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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윤과 분파 동지들은 조직노동자들의 정서와 주장에 귀를 열어야 한다

지난 1월 5일과 26일 토론회에서 ‘민주집중과 단결’ 분파 동지들 중 일부의 태도는 우리 조직노동자 회원들을 아연실색케 했다. 특히 전지윤 동지가 1월 5일 5세션 정리 발언에서 ‘제 글을 잘 읽어 보시라’고 말한 것은 귀를 의심케 할 정도였다.

일부 조직노동자 회원들의 경험, 철도 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하면서 1년 넘게 현장에서 거리에서 부대끼며 배운 젊은 회원들의 경험담은 누가 들어도 감동 그 자체였다. 이런 동지들에게 ‘제 글을 잘 읽어 보시라’고 하는 것은 ‘모욕’과 ‘무시’였다. 우리 회원들, 특히 노동자 회원들을 자신의 글도 읽지 않았거나 읽었다 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심하게 폄하한 것이다.

노동자 회원들에게 260~500쪽이 넘는 자료집이 벌써 세 차례나 도착했다. 이런 자료집을 노동자 회원들이 꼼꼼히 읽는 것은 너무도 곤혹스러운 일이다. 특히 볼셰비키, 멘셰비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 등의 주장을 여기저기 늘어놓은 글들을 보는 것은 더욱 곤혹스럽다.(노동자 회원들이 이론을 경시해도 된다는 주장은 아니다.) 그렇다고 노동자 회원들이 전지윤 분파와 운영위원회 주장의 차이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노동자 회원들 중에 운동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이 다수가 존재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교조 같은 곳에서는 새로운 세대의 노동자 회원들이 운동을 주도하며 큰 성과와 교훈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회원들은 각자 자신의 작업장과 투쟁의 경험 속에서 차이는 있지만 단련된 투사들이다. 누가, 언제, 어떤 주장을, 왜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글을 읽을 때 세세하게 외우지는 못해도 전체의 맥락을 이해하는 것은 빠르다. 그래서 몸으로 배우고 실천하며 터득한 우리 노동자 회원들에게 ‘내 글을 다시 읽으라’고 하는 것은 심한 모욕이고 무시인 것이다.

전지윤 동지가 주장한 통합진보당 방어 문제, 탈당 시점 문제, 노동정치연석회의 참여 문제 등에 대해 거의 모든 노동자 회원들이 동의하지 않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들은 그동안 현장에서 경기동부의 패권적이고 때론 패악적인 행태를 직접 또는 간접으로 수도 없이 경험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통합진보당에 남아 혁명적인 노동자들을 조직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통합진보당 탄압을 방어하지 않는 회원들은 없다. 왜 이런 노동자 회원들의 경험과 정서를 전혀 이해하고 배우려 하지 않는지 너무도 답답할 뿐이다. 특히 전지윤 동지와 오랜 세월 활동해 온 고참 노동자 회원들은 처음에 전지윤 동지의 이런 태도를 안타까워하다가 이제 안타까움이 분노로 표출되고 있는 지경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징계가 과도하다고 생각했던 박재순 건설 노동자 회원은 3차 자료집에 ‘독수리 타법’으로 쓴 글에서 전지윤을 제명하라는 강경한 주장을 한 것이다.

징계가 과도한가?

전지윤에게 ‘자격정지 3년, 단 집행을 4년간 유예한다’는 징계가 과도하다고 생각하는 회원들이 있는 것으로 안다. 특히 전지윤 동지가 그동안 헌신해 온 것을 잘 알고 있는 동지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징계 내용을 보면 징계가 대단히 상징적인 수준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지금 전지윤 동지가 (애초 주장과 전혀 상관도 없는) 조직 내 민주주의 문제를 제기하며 분파를 구성하고 자유롭게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그리고 1월 5일과 26일 이틀 동안 개최된 협의회 사전 토론에서 전지윤 분파는 과도하게도 운영위원회와 똑같은 비율로 발제할 기회를 얻었다. 이는 전지윤 분파의 주장과 달리 금번 징계가 ‘이견을 가로막기 위한 징계’가 아닌 것은 물론이고 전혀 과도하지도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 규율 위반 문제와 전지윤이 그동안 헌신한 문제를 혼동해선 안 된다. 그리고 지도적인 동지라고 우리 스스로가 정한 규칙을 위반해도 된다면 조직 전체에 해악적 사례로 남을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상징적 수준의 징계인데도 전지윤과 최용찬은 ‘조직 내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부당한 징계다’라며 분파를 결성하고, 운영위원회를 비난하고 있다. 이런 태도를 보며 회원들 중 일부에서(점점 다수가 되고 있다) 징계가 너무 약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조합 경험에서 돌아본 민주집중주의

