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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인 위원회, 어떻게 받아들일까?

들어가며

운동사회 내 성폭력 가해자들의 실명을 공개하고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100인 위원회는 몇 달이 흘러 이제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사라지고 있는 듯하다. 참세상이나 진보넷 게시판에서도 몇가지 주제에 대한 꾸준한 논쟁 외에는 처음처럼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지지는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노동당 학생 그룹의 기관지가 100인위에 대한 입장을 실은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대다수의 학생 운동 진영들이 침묵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감한 주장을 했기 때문에 더욱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난호의 100인위에 대한 글은(지난호의 글이 민주노동당 학생 그룹의 공식적 입장인지 알지 못하므로 그냥 하나의 의견으로 받아들였다.)몇가지 우려스러운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에 감히 지면을 빌려 반론을 제기하고자 한다.

100인위의 경과

지난해 100인위가 결성되고 가해자의 실명이 공개되면서 그것이 진보넷과 참세상 100인위 게시판에 가져온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수십 개 이상의 글들이 하루만에 올라오기도 했고 수많은 논점에 대해 일견 혼란스러운 논쟁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충격은 어느새 가라앉았고 몇몇의 상대할 가치조차 없는 욕설을 제외하고는 한두 가지 쟁점에 대한 차분한 논의가 진행중이다. 안티100인 위원회 홈페이지는 초기에 올라온 몇 개의 글 이외에는 새로운 글이 올라오지도, 논쟁이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논쟁들 속에 100인위가 의도한 것, 혹은 많은 이들이 100인위의 사건 공개로 바랬던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100인위의 의도?!

나는 100인위가 특별히 '운동사회 내의 성폭력' 을 공개한 이유에 주목하고자 한다. 사실 일반적인 성폭력 사례를 구하고자 한다면 몇 시간 짬을 내어 법원의 기록을 뒤져 보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아니, 수고스럽게 법원까지 갈 것도 없이 인터넷 검색엔진에서 성폭력이라고 입력하기만 해도 얼마든지 많은 흥미진진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인 위원회가 얼마되지도 않는 소위 운동권들 속의 성폭력 사례를 조사하고 공개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어느 정도의 양식있는 사람이라면 우리 사회에서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거나 여성을 단순한 성적 장난감 정도로 취급하는 일이 곳곳에서, 매우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최근의 군내부의 성폭력 사건이나 국무총리실사건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그리고 그러한 현실은 소위 운동권의 조직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이는 100인위가 공개한 사건을 제외하고라도 비교적 성폭력에 대해 담론이 활성화되어 있는 대학에서 성폭력 사건으로 대중간부가 사과하고 사퇴한 경우가 많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대학가에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은 진보진영이 성폭력의 무풍지대가 아님을 반증하는 것이라는 말조차 진부할 정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은 사실 대학가를 제외하고는 진보 진영의 조직 보위 논리에 묻혀 입소문으로만 전해질 뿐이다. 이러한 조직 보위 논리는 여성운동을 '계급 투쟁 혹은 조직의 노선에 있어 부차적인 것'이라고 치부하게 하기도 하고, 공동체가 파괴되는 것에 대한 우려, 사업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이런 일이 일어난 걸 알면 사람들이 농활에 오겠냐라는 식) 때문에 성폭력을 은폐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논리는 많은 이들이 지적한 것처럼 성폭력을 사적인 일, 사소한 일로 치부하게 만든다.

