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들의 도덕과 우리의 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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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고(故) 크리스 하먼이 1996년에 영국의 반자본주의 월간지 《소셜리스트 리뷰》에 기고한 글을 일부 축약한 것이다. 통합진보당의 부정 선거 사건과 그것을 이용한 우파의 마녀사냥이 이어지는 지금, 도덕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제시한다.
크리스 하먼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중앙위원이자 반자본주의 주간지 〈소셜리스트 워커〉와 계간지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저널》의 편집자로 활동했다. 이집트에서 혁명이 일어나기 두 해 전 강연을 위해 이집트에 머무르다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평생을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로 살아온 그는 《민중의 세계사》를 비롯해 많은 저작을 남겼는데 최근 그의 유작인 《좀비 자본주의》(책갈피)가 번역 출간됐다.
주류 정치인들과 언론이 일으키는 도덕론 물결은 많은 사람들을 구역질나게 한다.
가난한 사람들한테서 돈을 빼앗아 부자들에게 주고, 극빈자들을 길거리에 방치하고, 항상 거짓말을 일삼고, 의원들의 부패를 감추어 온 정부가 도덕을 운운하곤 한다. 이런 정부가 뻔뻔스럽게도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도둑질하지 말고, 폭력을 휘두르거나 거짓말 하지도 말고, 다른 사람과 사회를 돌보는 ‘시민의식’을 가르치라고 주문한다.
도덕에 관한 얘기는 ‘권리’와 ‘의무’ 양 측면에 대해 국가 권력을 권위주의적으로 사용하는 일을 늘리는 데 이용돼 왔다.
‘반사회적’ 주민들에 대한 경찰 개입, 공공장소에서 음주 금지, 학교에서 제적 증가와 소년범에 대한 “실형 선고 강화” 따위가 그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언론과 주류 정치가들이 권위주의적 억압을 강화하려고 도덕이라는 말을 사용할뿐더러, 나아가 그들 자체가 매우 부도덕하다고 주장한다.
언론과 주류 정치인 자신들의 행동이 사회를 괴롭히는 악을 만들어 낸다. 일부 독자들은 다음과 같이 항의할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그런 얘기를 할 수 있지?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는 항상 추상적 도덕에 관해 말하는 것을 비난하지 않았는가?”
분명 그들은 추상적 도덕에 관해 말하는 것을 비난했고, 그것은 옳았다. 도덕 규범들은 역사와 사회 바깥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사회에서 ‘나쁜’ 행동이 다른 사회에서는 해도 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또한 도덕 규범들은 오늘날 우리 사회 안에서도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달라진다. 그 때문에 살인은 각료회의나 군대 최고 사령부 회의에서 결정되어 군복 입은 남녀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것이 아닐 때야 나쁜 것으로 여겨진다. 도둑질은 추위를 쫓고 싶어 기름을 원하는 사람들한테 ‘부가가치세’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것이 아닐 때야 잘못이 된다.
추상적인 도덕 ― “모든 살인은 잘못이다,” “모든 폭력은 잘못이다” ― 을 갖고 판단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위선을 수용하던지(우익의 도덕 주창자들처럼), 아니면 기존 사회의 악들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손을 떼게 되던지(왜냐하면 그러한 투쟁은 ‘비도덕적’ 수단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둘 중 하나로 끝난다.
그러나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사람들한테 도덕적 의무가 있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당신이나 당신 가족에게 어떠한 압력이 가해지더라도 파업을 파괴해서는 안 되는 의무, 투쟁에서 동지를 배신해서는 안 되는 의무, 연대를 보여 줘야 할 의무, 인종적·종교적 소수파를 희생양 삼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저항해야 할 의무가 그것이다.
핵무기로 이 세계를 파괴하려는 위협,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 조장, 가스실과 나치 수용소, 이윤 추구를 위해서라면 사람들의 삶을 파멸시키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것 등, 자신의 물질적 이해관계 때문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잘못됐기 때문에도 어떤 일들에는 반대해야 한다는 느낌을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다면, 오늘날 사회주의자가 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1840년대 중반에 마르크스 자신이 처음으로 사회주의자가 된 것도 바로 그러한 ‘도덕적’ 관심 때문이었다. 그의 출발점은 진정한 인간의 ‘자유’가 어떻게 얻어질 수 있는지, 즉 “인간이 천대받고, 버림받고, 경멸받는 노예 상태가 되도록 만드는 모든 조건을 뒤엎기 위해” 자연과 사회 제도를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관심이었다.