‘민주집중과 단결’ 분파의 이름을 보면 마치 우리 조직의 민주집중주의 실천에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데 오히려 분파 동지들이야말로 과연 ‘민주주의와 집중’이 ‘실전’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조직노동자 회원들은 노동조합 투쟁 속에서 이런 경험을 수도 없이 한다. 일상적인 투쟁을 벌이는 노동조합은 다양한 세력들의 각축이 벌어지는 곳이다. 그래서 노동조합에서 민주주의와 집중은 단순히 형식의 문제가 아니다. 그저 토론을 잘 한다고 구현되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 공장 라인에서 노동자가 다치는 안전사고가 발생했다고 치자. 이럴 때 사측은 “경미한 사고다. 그리고 본인 과실에 의한 것이니 라인을 중단할 수 없다. 라인을 중단하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나온다.(2011년 이후 사측은 안전사고가 발생해도 작업중지권을 완전 무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적 대의원은 “조합원들과 공청회(토론)를 통해 결정하겠다”고 할 테고, 보수적 대의원은 눈치를 보며 시간을 약간 끌다가 사측의 라인 가동을 못이기는 척할 것이다. 그러면 사측은 민주적 대의원을 더 압박하며 “지금 당장 라인을 가동하지 않으면 고소고발 하겠다”고 경고할 것이다.

이때 대의원이 전투적 민주파라면 사측의 협박을 무시한 채 라인을 중단하고 노동자들의 의견을 수렴해 사측과 ‘안전사고 대책회의’를 진행한 이후 조합원들에게 보고하고 라인을 재가동할 것이다. 비교적 간단해 보인다.

하지만 조합원들의 자신감이 없는 상태라면 라인 중단을 둘러싸고 심각한 논쟁이 벌어질 수 있다. 조합원들 중 일부는 사측의 논리를 받아들여 ‘조금 다쳤고 본인 과실이니 라인을 가동하고 대책회의를 하자’고 할 것이다. 중간파 조합원들은 ‘고소고발 하면 대의원이 피해 본다, 억울하지만 다음에 큰 사고가 나면 투쟁을 하자’고 할 것이다. 전투적 조합원들은 ‘안전사고가 발생하면 라인을 중단하고 대책을 세우는 것이 당연하다, 큰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도 사측의 협박에 굴복하지 말고 투쟁하자’고 할 것이다.

이때 지도부인 대의원과 현장의 활동가(사회주의자)가 계속 토론만 하려고 한다면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작업이 재개될 것이다. 지도부인 대의원은 전투적 조합원들의 정서를 강력히 지지하며 표결 처리를 통해 투쟁을 결정해야 한다. 아무리 명망 있는 활동가라 해도 ‘토론과 설득이 최상의 실천’을 이끌어낼 수 있다며 모두가 설득될 때까지 토론을 하자고 한다면 노동자들은 ‘술이 덜 깼나?’, ‘제정신이 아니네!’라며 비난할 것이다.

라인 중단은 곧 사측과 전투(비공인 파업)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이런 전투에서 제때 결정하지 않고 시간을 끄는 것은 패배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패배는 해고와 구속을 뜻하고, 옵션으로 손배가 따라온다.

또 다른 사례를 들어 보자.

2000년 대우차지부는 정리해고가 바로 목전에 닥친 시점인 해고 발표 바로 2~3일 전까지 한 달가량 대의원대회에서 논쟁(토론)만 했다. 그 결과 공장점거 투쟁 시점을 놓쳤고 정리해고가 발표된 지 하루 만에 공장에서 쫓겨나 해고자들만의 힘겨운 싸움을 했다. 이때 대우차 좌파 지도부는 진정한 민주주의 기구가 아니라 투쟁 회피 기구로 전락한 대의원대회를 박차고 나와 현장조합원들에게 직접 투쟁을 호소하고 싸우는 게 더욱 민주적인 방법이고 실천이었을 것이다.

