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생각한다:
노동자 연대는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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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저항과 연대의 정서가 생겨나고 있다. 지난해 12월 철도 파업은 노동자 운동의 잠재력과 영향력을 새삼 환기시켰다. 그리고 지난 2월 25일에는 민주노총이 수년 만에 하루 파업을 했다. 반갑게도, 노동자 투쟁이 소생하면서 ‘노동의 주도력’이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분화로 노동자 연대는 불가능하다는 생각도 만만찮다. 특히, 1997∼98년 금융 공황을 계기로 노동계급이 양극화하고 노동자들의 파편화·원자화도 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해 투쟁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반쪽 진실과 과장
노동계급 내부에 ‘분절’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대기업과 중소영세기업 노동자 사이에,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구분이 있다. 이런 구분은 자본주의의 고유한 특징이다. IMF 금융 공황 이후 확산된 신자유주의 정책들은 이런 구분을 더 심화시켰다.
이런 차이에 주목해 심지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결론으로까지 나아가는 주장들을 노동자 운동 안에서도 종종 들을 수 있다.
비정규직이 임금과 노동조건, 각종 복지 혜택에서 정규직보다 크게 열악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곧 둘의 물질적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는 연대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의 물질적 이해관계를 포기해야만 ─ 이는 오직 개혁주의 지도자들의 강요로써만 가능하다 ─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는 현상적 격차 못지 않게 단일한 이해관계가 있음을 봐야 한다. 정규직은 비정규직의 증가로 특권을 누리기보다는 노동조건의 후퇴를 압박받는다. 비정규직의 규모가 늘어나면 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력이 약화되고 투쟁력도 크게 떨어진다. 철도 노동자들이 2000년대 중반 이후 철도 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투쟁한 것도, 전교조 교사들이 시간제 교사제의 도입에 강하게 반발하는 것도 그래서다.
물론 비정규직이 투쟁할 때 정규직 노동조합과 갈등이 빚어지는 일이 가끔 있다. 2010년과 2012년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할 때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갈등이 빚어진 핵심 이유는 원청 노동조합 지도부가 연대 투쟁을 조직하기보다 미덥지 못한 중재자 구실을 앞세웠기 때문이었다. 노동과 자본 사이의 중재자인 노동조합 상근간부층의 개혁주의가 본질적 문제였던 것이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문제를 정규직 노동자 전체의 문제로 싸잡아서는 곤란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물질적 이해관계가 다르고,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본에 포섭됐다는 생각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지난해 현대차 정규직 노동자들이 지도부의 부적절한 특근 합의에 반발해 특근 거부 투쟁을 했을 때, 거의 모든 좌파들이 이 투쟁을 지지하기를 꺼렸다.
사회적 연대
그들의 대다수는 노동자 연대 대신에 사회적 연대를 대안으로 내놓는다. 물론 사회적 연대는 좋은 것이다. 가령, 한진중공업 희망버스나 지난해 연말 대학생들의 ‘안녕들 하십니까’ 운동은 노동자 투쟁에 연대하는 운동이었다.
또, 거리 항의 운동이 때로 정부를 곤경에 빠뜨릴 수도 있다. 2008년 촛불항쟁은 막 등장한 이명박 정부를 곤경에 빠뜨렸다. 지난해 터키와 브라질에서도 청년들의 거리 항의가 그 나라 정부들을 강타했다.
그러나 사회적 연대로 노동자 연대를 대체하는 것은 포퓰리즘이다. 가령 “국가 권력의 비정상적인 자본 편들기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은 노동자들과 맞잡은 각계각층의 사회적 연대에서 나온다”는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탑승자 일부의 주장이 전형적이다. 그러나 사회적 연대라는 이름으로 그저 다원주의를 칭송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중심(이윤이다)과, 따라서 반자본주의적 운동의 중심(노동자 파업과 시위)을 해체시키는 것이다.
잘 조직된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이라는 무기를 사용했을 때 ‘안녕들 하십니까’ 운동이 일어났다는 점을 봐야 한다. 또, 2008년 촛불항쟁이 절정기에 1백만 명을 거리로 끌어냈을 때조차 노동계급의 계급 고유 행동의 부재로 말미암아 더 전진하지 못하고 적들의 반격을 당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다원적 사회 계급들의 거리 항의가 사회 변혁을 일으킬 수 있는 “사회적 주체”가 될 수는 없다. 거리 항의 운동의 동력이 노동계급의 경제적 힘 사용에 바탕을 두지 않고, 따라서 그 운동이 지배계급 권력의 핵심인 이윤에 도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노동계급이 아닌 다른 피지배 집단의 고통을 도외시하는 노동자주의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차별에 맞서는 투쟁과 착취에 맞서는 투쟁이 필연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착취에 저항하는 능력을 차별을 반대하는 데도 사용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사회민주주의는 사회적 연대를 가장 강조한다. “사회적 연대는 사회민주주의의 영혼이다.” 또한 사회민주주의적 연대는 거리 항의를 가장 강조하는 부분적 아나키즘이나 부분적 자율주의와 달리 산별 교섭과 의회를 통한 사회적 연대를 강조한다.
