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론:
허영구 후보의 정견을 곡해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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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 주신 편지 잘 받았습니다. 먼저, 본지 기사가 추측과 주관적 해석에 기초해 있지는 않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허영구-김태인-신현창 선본의 공보물과 A4홍보물, 좌파노동자회가 발간한 《민주노총 5대 혁신과제》, 허영구 후보가 쓴 《새로운 시대의 총연맹, 좌파노총》, 좌파노동자회 저널 《월간 좌파》에 실린 논문 등을 참고했음을 알려 드립니다. 아마도 이런 내용이 동지께서 들으셨다는 15분에 불과한 ‘유세’에서는 다 잘 드러나지 않을 수 있으므로 이런 글들을 참고·비교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둘째, 사실관계를 바로잡겠다며 “임원직선제 좌파 공동대응 논의테이블은 정책 입장 차이로 무산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후보 선출 방식이 합의에 이르지 못한 점과 함께, 좌파노동자회의 “5대 혁신과제” 수용 여부가 좌파 후보 단일화 무산 과정의 한 쟁점이었으므로 그렇게 설명하는 것이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실, 저의 설명 방식도 이와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좌파노동자회가 좌파들의 공동 대응보다 “5대 혁신과제” 선전에 더 큰 의의를 둔 듯하다고 썼던 것입니다. 좌파노동자회는 ‘우리는 오래전부터 직선제를 준비해 왔다. 그 내용이 5대 혁신과제다. 그것을 받으려면 함께하고 아니면 말자’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무슨 사실관계를 왜곡이라도 한 듯이 쓰신 것은 부당한 주장입니다. 물론 어떤 단체가 자신들의 독자적인 활동보다 공동 활동을 항상 더 중시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셋째, 허영구 후보의 주장은 “정규직 노동조합과의 단절이 아니라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연대, 나아가 조직되어 있지 않은 전체 노동자와의 연대’를 추구하자는 것”이라고 반박하셨습니다.
먼저, 저는 “(허영구 후보조의) 혁신 우선론에는 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불신이 근저에 깔려 있다”고 썼지, 허영구 후보조가 정규직 노동조합과 단절을 하려 한다고 단정적으로 쓰지는 않았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좌파노동자회의 불신이 기존 정규직 노동조합과의 단절로 나아갈지 그렇지 않을지는 모호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저의 모호함이 아니라 허영구 후보의 모호함입니다.
허영구 씨는 여기서는 분리 노총으로 해석될 주장을 하고, 저기서는 다른 주장을 하는 식으로 애매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가령 허영구 씨는 얼마 전에 쓴 글에서 “[좌파노총은] 민주노총 혁신으로 건설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민주노총이 문제가 많지만 고쳐서 가 보자는 식으로는 변화하는 정세에 부응하는 자세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후보가 된 지금은 민주노총을 혁신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민주노총을 고쳐쓸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본다면 그 결론이 민주노총에서 분리해 새 노총 만들기로 기울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호함을 분명하게 해명할 책임은 제가 아니라 허영구 후보에게 있을 것입니다.
넷째,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미조직 노동자의 연대’에 대해 얘기해 봅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연대일 것입니다. 그런데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체제내화됐고 비정규직을 방패막이 삼아 이득을 보고 있다고 본다면, 정규직의 비정규직 연대를 하나의 가능성으로 보고 진지하게 추구할 수 있을까요?
이런 관점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이기적인 투쟁’으로, 심지어 노동자 계급 내 격차만 벌어지게 만드는 일로 여기기 십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나은 조건을 공격받게 된 대공장 정규직·공공부문 노동자들은 이에 맞서 싸울 수 있고, 이런 투쟁은 전체 노동자 계급에 영향을 미치는 신자유주의적 공격을 저지하는 전략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전술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투쟁을 통해 의식이 변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당장 자기 이익 챙기기에 급급했던 노동자들도 투쟁을 통해 주변 노동자들을 돌아보는 연대 의식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허영구 후보는 언론사 합동토론회에서 “하청 노동자들에게 통상임금 논쟁은 호사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현실”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런 입장으로는 ‘통상임금 문제는 정규직 귀족 노동자들의 돈잔치일 뿐’이라는 정부와 사용자들의 악의적 공격에 제대로 맞서기 어렵고, 그들이 최저임금 인하를 위협하며 고소득 노동자들과 저임금 노동자들을 이간시키려는 것에 잘 대응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통상임금은 장시간 노동체제, 연공급 해체 등 임금체계 개편 등과 관련된 것으로, 전체 노동자 계급에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잘 조직된 노동자들이 통상임금 문제를 계기로 임금체계를 악화시키고 노동시간을 유연화하려는 정부와 사용자들의 시도를 막기 위해 투쟁에 나서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올해 통상임금 투쟁은 매우 무기력했는데, 좌파 전체에 상당히 퍼져 있는 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회의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봅니다.