작년 한해 우리 회원들이 노동조합 내의 사회주의자 조직으로 존재하며 규약시정명령 거부 운동을 주도했던 전교조에서 교사회원들의 활동은 또 어땠는가? 교사 회원들의 신속하고 집중된 실천은 분파 동지들의 요구처럼 언제나 ‘회원들의 완벽한 동의 끝에 결정된 행동통일’인 것은 아니었다.

한 사례를 언급해보겠다. 규약시정명령 수용/거부 총투표가 68%의 거부로 끝나고도 전교조 지도부는 그 의지를 모아 연가 파업 등 집단행동을 조직하지 않고 시간을 허비했다. 이에 대한 비판으로 전교조 내 급진좌파인 ‘경기교사현장모임’ 활동가들은 총투표 직후 열린 10/19 전국교사대회에서 ‘1000명 수준의 선봉대 연가파업’ 결의 선언을 받자고 제안해왔다.

이 선언에 대한 참여 여부를 두고 초기에는 교사 간사들 사이에 이견이 있었다. 선봉대 수준으로 연가투쟁을 제한한 점이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에는 모두 동의했지만, 현장 조합원들의 ‘연가파업 결의 선언’이 지도부에게 압력을 형성할 수 있다는 혼란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서명은 이미 총투표에서 법외노조화 위험도 무릅쓰고 투쟁하고자 하는 결의를 밝힌 조합원들에게 투쟁 의사를 다시 묻는 것이었다. 게다가 지도부가 파업을 조직할 책임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기도 했다. 사실 규약시정명령을 거부한 조합원들이지만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는) 지도부가 조직하지도 않는 연가파업을 감행할 정도로 자신감이 높은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전교조 지도부에게 전체 조합원 연가파업을 조직하라고 호소하는 것이 개별 조합원 몇몇이 연가파업을 선언하게 만드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인 전술이었다.

그럼에도 선언 참여에 대한 이견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교사대회를 하루 앞둔 상황에서 간사팀은 입장을 결정해야 했고 토론 끝에 간사들은 선언을 받지 않고, ‘지도부가 전체 조합원 수준의 연가파업을 조직해야 한다’는 선동을 하기로 결정했다. 교사회원들은 이 같은 내용을 〈벌떡교사들〉 호외에 실어 전국교사대회 참가자 1만여 명에게 배포해 지도부에게 압력을 넣었다. 결과적으로 연가파업이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아래로부터 압력을 받은 전교조 지도부는 전교조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여러 차례 연가파업을 논의한 바 있다.(전교조 중앙집행위원회는 전국 16개 시도 지부장과 위원장, 수석부위원장 등 본부 임원으로 구성되어 있고 당시 연가파업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단위였다.) 교사모임은 ‘전체 조합원 수준의 연가 파업’에 동의하는 진지한 투사들로부터 지지를 얻었고 그 결과로 〈벌떡교사들〉 정기구독도 늘어났다.

반면, ‘선봉대 연가투쟁 선언’은 6만여 명의 전교조 조합원 중 불과 몇 십명만 참여하고 압도 다수의 조합원들은 그런 내용조차 알지 못할 정도로 영향력이 미비했다. 간사팀 다수의 견해가 옳았음이 실천에서 입증된 것이다.

일부 이견에 대한 끝없는 토론에 매몰되지 않고, 간사팀이 신속하게 입장을 정하고 행동을 통일한 결과 운동에 의미있는 영향을 미치고 집중된 실천에 대한 정치적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설령 간사팀 다수의 결정이 사후적으로 오류였음이 드러났을지라도 집단적 실천을 통해서 정치적으로 평가하는 과정은 우리가 그로부터 교훈을 도출하고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지도적 위치의 회원도 결코 행동 통일에 예외일 수 없다. 당시 교사모임 책임간사의 경우 선언 참여에 대한 이견이 완전히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경기교사현장모임’의 연락자에게 교사모임이 선언에 동참할 수 없는 공식 이유를 전달하고 행동을 통일한 바 있다.