이러한 ‘자유’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이 믿는 것과는 달리 단순히 절대주의 국가나 제도 종교 같은 억압적 사회구조를 없앤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본성상 사회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우리를 둘러싼 이 세계에서 우리 가운데 누구도 다른 사람들과 협동하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 우리의 기쁨, 느낌, 감정은 모두 사회적인 것이며, 더 넓은 공동체들의 일부인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결정된다. 그러나 부르주아 사회는 시장에서 상품을 팔고 사는 것에 기초한 관계를 제외한 사람들 사이의 모든 유대를 파괴한다. 부르주아 사회가 사람들에게 많은 형식적인 자유를 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렇게 해서 비인간화된다.
마르크스 이전의 철학자 헤겔은 순전히 자유주의적인 접근법에 있는 약점을 이미 간파한 바 있다. 부르주아적 자유는 인간이 시장을 통해 원자화된 방식으로 상호 관계를 갖게 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속에서 개인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에 의해 끊임없이 침식당한다. 따라서 아무도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없다.
만년의 헤겔은 시장이 제공할 수 없는 공동체적 삶의 요소를 제공하는 어떤 것이 있을 때에는 중간계급 자유주의가 사람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요소가 국가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헤겔의 통찰을 다른 방향으로 발전시켰다. 사회를 초월해 있는 국가는 진정한 공동체적 유대를 파괴하고 개인의 자유를 침범하는 원자화된 시장 조건을 결코 무력화하지 못한다.
게다가 국가는 어떤 추상적인 실체가 아니다. 국가는 특정한 사회 집단이 통제한다. 국가 권력은 사람들을 더 한층 억압하는 데에, 즉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소외를 심화하는 데 봉사한다. 국가와 국가를 뒷받침하는 종교 제도는 모두 계급 분화와 그것이 낳은 자유의 결핍을 신성화 하는 데 봉사할 뿐인, 추상적이고 냉혹하고 진부한 행동 규범들을 사람들에게 부과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계급이 없었던 사회에서 도덕 용어들 ― 선량함, 정직, 고결함 ― 은, 협력적인 노동과 그와 더불어 발전하는 사회 생활에서 혜택을 얻으려면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그러나 일단 계급사회가 등장하자, 각각의 계급은 그 용어들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게 된다.
지배계급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자기들의 견해를 다른 계급들한테 강요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선량함’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수용하는 것을 뜻하게 되었고, ‘정직’은 부자들이 더 부자가 되도록 하는 것을 뜻하게 되었으며, ‘고결함’은 개별 가족으로 개인적 관계들을 가두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국가는 권력을 이용해서 지배계급이 부과한 도덕 규범들을 피착취 계급이 받아들이도록 한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도덕적’인 것과 자유로운 인간 발전을 촉진하는 것 사이의 연결 고리는 끊어질 수밖에 없다. 지배적인 도덕은 한편으로 사람들을 억압하는 일련의 규범들이 된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가장 인간적인 일부 속성들에 대해 죄의식을 갖게 된다. 다른 한편 그러한 도덕은 사회적 삶을 결코 개선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무시할 수도 있는 너무나 제멋대로인 가정들로 비춰진다. 따라서 한편에서 그러한 도덕은 범죄를, 다른 편에서는 매우 자기중심적인 행동들을 만들어낸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 도덕 개념이 한 번 성취한 적이 있는 목표 ―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의 사회적 협동을 통해 자기를 실현하도록 한다는 ― 를 망각할 수는 없다. 그러한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자본주의가 인간 관계를 훼손하면 할수록 더 중요해진다.
바로 그 때문에 청년 마르크스는 인간 해방이 오로지 새로운 협동적 사회 질서의 전망을 제기하며 시장 사회 전체에 도전하는 새로운 사회세력을 통해서만 올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오로지 “모든 계급을 해체할 계급, 그들의 고통이 보편적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성격을 지니는 사회계급”만이 이 세력을 이룰 수 있다. 마르크스가 노동자 계급을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데 꼭 필요한 행위자로 여겼던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었다.
