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 윤리라는 게 있는가?
〈노동자 연대〉 구독
근래 우리는 좌파의 일부 개인과 단체들이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듯이 행동하며 노동자연대를 음해하는 일을 겪었다.
노동자연대 운영위원 최일붕은 최근의 온라인 기사 ‘정치적 왕따 만들기는 좌파라면 절대 사용해선 안 되는 수단이다’에서 왜 그런지를 다뤘다.
그는 이 글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윤리라는 게 있고, 마르크스주의는 도덕적 상대주의를 거부한다고 주장한다.
‘윤리’ 하면 흔히 추상적인 보편 윤리를 떠올린다. 살인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하지 마라. 효도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등등.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윤리는 바로 이 같은 도덕적 제약 조건들에 관한 것이다.
보편 윤리를 대표하는 이론인 칸트 윤리학의 대전제는 욕구와 의무의 이분법이다. 이에 따르면, 윤리는 욕구를 억제할 의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런 윤리는 다른 모든 근대 윤리와 마찬가지로, 이기적 개인들로 이뤄진 사회 속에서 공동선(공익)을 어떻게 명확히 표현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 답변하려는 시도다.
이런 시도는 오늘날 다시 공명을 얻고 있는데, 주로 신자유주의 때문이다. 오늘날 국가와 교육과 언론은 사람들에게 주로 소비자라는 자각을 심어 주려 하고, 성공한 인생을 많은 소비재를 살 능력과 똑같은 것으로 본다. 탐욕이 미덕인 양 찬양·고무된다. 욕구 대 (그것을 이겨 낼) 의무라는 이분법이 다시 유행하는 이유다.
그러나 칸트 윤리학을 포함해 일반으로 자유주의 윤리는 계급투쟁으로 사람들의 가치관이 변한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저 욕구를 이겨 낼 의무라는 윤리 원칙만을 제시할 수 있는데, 그나마 형편이나 경우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다소 변동될 수 있는 다소 유동적인 원칙이다.
불확실성과 유동성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더니즘·포스트구조주의는 이 유동성을 상대주의에 가깝게 증폭시킨다.
학교(칸트식) 윤리와 달리 마르크스주의는 추상적 윤리를 설교하지 않는다. 특히 《독일 이데올로기》와 《고타 강령 비판》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도덕주의(훈계)를 싫어한다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자본주의의 파괴적인 효과들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의분(義憤)은, 직접 표현되지 않더라도 그들의 정치적·경제적 저술들 곳곳에 내포돼 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 윤리는 그들의 저작 속에 함축된 윤리적 코드를 풀어야 밝혀질 것이다.
윤리는 인간의 필요와 욕구로부터 발전해 나왔지만(아리스토텔레스), 인간 본성은 고정불변이 아니라 역사적인 것이므로(마르크스), 윤리 관념과 규범은 역사적이다.
윤리 규범이 역사나 사회 바깥에서 생겨나지 않았으므로 윤리 규범은 사회마다 다르다. 그래서 어느 사회에서 용인되는 행위가 다른 사회에서는 용인되지 않을 수 있다. 가령 동성애는 고대 그리스에서는 전혀 문제시되지 않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대개 용인되지 않는다. 또, 고리대금업은 서양 중세 사회에서는 비윤리적인 행위였지만, 오늘날에는 금융 투자라며 장려된다.
윤리 규범은 또한 계급이나 사회집단에 따라 다르다. ‘대체인력’은 사용자에게는 좋은 일을 하는 것이지만, 파업 노동자들에게는 나쁜 짓을 하는 것이다. 폭력과 거짓말은 잘못이라지만, 지배계급의 처지에서 보면 경찰의 파업 파괴와 집회 강제 해산은 폭력이 아니라 ‘공’권력이고, 정부의 공무원연금 삭감 계획은 기만이 아니라 하나의 ‘개혁안’으로 진중하게 고려된다. 국가가 다른 국가와의 전쟁에서 교전국 시민들과 병사들을 폭격하는 행위는 언론에서 살인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윤리 규범의 이러한 구체적 맥락 문제와 관련해 주로 목적과 수단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상주의자의 목적과 수단
구체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 추상적 윤리는 목적이 옳아도 수단은 수단대로 그 옳고 그름이 판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목적과 수단 둘 다 옳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상황에서 수단은 추구하는 목적을 미리 구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추상적 윤리는 이상주의적이 된다.