사회민주주의적 연대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한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자본의 분할 지배 전략 때문에 노동자들 사이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불평등이 극심하며 동일노동-동일임금이 부정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려면 중앙집중적 산별 단체교섭과 입법적 지원을 통해 사회적 연대를 조직해야 한다고 본다. 산별노조와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라는 양날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와 경제의 분리, 즉 정당은 제도권 정치를, 노동조합은 경제 투쟁을 맡는 역할분담론이다.
물론 산별노조는 조직 형태상 더 큰 범위로 노동자들을 조직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고,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정당으로부터 독립한 자신들의 정당을 갖는 것은 분명히 진보다.
그러나 산별노조가 자동으로 기업별 울타리를 뛰어넘는 계급적 연대와 정규직·비정규직의 분열 해소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조직 형태가 자동으로 계급적 연대라는 정치적 내용을 채워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적 연대의 중요한 모델 중 하나가 스웨덴의 ‘연대임금 전략’이다(‘렌-마이드너 모델’). 이 모델은 무엇보다 임금 수준을 중앙에서 결정하는 ‘임금연대전략’이었다. 노동자들에게는 저임금과 열악한 조건의 3D 업종에서 자본가들을 제약하는 이점이 있었다. 반면, 자본가들에게는 가장 수익성 있는 기업의 임금을 통제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자본가들에게는 높은 수익성을, 노동계급에게는 실질적인 빵조각을 제공하는 식으로 자본가 계급과 협상했다.
그러나 연대임금 전략은 노동계급 내부의 임금 격차를 좁히기보다는 오히려 임금 상승을 억제하는 효과를 냈다. 무엇보다, 계급 타협이 지속되는 동안 노동자들은 투쟁의 근육이 풀어졌다. 마침내 1990년대 중엽 스웨덴 자본주의가 위기를 겪고 지배자들이 신자유주의 공격을 가할 때 노동자들이 이에 저항하기가 어렵게 됐다.
따라서 산별노조의 중앙 교섭이라는 조직 형태 자체보다는 계급세력의 균형과 현장 노동자들의 투쟁이 노동자들의 삶과 조건에 더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계급투쟁
거리 항의와 공식 정치를 통한 ‘사회적 연대’에 대해 종파적인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되지만, 생산 지점에서 벌이는 투쟁과 결합된 노동자 연대가 그런 투쟁 형태의 바탕이 돼야 한다.
지난해 12월 철도 파업 이후 지금까지의 상황이 보여 주듯이, 조직 노동자들의 투쟁과 조직력이 소생하기 시작하면 사회 전체의 계급세력균형이 노동자·민중 편에 유리하게 바뀔 수 있다. 가령 남재준의 위기 등 여권 내 분열을 계급투쟁과 무관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노동조건도 마찬가지다. 강력하고 잘 조직된 부문의 노동자들이 임금을 더 많이 올릴 수 있으면, 나머지 노동계급도 고임금을 받는 강력한 부문의 노동자들과 자기 임금을 비교하면서 그 뒤를 쫓아가는 경향이 있다. 한 부문의 에스컬레이터가 움직이는 속도는 다른 부문의 에스컬레이터 속도에 동일한 방향으로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동자의 세력이 증대하면 노동계급 내부의 임금 격차가 상당히 감소하는 것이다. 반대로, 강력한 노동자들의 임금이 억제된다면 취약한 노동자들은 심지어 임금 삭감 압력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가장 바람직한 노동자 연대는 한 작업장 노동자 투쟁에 대해 다른 작업장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요구를 걸고라도) 동시에 파업하는 것이다. 그래서 “계급 대 계급의 투쟁”으로 발전하면 그러면 정치 투쟁의 효과를 내는 것이다. 요구의 정치성 여부보다는 단일한 계급으로, 또 노동계급 고유의 방식으로 저항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
물론 노동계급의 의식이 불균등하고, 구체적인 정치 상황과 계급세력 균형에 따라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사기가 오르내릴 수 있고,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흔히 자기제한적으로 투쟁에 제동을 걸기 때문에 노동자 연대가 언제나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부문적 투쟁(경제 투쟁)이 계급 전체의 운동(정치 투쟁)으로 언제나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노동자 연대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선진 노동자들이 조직돼 있어야 한다. 이런 선진적 노동자들은 노동자 연대를 건설하기 위해 작업장과 거리 모두에서 애써야 한다.
어찌 보면 (사회주의) 정치란 간단한 것이다. 가장 선진적인 노동자들이 나머지 노동자들을 자기 의견 주위로 결집시켜 계급적 행동과 비전, 지향성을 현실화하고자 애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