《열린 주장과 대안》 지난호에 실렸던 글이 가장 우려스러운 지점은 이 지점이다. 성폭력이 계급 사회의 산물이라는 결론은 단순히 조직 보위의 논리를 넘어서서 '성폭력 없애기=자본주의 타도'라는 환원론적 접근에 불과하다. 나는 백인위가 진보 진영내에서 가장 없애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런 접근법들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의 운동을 인간 해방의 이름으로 부르고 싶지 않은 이유는 겉으로는 거창한 해방의 깃발을 들면서도 정작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쉬쉬하거나 개인의 도덕적 잘못으로 돌려버리기 때문이다. 진보 진영에서 인간 해방의 세상을 꿈꾼다면 그러한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함으로써 성폭력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접근법이나 성폭력은 개인의 잘못일뿐이라는 접근법은 성폭력을 재생산시키는 데 도움을 줄 뿐, 성폭력 근절의 대안 사회의 상을 만드는데는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한다. 백인위의 활동을 단지 '운동권 내의 성폭력자 이름 공개하기' 정도로 치부한다면 진보 진영이 100인위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이 부분이 잘못이네, 저 부분이 잘못이네, 이건 성폭력이네, 아니네'를 따지는 논쟁거리 이상이 될 수 없다. 진보 진영은 조직 안에 내재해 있는 성폭력에 대해 환원론적 접근 방식이 아니라 자조직의 양성 차별한 모습을 직시하고 자신의 조직 안에서 일어나는 성폭력 문제를 현실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순의 하나라 인정하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거기에서 출발해야 성폭력에 대한 대응 방법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100인위의 가해자 명단 발표 이후 참세상에서 벌어졌던 논쟁의 주제는 크게 피해자 중심주의, 실명공개라는 방식, 성적 보수주의 등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논쟁들이 성폭력에 대한 개념을 함께 고민하고 해결 방식을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논쟁들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부차적인 논쟁이라고 생각한다. 진보 진영은 100인위의 공개를 보며 100인위의 활동방식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성찰의 계기로 삼아야 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나 실제로 참세상 게시판에는 그런 성찰의 말들은 없고 '100인위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는' 개인들만 있었다.

《열린 주장과 대안》 지난호에 실린 글도 마찬가지다. 100인위의 발표는 민주노동당의 입장에서는 진보 진영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당을 어떻게 양성 평등한 정치조직으로 만들 것인가, 성폭력 해결을 위한 정책은 어떤 것이 있을 것인가를 고민할 계기가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열린 주장과 대안》 지난호에 실린 글은 참세상 게시판에 올라온 글들과 전혀 다를 바 없었다. '진보 진영에 많은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100인위는 잘못되었다'라는 결론이 우리에게, 우리의 당에 어떤 도움이 되겠는가? 우리는 100인위를 평가할 필요가 없다.1) 그것은 앞으로 여성 운동의 한 방식으로 고민될 문제이다.

또한 우려스러운 지점들

《열린 주장과 대안》의 지난호에서 우려스러운 점들은 위에서 지적한 것 뿐만이 아니다. 지난호의 글에서는 무엇보다 자의적인 성폭력 개념의 문제를 상당히 지적했다. 그러나 또다시 문제는 '그렇다면 성폭력의 개념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로 돌아온다. 지난호의 글에서도 이에 대한 답은 들어있지 않다(물론 누구도 답을 내릴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자의적인 성폭력 개념 설정을 경계하면서 내리는 결론이다. 지난호의 글은 느슨하지 않은 성폭력의 범주를 정할 필요가 있다는 논조로 쓰여 있다. '강제적 성적 행위' '강간과 성적 농담을 같이 처벌할 수는 없다'라는 등의 말에서는 성폭력을 또다시 물리적인 범주로만 규정지으려는 시도를 보는 것 같다. 위의 말이 옳다면 강간과 성추행 사이에도 간격이 있을 것이며 무엇보다(심지어 여성의 성기에 콜라병을 넣는 것보다) 강간이 가장 큰 죄일 것이다.

강간이 가장 큰 죄인 이유는 성기의 삽입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성기의 삽입은 무엇 때문에 가장 큰 죄인가? 순결을 상실시킨 죄??

나는 이렇게 경직된 성폭력의 개념이 오히려 자의적인 해석보다 더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느만큼 더듬었으면 이만큼의 죄, 넣기까지 했으면 더 큰 죄'라는 개념들은 성폭력 피해자들의 정신적 피해를 무시한, 가장 제멋대로인 성폭력 개념이다.

또한 지난호에서 '이런 식으로 자의적인 성폭력 개념을 지지하면 성폭력범이 아닌 남자들이 거의 없을 것이고 모든 남성을 잠재적 적으로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개념을 수용해서는 안 된다. 또한 여성들도 성폭력범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성폭력을 저지르는 사람은 소수의 남성들이다' 라고 말하는 부분은 명백히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본다. 성폭력을 사회 전체의 문제로 보고 사회적인 해결을 모색해야 함에 동의하는 인식이 확산되는 지금 다시금 성폭력을 소수의 문제로만 치부해 버리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게 되는 것이다.