이상주의 윤리는 일부 아나키스트들 사이에서 지지를 받는데, 이들은 좌파가 속임수와 폭력을 사용해선 결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 수단을 통해 변화시킨 사회는 전과 마찬가지로 부패하고 불공평하고 비민주적이고 억압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상주의 윤리는 비현실적이라는 명백한 난점이 있다. 예컨대 터무니없이 ‘종북’으로 몰려 지명수배를 받고 있는 사람을 당신이 숨겨 주고 있다고 가정하자. 어느 날 경찰 상부로부터 지역 탐문수사를 지시받은 인근 파출소 경관이 간첩 신고를 명분으로 호별방문을 하다가 당신 집 문을 노크한다. 그리고 당신에게 ‘혼자 사시냐’고 은근히 떠보는 질문을 하면서 집 안쪽을 살펴본다. 이때 당신은 진실을 말해야 하는가? 거짓말하는 게 싫어 침묵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 구체적 상황에서 묵비는 공연히 의심만 더 살 것이다.
트로츠키도 이상주의 윤리를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례들을 든다.
“전쟁에서 아군의 ‘진실’을 적군에 폭로하는 군인은 스파이 행위로 처벌받는다.”
“파업 참가자들에 관한 ‘진실’을 사용자나 경찰에게 숨기지 않는 노동자는 경멸과 경원시를 당해도 싼 배신자일 뿐이다.”
“독일 프롤레타리아가 히틀러의 경찰을 속이지 않아도 될까?”
“스페인 내전 상황에서 파시즘의 승리를 원하지 않는다면 이 전쟁의 폭력에 관여하는 것만이 윤리적인 일이다.”
“[민주주의와 프랑스 혁명의 관계를 사례로 들어] 민주주의는 결코 민주주의적 길을 통해 탄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혁명적 폭력, 심지어 공포를 통해 탄생했던 것이다.” (《그들의 도덕과 우리의 도덕》, 1938년.)
이상주의와 달리 마르크스주의는 혁명적 미래를 미리 구현하기 시작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혁명이 계급 사회의 산물이고 따라서 그 흔적을 지닌다는 점을 명확하게 알기 때문이다.
실용주의자의 목적과 수단
이상주의 윤리와 대조되고 흔히 마르크스주의 윤리와 혼동되는 것이 실용주의 윤리다. 실용주의 윤리는 윤리 규범을 위한 준칙으로서 영구불변의 진리에 기대지 않고, 행위의 결과에 따라 판단한다. 실용주의 윤리에서 행위자의 동기와 의도(선의냐 악의냐)는 중요하지 않고, 행위의 객관적 결과나 효과, 영향이 중요하다.(아래에서 보겠지만, 마르크스주의자는 둘을 분리시키지 않고 둘을 잇는 끈을 제시한다.)
그래서 실용주의 윤리는 목적이든 수단이든 양심이나 윤리 관념, 영원한 진리 따위로 정당화될 수 없고 오직 실제 결과로만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본다. 수단의 좋고 나쁨은 오직 그 실효(實效)로만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는 착취가 결과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생산물 일부를 탈취하고, 노동자 계급을 억압하므로 그릇된 일이라고 봤다. 또, 폭력은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 결과가 유익하지 않고 유해하므로 나쁘다고 봤다.
하지만 결과에 관심을 집중시키느라 폭력의 원인이 착취와 이를 위한 억압이고, 착취의 원인이 자본 간 경쟁이라는 점을 놓치면, 착취와 폭력 비판은 추상적인 훈계에 불과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도덕주의적 설교는 폭력의 사회적 원인에 대한 유물론적 인식과 진정한 해결책 발견을 방해한다.
실용주의 윤리에 근거한 듀이의 폭력 비판, 혁명 비판에 맞서 트로츠키는 노동자 계급 혁명이라는 ‘폭력’(수단) 말고는 거짓과 폭력이 필요 없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목적)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설명한다(앞서 언급된 책).
