 간호사들과 장기 자랑을 한 적이 있다. 남자들이 없었고 선정적인 옷을 입고 춤을 춘 것은 아니었지만, 자정에 근무가 끝나고도 새벽까지 남아서 연습하는 것이 정말 화났다.
다른 대학 병원에서 근무했던 한 선배도 연말 송년 모임에서 장기 자랑을 해야 했다. 신규 간호사 7명이 매일 모여 춤과 노래를 연습했는데, 3교대 하는 간호사들의 처지 때문에 무려 한 달이나 연습해야 했다. 신입이라 일이 익숙치 않아 고달픈 데다가 휴식 시간까지 뺏겨가며 장기 자랑 연습을 하자니 그 피곤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장기 자랑 등수에 따라 상금을 준다고 하니 선배들은 신규 간호사들에게 어떻게 해서든 1등을 하라고 닥달했다. 결국 자극적인 소재를 선택하고 짧은 치마를 입고 가수들의 춤을 흉내낼 수밖에 없었다.
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신입 간호사들은 여러 번 되뇌였다. “춤추고 노래하려고 간호사가 된 게 아닌데”, “전문직의 품위를 강조하더니 이게 뭐야.”
그 한 달의 경험은 간호사이자 여성으로서의 자존감에 생채기를 남겼다.
이 선배는 신규 간호사 생활이 끝난 뒤에 신경외과 전공의 1년차 입국 축하식에 참가했는데, 이때 역시 신규 간호사들은 장기 자랑을 강요 받았다. 또다시 노출이 심한 의상에 자극적인 춤이 펼쳐졌다.
선배는 여러 생각에 괴로웠다. 의사들의 축제에 여성 간호사들이 장기 자랑을 한다는 게 분노스러웠고,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모습에 불쾌감을 느꼈다. 장기 자랑하려고 휴식시간까지 쪼개가며 연습했을 신규 간호사들을 생각하니 안쓰럽기도 했다.
상처 입은 자존감
선배는 노동조합에 찾아가 이 사건을 고발했다. 별로 문제의식이 없는 사람도 있었고, “시킨대로 하는 그 간호사들이 미쳤지!” 하며 간호사 개인을 문제 삼는 사람도 있었다.
다행히 노동조합의 몇몇 간부가 올바로 주장해 간호부장에게 항의하고 대자보를 부착한 후에야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다.
장기 자랑뿐 아니라 회식 자리에서도 비슷한 일이 비일비재하다. 노래방에 가면 교수들과 춤을 추라는 은근한 압력과 재미있는 퍼포먼스를 보여 달라는 요구 등 때문에 나는 회식 자리에 참석하는 것을 꺼리게 된다.
황당하게도 그런 압력을 넣는 사람은 같은 간호사이자 여성인 수간호사다. 그 수간호사는 항상 우리에게 복장, 화장, 태도, 말투를 지적하며 ‘전문적인 간호사’의 자세 운운한다. 교수들 비위를 맞추며 함께 춤 추는 것이 그가 말하는 ‘간호사의 전문성’인가?
이런 상황을 겪으면서 간호사들은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진다. 직장 동료들이 회포를 풀고 단합하는 방법이 이런 것밖에 없나?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노동조합이 적극 나섰으면 한다. 각 병원 노동조합만이 아니라 보건의료노조와 공공노조 의료연대도 함께 연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