나가며

지금에서야 이런 논쟁들을 지면에서 하는 것은 어쩌면 늦은 감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는 최근 참세상의 게시판에 올라오고 있는 '나의 경험'에 주목하고 있다. 많은 여성들이 '나의 경험'이라는 제목으로 자신들이 그 동안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었던 부당한 대우들, 성폭력의 경험들을 올리고 있다. 지어낸 것이 아니냐는 의심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꾸준히 글을 올리는 그 분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성폭력 문제의 해결은 그야말로 '드러내기'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 게시판에서 민주노동당이 '우리의 경험' 이라는 제목으로 우리의 당을 양성평등한 곳으로 만든 기쁜 경험들을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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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기서 평가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100인위의 활동에 대한 평가가 전혀 무용하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활동과 마찬가지로 100인위의 활동에 대해서도 냉철한 평가가 있어야 할 것이고 그러한 평가를 바탕으로 앞으로의 활동 방식이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 100인위에 대한 평가가 필요치 않다고 한 것은 지금 이루어지는 소위 평가라는 것들이 이후의 자신의 조직이나 진보 진영 전체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예를 들어 성폭력의 기준이 모호함이 문제가 된다면 성폭력의 기준에 대한 관점을 정립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 입장도 '100인의 관점에는 문제가 있다'에서 한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평가는 '지나가던 사람의 의견 말하기'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여진이 동지 글에 대한 답변

정진희

먼저 내가 쓴 글에 대한 이견을 독자편지로 보내 온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그 동안 《열린 주장과 대안》이 8호가 나오도록 이견을 보내 온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학생 그룹 잡지를 읽는 데다가 우리 잡지에 실리는 글들이 늘 1백 퍼센트 올바른 견해를 담고 있는 것도 아니기에, 이견을 갖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이런 이견들을 중앙 간행물을 통해 논쟁하고 토론하는 것이 그 동안 우리 그룹에서 너무 부족했다. 앞으로 이런 독자편지가 더 많아지기를 기대하며 내 글에 대한 반론에 답하고자 한다.

여진이 동지의 반론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내가 100인위 폭로의 긍정성은 주목하지 않은 채 비판만 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폭력 개념을 엄밀히 규정하려는 내 시도가 문제 있다는 것이다.

첫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여진이 동지의 지적을 인정한다. 지난 번 글에서 내가 100인위 폭로를 지나치게 강경한 논조로 비판하는 글을 썼기 때문에, 내가 100인위가 제기하려 했던 문제 의식 ― 운동 진영 내 성폭력과 성차별적 태도를 없애야 한다는 ― 자체를 부정한다는 인상을 줬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글에서 운동 진영 내 잘못된 관행에 대한 비판보다 100인위에 대한 비판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분명 잘못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100인위에 대해 지나치게 강경하게 비판한 결과, 100인위 활동을 모두 부정하는 것처럼 오해를 준 듯하다. 오해를 풀기 위해 말하자면, 나는 100인위가 운동권 성폭력을 드러내는 활동을 한다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은 아니다. 나는 자의적 성폭력 개념에 뒤따르는 문제점을 지적하려 했는데, 그 방식이 서툴러 그만 주객이 전도됐다. 100인위의 긍정성을 주목해야 한다는 여진이 동지의 주장은 분명 올바르다.

그러나 나는 여진이 동지처럼 100인위의 성폭력 개념에 대해 무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100인위의 자의적 성폭력 개념을 비판한 내 견해에 대한 여진이 동지의 반박은 100인위의 혼동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여진이 동지는 내 견해가 "성폭력을 또다시 물리적인 범주로만 규정지으려는 시도를 보는 것 같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정확한 지적이다. 나는 성폭력을 물리적 강제력과 분리시키려는 견해에 반대한다.

