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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신문 - 안토니오 그람시의 〈신질서〉

“노동자들이 〈신질서〉를 좋아한 이유는 〈신질서〉에서 자신들의 이야기, 자신들의 최상의 부분을 발견했기 때문이고, 자신들의 투쟁을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찾을 수 있는가?”

1920년 8월 이탈리아의 혁명적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는 28살의 나이에 이렇게 썼다.

그는 자신을 포함한 네 명의 청년 지식인들이 1919년 5월 토리노에서 창간한 주간 신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탈리아 역사상 최대의 격변기에 〈신질서〉를 창간했다.

당시 유럽 전역에서는 제1차세계대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하층 계급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었다. 거의 모든 곳에서 대규모 파업들이 벌어졌고 노동자들과 지배계급이 충돌했다.

러시아에서는 노동자·농민 평의회(소비에트)에 기반을 둔 혁명적 사회주의 정부가 18개월 째 집권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사상 최대의 파업 물결이 전국을 휩쓸고 있을 때, 농민들은 토지를 점거했고, 병사들은 또다시 알바니아와의 전쟁에 나가 싸우기를 거부했으며, 전역 장병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노동자들 사이에서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기대가 널리 퍼져 있었다.

새로운 신문은 이런 분위기를 포착했다.

〈신질서〉에는 미국인 저널리스트 존 리드와 영국인 작가 아서 랜섬이 쓴 혁명 러시아에 관한 소식이 실렸다.

레닌·트로츠키·부하린·지노비예프가 쓴 기사들뿐 아니라 프랑스·독일·영국(실비아 팽크허스트가 쓴)의 노동운동 소식들도 실렸다.

또, 신문에서는 당대회, 선거 결과, 혁명 전략과 전술을 둘러싼 토론들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신질서〉의 진정한 설득력은 다른 데서 나왔다.

〈신질서〉는 도시 노동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토론의 광장이 됐다. 노동자들이 사회를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구체적 조직 형태, 지배계급과 국가에 맞서 모든 노동대중을 단결시킬 노동자 평의회를 건설하기 위한 방안 등이 그런 토론의 주제였다.

이것은 노동계급 조직의 기존 지도자들이 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탈리아에는 강력한 사회주의 운동이 존재했고,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이탈리아 사회도 좌경화하고 있었다.

10년 전에 사회당 지도자들은 협소한 의회주의 방식에 몰두한 개혁가들이었지만, 이제 그들은 말로는 혁명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실천하려 하지는 않았다.

〈신질서〉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탈리아의 가장 중요한 산업도시인 토리노에서 진정으로 혁명적인 방법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처음 몇 달 동안 신문 판매부수는 고작 한 달에 3천5백 부 정도였다. 그러나 곧 그람시와 그의 동료들은 중요한 것을 파악했다.

토리노의 공장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일상 투쟁에서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진 노동조합 상근 간부들이 아니라 현장에서 선출된 대표자들, 이른바 “공장위원들”을 점점 더 신뢰하게 됐다.

공장위원들은 먼저 토리노에서, 그 다음에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노동계급 전체를 단결시킬 조직들을 건설하는 토대라고 그람시와 그 동료들은 생각했다.

공공연하게 혁명이 논의되는 상황에서 공장에 기반을 둔 이런 조직들은 단결한 노동계급이 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람시와 동료들은 여러 기사에서 이 점을 거듭거듭 강조했다. 이미 노동자들은 그들이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선출하는 방법과 그들이 그런 신뢰를 배신한 순간 선거를 무효화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러시아의 소비에트 비슷한 것을 만들어 낼 비결은 그런 경험을 심화하고 확대하는 데 달려 있었다.

투쟁을 건설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는 것에서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데까지 나아갈 방안을 찾기 위해 온갖 고민을 거듭해 온 노동자들 사이에서 그런 기사들이 반향을 얻었다.

1920년 11월 1일 〈신질서〉는 5만 명의 노동자들을 대표한 25개 공장 대표자들의 회의에서 그런 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어떤 토론이 벌어졌는지 보도했다.

그 다음 주 신문에 토리노 공장평의회 제1차 총회 프로그램이 실리자 신문 판매부수는 1만 부까지 치솟았다.

그람시는 탁월한 대중연설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뒤 몇 달 동안 여러 공장에서 그람시를 계속 초청했고, 여러 활동가 그룹들이 그람시를 초청해 이탈리아에서 소비에트 건설 방안에 대한 주장을 들었다.

종종 그는 하루에 세 번씩 모임에 나갔을 뿐 아니라, 신문을 편집하고 여러 기사들을 쓰기도 했다.

낡은 의회주의 방식이 이탈리아 사회주의에 미치는 영향력은 약화되고 있었지만, 〈신질서〉의 노력으로도 그것을 완전히 분쇄할 수는 없었다.

1920년 여름 거의 모든 이탈리아 공장들을 점거한 결정적 전투가 벌어졌을 때,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그것을 여느 노동쟁의와 마찬가지로 취급했다. 즉, 고용주들과 대충 타협해 투쟁을 끝내버린 것이다.

그리고 사회당 지도부는 온갖 혁명적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쓰라린 패배가 뒤따랐다. 실업률이 증가해 노동자들의 사기가 떨어졌고, 2년 뒤 국왕[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은 파시스트인 무솔리니에게 권력을 넘겼다.

그 직후에 과거를 돌이켜 본 사람들은 〈신질서〉 주변에 건설된 운동이 대안을 제시했음을 깨달았다. 즉, 이탈리아 전체로 확산됐다면 승리를 가져왔을 대안 말이다.

파시스트 독재자 무솔리니는 자신의 가장 강력한 적이 그람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람시의 “두뇌 활동을 중단시키기” 위해 그를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