그런 점에서 전지윤 동지가 운영위, 일꾼회의, 기자팀 회의에서 단 한 명의 지지도 얻지 못한 이견을 이유로 〈레프트21〉 편집장을 사퇴한 것은 진정한 의미의 행동통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수가 부차적으로 여기는 이견에 대한 ‘끝임없는 토론’을 위해 정작 행동통일을 위한 결정을 하지 못했다면 교사회원들은 결코 투쟁 속에서 신속하게 개입하고 정치적 지도력을 획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전지윤과 분파 동지들의 요구는 이런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철도 파업 등 전체 노동계급에게 매우 중요한 계급투쟁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에서 부차적인 사안에 대한 끊임없는 토론은 훨씬 더 위험한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조직노동자인 우리가 전지윤과 분파 동지들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위와 같은 경험을 일상적으로 하는 조직노동자 회원들에게 그저 토론이 최선이다, 모두 설득되기 전에는 진정한 행동통일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선택과 집중, 실천과 평가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철도 파업 당시 ‘통진당 방어’와 ‘민주주의’ 논쟁을 하고 있었다면, 이런 일들을 일상처럼 경험하고 있는 남한 노동계급의 전투적 부위의 눈에 우리가 ‘한가한 분들 수다 떠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운영위원회의 협의회 연기 결정에 회원 절대 다수가 지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상수 동지의 말처럼 ‘바닥내기’ 공세를 위한 ‘음모’가 아니라는 말이다.

투정인가 책임인가?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의 온갖 경험 중 최상의 것을 종합해서 전술 전망을 제시하는 책임도 져야 한다. 책임이란 분파 동지들이 주장하듯이 이 투쟁도 중요했다가 저 투쟁도 중요했다가 하는 식으로는 결코 질 수 없다. 책임은 일종의 베팅이고 집중이다.

전지윤과 분파 동지들이 진정으로 혁명이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이라고 믿고 그에 복무하고자 한다면, 우리 조직노동자 회원들에게 본인들의 주장이 왜 ‘투정’처럼 들리는지 생각해 보고 귀를 열어야 한다.

모르는 것은 서로 배우면 된다. 하지만 귀를 막고 자신의 주장만 반복하며 옛 혁명가들의 말이나 늘어놓는 방식으로는 그 어떤 노동자들과도 대화하기 힘들 것이다. 우리 조직 안에서조차 조직노동자들의 충언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서 ‘계급에게 진실을 말해야 한다’거나 ‘노동자 계급의 자기해방’ 같은 말을 입에 올리는 것은 사치스럽게 들린다. 바로 지금 분파 동지들은 자신의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든 모르든, 혁명정당의 건설과 노동계급 투쟁의 전진을 가로막는 역할을 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분파 동지가 1월 26일 정리 발언에서 다수파가 ‘승리를 자축할 것’이라는 식으로 말한 것은 너무도 무지하고 마음 아픈 발언이었다. 그날 뒤풀이에서 한 노동자 회원은 눈물을 터뜨리며 지금의 사태를 슬퍼하며 전지윤 동지의 이탈을 안타까워했다.

이게 노동자 회원들의 심정이다. 제발 이런 동지들의 간절한 마음을 배신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기 바란다. 지금 우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시간을 가지고 쉬면서 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조직노동자 회원들은 ‘민주집중과 단결’ 분파에 다음과 같이 강력히 주장한다.

  1. 조직의 규칙은 장식용이 아니다. 지도적 회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돼야 한다. 전지윤 동지에 대한 징계는 당연하다. 지금의 징계 수위가 상징적 수준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 노동자 회원들은 잘 알고 있다.
  2. 전지윤 동지와 분파는 조직이 비민주적인 양 왜곡하지 말라!
  3. 전지윤 동지와 분파 회원들이 진정으로 노동자 중심성을 이해하고 싶다면 일선에서 끊임없이 전투를 치르고 있는 우리 조직노동자 회원들의 진심어린 충언을 가슴 깊이 새겨 보길 바란다.

2월 16일

노동자연대 조직노동자 회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