그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얘기한 것처럼 노동자 계급의 투쟁만이 “각자의 발전이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진정으로 인간적인 사회” 건설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중요한 것은 개인의 도덕성이 아니라 좋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투쟁 속에서 도덕론의 언어는 지배계급이 자기들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속박하려고 사용하는 언어라는 점이 너무도 자주 드러났다. 지배계급에 반대하는 도덕론자들조차 개인적 행위에 관해 도덕적 설교를 하는 것 ― “당신이 사회를 변화시키기 전에 먼저 당신 자신부터 변화시켜야 한다” ― 이상을 할 수 없었다.
그와는 반대로 노동자 계급 투쟁의 모든 진정한 발전은 진정으로 협동적이기에 진정으로 인간적인 사회의 가능성을 알려주는 그런 종류의 가치들을 제기하기 시작한다. 그러한 투쟁들은 연대와 상호 지지와 협동적 노력이라는 개념들을 제기한다.
이러한 새로운 가치와 치열한 자본주의 경쟁이 만들어낸 가치 간의 대조는 기존 사회를 유지하려 하거나 개인적 출세를 위해 투쟁을 저버리는 사람들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에 도덕적 차원을 제공해 준다.
마르크스 시대에 자본주의 도덕론을 받아들이고 옹호하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협동적이고 인간적이며 살아 볼만한 가치가 있는 삶을 부인하는 사회가 영속하는 것을 도왔다. 오늘날 그들은 더욱 나쁜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은 핵전쟁을 일으키거나 생태환경에 대재앙을 만들어냄으로써 인간 삶의 토대 자체를 위협하는 체제를 인정하고 있다.
그들의 도덕 규범들은, 그들이 이 체제를 전복하려 하지 않고 이 체제에 봉사하려 한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비도덕적이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추상적인 도덕론을 거부하지만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규범을 제공한다.
1930년대 중반에 트로츠키가 지적했듯이, “그것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힘을 증대시키고 인간에 대한 인간의 힘을 폐지하게 한다면” 그 목적은 정당하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서 기존 사회의 도덕론자들을 당혹스럽게 할 수단들이 필요할지 모른다. 예컨대, 다른 편의 폭력을 무력화하는 폭력을 사용하는 일이나 계급의 적의 면전에서 속임수를 쓰는 일이 그것이다. 반면, 이러한 목적과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즉 계급에 기반한 비인간적인 사회를 영속하는 데 명백히 일조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도덕과는 모순되기 때문에 거부해야 하는 수단들 ― 기존 사회의 도덕론자들이 ‘정당하다’고 여기곤 하는 수단들 ― 도 있다.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허용할 만하며 필수적인 수단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를 결속시키고 억압에 대한 화해할 수 없는 적대감으로 그들의 심장을 채우고 … 그들 자신의 역사적 사명 의식을 고취하고 용기와 자기 희생 정신을 고취시키는 수단, 오로지 그러한 수단뿐이다.
“정확히 이 점 때문에 모든 수단을 허용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 나온다. … 위대한 혁명적 목표는 한 부분의 노동자 계급을 다른 부분의 노동자 계급과 맞서게 하거나 … 대중 자신과 그들의 조직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수단과 방법들을 거절한다.”
허용할 수 없는 수단에는 노동자 계급을 무지 속에 방치하는 것, 한 부문을 다른 부문과 분열시키는 것, 억압자들에 대한 환멸을 소수 집단 희생양 삼기로 돌리는 것, 세계적 계급세력을 약화시키는 것 등이 포함된다. 요컨대, 노동자 계급이 “보편적 계급”으로 발전할 수 있는 능력을 훼손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포함된다.
따라서 원칙으로 배제해야 하는 수단은 나치 수용소, 핵무기,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 인종적 증오, 포르노그래피, 대중을 속이는 일, 지도자 숭배를 확립하는 것 등이다. 노동자 계급 혁명을 위한 투쟁에는 노동자들이 이런 일들을 무심코 하거나 받아들이도록 부추기는 그 어떤 것에도 맞서는 투쟁이 포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