다섯째, 노동조합 관료주의를 통합진보당 세력의 문제로만 보는 것은 매우 협소한 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어느 수준까지는 투쟁을 하다가도, 돌연 동요하고 불가피하지 않은 타협을 하고 심지어 노동자들을 배신하는 것을 종종 보는데, 이것은 특정 정치경향의 지도자들만이 보이는 특징이 아닙니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그런 경향을 보여 왔습니다. 가령 1998~99년의 총파업 철회와 2002년 발전파업 철회는 우파 지도자들이 저지른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결함이나 정치적 성향에서 비롯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노동과 자본 사이의 중재자라는 그들의 사회적 역할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노동조합 관료는 고용주로부터 더 나은 협상안을 받아내기 위해 파업을 이끌기도 하지만, 때로 파업이 안정적 협상을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현장조합원 사이에는 잠재적 갈등이 있는 셈입니다.
이런 점을 인식하지 못하면, 노조 지도자들이 투쟁을 회피하거나 배신하는 것을 단지 개인적 성향이나 정치노선의 문제로 여기고, 그런 인물을 더 용기 있고 좌파적인 인물로 바꾸는 것을 대안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물론 그런 지도자가 그렇지 않은 지도자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나 ‘현장파도 위로 올라가면 국민파 된다’는 경험 많은 노동자들 사이의 우스개 소리에 담긴 촌철살인의 지적을 돌아봐야 합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저희 노동자연대는 노골적으로 타협을 추구하는 우파 지도자보다 투쟁을 하겠다는 좌파 지도자가 훨씬 낫다고 보면서도, 좌우파 지도자들 사이의 차이보다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현장 조합원 사이의 차이가 더 크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장조합원들 자신의 활동을 가장 중시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들[통합진보당]과 함께했고 당면한 직선제 투쟁을 거부했었던 것이 바로 노동자연대였다”며 마치 노동자연대가 통합진보당 소속 노조관료의 이익에 복무한 듯이 얘기하셨는데, 다른 단체를 비난하시기 전에 그 단체의 입장이나 실천을 제대로 알아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정중한 조언을 하고 싶습니다.
노동자연대는, 민주노동당 당원이지만 혁명적 정치에도 귀 기울일 태세가 돼 있는 노동자들을 만나기 위해 몇 년간 민주노동당에 입당하는 전술을 취했었습니다. 이것이 민주노동당 지도부와 같은 노선을 걸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지 않았기에 우리는 전투적인 노동자와 학생들과 대화하고 조직할 수 있었습니다. 노동자연대가 사회주의 강령 삭제 반대, 참여당과의 통합 반대 투쟁을 벌인 것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그때 팔짱 끼고 보면서 반사이익만 기다린 사람들도 있지요.)
노동자연대는 민주노동당 안에서 구청장은 말할 것도 없고 구의원 자리 하나 얻어 본 적도 없는데, 마치 권력을 나누기라도 한 듯이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실소를 자아낼 뿐입니다. 민주노총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주노총 모 지역본부의 집행권을 잡기 위해 통합진보당 세력과 연합하고 있는 것은 좌파노동자회 아닌가요? 이론과 실천의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저희는 통합진보당 세력과 함께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연합을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투쟁적인 대안 세력인지 진지하게 검토하고 지지한 바 있습니다.
직선제에 대해 얘기하자면, 저희 단체는 조합원들이 노동조합의 임원을 선출하고 소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에서 직선제를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직선제 자체가 민주노총에 큰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노동조합 민주주의는 직선제로 환원할 수 없고, 본질적으로 현장 노동자들 자신의 활동이 활성화되고 이 힘으로 지도부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간선제 덕분에 통합진보당 세력이 10년간 재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보는 좌파노동자회의 피상적인 인식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좌파노동자회와 함께 민주노총 위원장실 점거를 했어야만 직선제를 지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지극히 편협한 발상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