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편’ 출연도 자유로운 선택일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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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종합편성채널(이하 종편) JTBC 보도 담당 사장이 된 손석희의 인터뷰가 〈한겨레〉에 실렸다. 누군가는 1992년 MBC 파업 때 앞장섰다가 구속돼 손이 묶인 채 파란 수의를 입은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씁쓸했을 것이다.
손석희뿐 아니다. 민주당은 대선 패배 이후 종편에 안 나간 게 원인이라며 종편 출연 거부 당론을 폐기했다. 진중권 같은 진보 인사들이 종편에서 강용석, 조순형 같은 우익과 웃고 떠드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보수독점적 언론 구도, 여론 다양성 훼손 등의 … 도구로 사용된다면 그 비판을 달게 받겠다”는 손석희는 과연 그런 비판을 피할 수 있을까?
분명 손석희가 JTBC 〈뉴스9〉의 앵커가 된 후 삼성 백혈병 피해자들의 소식이나 밀양 송전탑 문제 등이 보도되기도 했다.
같은 맥락에서 종편이 ‘합리적 보수’로 변할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종편만 문제가 아니다?
물론 최근 ‘공영’방송이라는 KBS, MBC도 정부의 스피커 구실이나 하는 상황에서 특별히 종편만 문제냐 하는 제기는 분명 타당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종편의 DNA에 새겨진 태생적 한계를 보지 않는 것이다. 종편은 이 사회 지배계급과 1퍼센트 재벌들의 대변인이 되고자 태어난 언론이다. 이를 위해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은 언론노조와 수많은 사람들의 저항을 억누르고 날치기로 언론악법을 통과시켰다.
손석희는 “삼성은 JTBC에 지분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삼성전자와 현대차, 기아차 등은 하도급업체 십여 곳을 통해 JTBC를 포함한 종편에 1백69억 원 규모의 출자 계획을 약속했다. 최근 정부는 또다시 종편에게 유리한 전송 방식 등 특혜를 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는 종편이 누구 입에 달린 혓바닥인지 보여 준다.
일각의 제기처럼, TV조선·채널A와 JTBC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JTBC도 이명박 정권 때 4대강을 찬양했고, 이번 대선 때도 박근혜 띄우기에 열을 올렸다. TV조선의 ‘미친 존재감’ 때문에 JTBC의 우파적 본색이 덜해 보였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손석희가 진행하는 〈뉴스9〉에서 약간만 눈을 돌려도 JTBC에서 방영되는 수많은 프로그램은 성희롱, 추문 등으로 정치 인생이 위기에 몰린 꼴통 우파들의 ‘이미지 세탁소’로 쓰이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박원순 서울시장도 ‘종북’이라고 말하는 자들을 출현시켜 ‘종북 마녀사냥’에도 힘을 보탰다.
일부 사람들은 종편도 언론이니 그들에게 ‘언론의 자유’가 있다고 말한다. 보수 인사들과 심지어 자유주의자들도 이런 논리로 ‘종편 출연 거부’에 대해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조차 모르는 소치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언론의 자유란 그 자체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봤다. 마르크스는 언론의 자유를 민주적 권리를 이루기 위한 더 넓은 투쟁의 일부로 봤다. 즉, 영리를 추구하거나 민주적 권리를 침해하는 도구로 쓰일 ‘언론의 자유’는 옹호할 수 없다.
TV조선의 앵커는 “종북세력 머리를 좀 쪼개서 해부[하고 싶다]”라는 말을 뉴스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5·18 북한 개입설’을 주장하며 역사를 왜곡하기도 한다.
이런 막말, 왜곡, 허위사실 공표 때문에 종편 4사는 출범 이후 총 1백50건의 제재를 받았다. 기계적 중립은커녕 사실에도 관심이 없는 것이 종편의 본질이다.
그렇기에 일부 진보 인사들의 종편행은 오히려 종편의 친기업적·우익적 본질에 ‘중립’이라는 분칠을 해 주는 효과를 낸다. 손석희 영입 후 JTBC에 젊은 사람들의 시청률이 높아진 것도 이런 효과의 일환이다.
따라서 종편행이라는 ‘개인의 선택을 비난해선 안 된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왜냐면 민중을 공격하는 언론에 협조하는 것은 스스로 ‘양두구육’의 양머리가 되는 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