이것은 100인위나 여진이 동지가 오해하듯이 "성폭력 피해자들의 정신적 피해를 무시"하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지 않는데, 어떻게 신체적 고통이 정신적 고통과 분리되겠는가? 나는 결코 성폭력 피해자들이 입는 정신적 피해를 무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폭력 피해자들이 보호받을 수 있는 조처가 국가 차원에서 마련돼야 하고(나는 성폭력특별법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대학에서는 성폭력 학칙이 제정돼야 하고, 운동 진영의 경우에는 해당 조직이 자체 규율로 성폭력을 징계해야 한다고 본다.

내가 성폭력을 엄밀하게 규정지으려 했던 것은 성폭력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성폭력을 '여성의 불쾌함'으로 느슨하게 사용하게 되면, 오히려 성폭력의 심각성은 흐려지고 만다. 단순한 농담이나 욕설, 눈빛까지 성폭력이라 한다면, 성폭력은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가벼운 잘못으로 취급될 수 있다. 직장 내 성희롱을 규제하려는 사규를 만들려고 할 때, 회사측은 느슨한 개념이 갖는 약점을 이용해 성희롱을 '여성의 과잉 반응'으로 치부하며 소모적인 논쟁으로 시간을 끌곤 한다. 성희롱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한 지속적인 성적 괴롭히기라는 뚜렷한 특징이 있는데도 말이다.

폭력이라는 말 자체가 물리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언어에는 사회성이 있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누군가를 죽이겠다고 말했다 해서 살인죄로 처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언어 폭력' 같은 용어법대로라면, 혁명이 필요하다고 단순히 주장하는 것과 그것을 나중에 실행에 옮기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공안 검찰의 논리도 일리 있게 된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협이 없는데도 반체제 언론을 탄압하는 국가보안법을 정당화하는 논리도 말과 행동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다.

강제적 신체 접촉을 수반하지 않는 언행을 성폭력이라 볼 수 없다 해서 여성 차별 언행이 옳다는 건 결코 아니다. 성폭력과 성폭력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것은 반대할 것과 반대하지 않을 것을 구분하는 게 아니다. 여성을 모욕하고 비하하는 언사 역시 성차별의 일부이며 우리는 이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러나 성차별 언사에 맞서기 위해 그것을 꼭 성폭력이라 규정해야만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차별의 다양한 형태들과 정도의 심각성을 무시하고 추상적으로 성폭력이라고만 얘기한다면, 구체적 상황에 맞는 합당한 대책을 내놓기가 어려울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폭력이 계급 사회의 산물이라는 내 주장이 계급 환원론이라는 비판에 답변하는 것으로 글을 끝내겠다.

먼저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성폭력이 계급 사회의 산물이라는 주장이 성폭력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1) 범죄의 사회적 근원을 밝히는 견해가 범죄를 옹호하는 것과 동일시될 수 없듯이 말이다.

여진이 동지는 성폭력이 계급 사회의 산물이 아니라는 듯이 주장하지만, 정작 성폭력의 원인이 무엇인지 밝히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계급 사회 전에는 여성이 억압받지 않았고 오히려 사회에서 존경받고 매우 큰 독립성을 누렸다는 사실은 많은 인류학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 있다. 인류학자들의 연구는 여성의 지위가 어떤 사회에서는 아주 달랐음을 보여준다.

1930년대만 해도 태평양 트로브라이언드 군도에 사는 사람들은 강간이란 말 자체를 몰랐다. 그들은 남성이 여성을 때린다거나, 여성이 원하지 않는데도 일부일처 관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17세기 가톨릭 예수회 수도사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아내가 정숙하고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몹시 불쾌하게 여겼다.

이것은 성폭력을 비롯한 여성 억압이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뀐다면 사라질 수 있음을 뜻한다. 이것은 흔히 오해하듯이 여성 해방 투쟁을 사회의 근본 변혁 뒤로 미뤄 둬야 함을 뜻하는 게 결코 아니다. 사회의 근본 변혁과 여성 해방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과정 속에 있다.

여성 해방을 부차적인 과제로 취급하는 스탈린주의나 천박한 노동자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누군가가 계급 해방이 먼저고 여성 해방은 나중이라는 식으로 둘을 단계화한다면, 그는 계급 해방을 매우 편협하고 추상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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