실용주의 윤리는 또한 목적과 수단을 분리시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본다. 그러나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가 말했듯이, “목적과 수단의 기계적 분리는 인간 해방이 아니라 인간 조종에 적합하다.”(‘이성의 질곡에서 벗어나기’, 1960년). 그래서 미래의 이상향을 제시하며 현재의 야만 상태를 정당화하는 구실을 할 수 있다. 스탈린주의자들이 이런 식으로 옛 소련 체제와 현 북한 체제를 합리화하(했)고, 자유주의자들과 주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런 식으로 자본주의와 그것의 단편적 개혁을 합리화한다.
마르크스주의자의 목적과 수단
지금까지 봤듯이, 언제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실용주의)도 아니고, 언제나 목적과 수단이 일치해야 하는 것(이상주의)도 아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자가 사용해도 되는 수단과 사용해서는 안 되는 수단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어떤 수단이 허용되고 어떤 수단이 불허되는지 그 기준은 무엇인가? 달리 말해, 똑같은 행위(또한 행위자)에 대한 모순된 판단이 공존하는 상황에서 확실한 윤리 규범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런 상황에서 마르크스주의자는 판단을 그저 양심에 맡길 수 없다. 양심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자라면서 옳고 그름을 혼동해 온 과정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뭔가 객관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는 그런 근거가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즉 노동자 계급 자기해방 투쟁이라고 주장한다. 이하에서 이 점을 설명하고자 한다.
노동자들이 그들의 필요(임금 인상, 노동조건과 생활조건 개선)를 위해 싸우면, 공동으로 행동하는 것 자체도 그들이 필요로 하고 간절히 바라는 것이 된다. 노동자들의 집단적 투쟁으로 나타날 노동자 연대가 노동자들의 필요이자 욕구가 되는 것이다.
노동자 투쟁에 참가하면서 노동자 연대를 위해 애쓰는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운동가들은 그 속에서 필요에 따른 삶과 가치에 따른 삶의 통일을 느낄 수 있고, 필요와 가치가 충돌하는 상황(즉, 소외)의 극복을 위해 조직할 줄도 알게 된다.
바로 이 과정에서 선악(善惡)과 정사(正邪)를 구별할 확고한 근거와 개인 행동의 판단 기준도 세울 수 있다. 특히, 개인주의가 어떤 경우는 유쾌한 개성 만끽인 반면 어떤 경우는 단체 활동 혼란이나 투쟁 교란의 원인인지를 배워 갈 수 있다.
이런 과정으로부터 형성되는 윤리, 즉 마르크스주의 윤리는 노동자 계급의 필요와 투쟁에서 등장한다는 점에서 ‘내재적’이고, 노동자와 인류의 현재 삶을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낳는다는 점에서 ‘초월적’이다. 또한 이런 과정은 괴리됐던 ‘존재’와 ‘당위’가 통일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요컨대 노동자 계급 자기해방 투쟁이야말로 정당한 목적과 정당한 수단을 연결시키는 확고한 끈이 될 수 있다. 이상주의에도 실용주의에도 빠지지 않게 해 주는 지침 말이다.
그래서 노동자 계급을 분열시키는 수단(가령 중상모략과 음해 등)은 비윤리적이라고 트로츠키는 강조한다.
“어떤 수단들이 허용되고 의무적이냐 하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를 결속시키고, 그들의 마음을 차별에 대한 화해 불가능한 적대로 채우고, … 그들의 역사적 사명에 대한 의식으로 채우고, 그들의 용기와 자기희생 정신을 북돋는 수단들, 오직 그런 수단들만이 허용되며 의무적이다.
“바로 이로부터 모든 수단이 허용되는 건 아니라는 점이 도출된다. … 혁명의 위대한 목적은 노동자 계급의 한 부분과 다른 부분을 서로 반목케 하거나 … 대중이 자신과 자신의 조직에 대해 갖는 믿음을 떨어뜨리는 비열한 수단과 방법은 거부한다.” (위에서 언급된 책)
노동자 계급 자기해방과 이를 위한 노동자 연대.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자에게 각각 목적과 수단인 것이다. 물론 노동자 연대는 당면한 구체적 상황들 속에서는 그 자체로 목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노동자 계급 자기해방은 인류 해방이라는 최종 목적에 대해서는 수단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