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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 혐오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미국 올랜도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이용해 미국 지배자들은 무슬림 혐오를 부추기려 한다. 이런 상황에서 무슬림 혐오가 어떻게 생겨났고 무슨 기능을 하는지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 기사는 파키스탄 출신의 저명한 반전 운동가이자 《뉴 레프트 리뷰》의 편집자였고 《근본주의의 충돌》 등을 쓴 타리크 알리가 2010년 7월 초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이 주최한 ‘맑시즘2010’에서 ‘무슬림 혐오의 위험성’을 주제로 한 연설을 번역한 것으로, 본지 2010년 7월 17일자에 실렸다. 현재 상황에도 유용하리라고 판단해 교정·교열을 봐 다시 싣는다.

우리는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다. 30~40년 전에 누군가가 이슬람이나 종교를 주요 토론 쟁점이라고 말했다면 사람들은 웃었을 것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냉전기 동안 제국주의 나라들(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전 세계에서 자신의 적에 맞서는 방어벽으로 정치적 이슬람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슬람’을 자처하는 조직들을 이용해 자신의 적을 공격했다. 미국은 중동의 세속적 민족주의, 인도네시아의 공산주의, 남아시아(유일한 사례는 아니지만 주로 파키스탄)의 급진화 물결에 맞서 이슬람 조직들을 이용했다.

타리크 알리는 파키스탄 출신의 저명한 반전 운동가이자 《뉴 레프트 리뷰》의 편집자였다. 타리크 알리의 주요저서 중 《근본주의의 충돌》 (이토), 《1969》 (삼인)과 이슬람 소설 3부작 《술탄 살라딘》 (미래인)과 《석류나무 그늘 아래》 (미래인) 등이 국내에 번역돼 있다.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지금의 사태를 바라봐야 한다. 무슬림 혐오는 이른바 ‘새로운 적’에 맞선다는 과정에서, 특히 서구 세계에서 인위적으로 창조된 것이다.

무슬림 혐오는 ‘고급 정보’가 있다는 고위층 인사들이나 극우가 위로부터 만들어 낸 것이다. 그들은 이민자를 반대하는 데 무슬림 혐오를 이용한다.

무슬림 혐오의 양상은 다양하고 우리는 다양한 측면에서 그것에 도전해야 한다.

무슬림에 반대하는 이른바 ‘대중적’ 여론 문제부터 살펴보자. 내 생각에 이 정서는 근본주의나 ‘이슬람 테러리즘’에 대한 반감과는 상당히 다른 정서이다. 오히려 이 정서는 다른 문화 출신자, 특히 제2차세계대전 뒤 유럽으로 유입된 이민자들에 대한 적대감과 관계있다.

이민자에 반대해 이용되는 주장들은 20세기의 첫 50년 동안 유대인에 반대해 이용된 주장과 상당히 닮았다: 그들은 우리와 다르다, 그들은 다른 문화 출신자이다, 그들은 종교가 다르다, 그들은 안식일이 다르다, 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들은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는다, 등등.

오늘날에는 매우 유사한 주장이 무슬림을 배척하는 데 동원된다. 그들은 우리와 다르다, 그들은 ‘타인’이다.

이슬람과 테러

반복해서 제기되는 쟁점은 테러리즘이다. 나는 이슬람과 테러리즘을 연결시키는 생각이 영국에서 얼마나 깊이 자리 잡았는지를 보여 준 최근의 여론조사 결과에 깜짝 놀랐다. 그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51퍼센트는 ‘무슬림’이라는 말을 들을 때 맨 처음 떠오르는 단어가 ‘테러리스트’라고 답했다. 여론조사 결과는 결코 신뢰할 수 없는 것이지만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다.

이런 여론조사가 1920년대나 1930년대에 실시됐다면, 사람들은 십중팔구 ‘유대인’이라는 말을 들을 때 맨 처음 떠오르는 단어가 ‘볼셰비키’라고 답했을 것이다. 오늘날은 ‘유대인 볼셰비키’가 아니라 ‘무슬림 테러리스트’라는 점만 다르다.

당시 평범한 유대인은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유대인은 볼셰비키이거나 백만장자이거나, 둘 중 하나로 여겨졌다.

오늘날에는 무슬림에 관해서 같은 주장이 흔히 제기된다. 무슬림은 런던 사교클럽의 카지노에서 도박하며 자기 나라의 국부를 탕진하는 부유한 아랍 왕자이거나(분명히 그런 사람들은 있다) ‘무슬림 테러리스트’이거나, 둘 중 하나로 여겨진다.

세계의 모든 집단이 그렇듯이, 이슬람 지역 출신자 중에는 이 양극단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매우 다양한 평범한 사람들이 있다. 이슬람 지역 출신자이더라도 무슬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혐오의 표적이 된다. 이런 무차별 표적 삼기는 문화적 형태의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신앙심이 깊지 않으면서도 히잡을 착용하는 많은 젊은 여성과 대화해 봤다. 그들은 착용하지 말라는 말을 들어서 히잡을 착용한다. 특히 [정부가 세속주의를 내세워 히잡 착용을 체계적으로 단속하려 드는] 프랑스에 그런 여성이 많다.

제2차세계대전 동안 유대인들이 겪은 일에 관해 서유럽인들이 어떤 내용의 교육을 받는지 생각해 보라.

그런 교육이 뇌리에 얼마나 깊이 각인됐는지, 심지어 일부 어리석은 정치인들, 예컨대 토니 블레어[1997~2007년 노동당 총리]는 제2차세계대전이 ‘유대인을 구하기’ 위한 전쟁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무식함과 천박함에 치가 떨릴 지경이다. 제2차세계대전이 유대인을 구하기 위한 전쟁이었다면, 그 전쟁에서 우리는 졌다.

그들은 유대인을 구하지 못했다. 그들은 단 한 곳의 강제수용소에도 폭격기를 보내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폭격을 요청했는데도 말이다. 독일 파괴라는 주요 임무에서 폭격기를 이탈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배우는 내용은 너무 피상적이어서 유대인 차별의 기원은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 유대인 차별의 기원을 배운다면 사람들은 오늘날 다른 소수자들이 유대인과 동일한 방식으로 차별받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교육은 명백히 없었다.

이슬람은 유럽 역사와 관계없는 종교나 문화가 아니다. 내가 쓴 《이슬람 5중주》는 이슬람이 유럽 문화의 정상적이고 중요한 일부였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이슬람이 지적으로 대단히 발달한 문화였음을 보여 주는 역사 소설이다.

15~16세기에 이베리아 반도[오늘날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무슬림과 유대인들이 추방당하면서 유럽에서 새로운 정체성이 생겨났다. 오늘날 이 정체성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자리를 구하고자 하는 무슬림들(주로는 과거 서방 강대국들의 식민지였던 나라 출신)의 새로운 유입에 의해 도전 받고 있다.

이슬람과 여성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이슬람을 쉴 새 없이 비방하는데, 우리는 이에 저항해야 한다. 한때 좌파였던 사람들 중 일부는 국제 엠네스티가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감된 [무슬림] 정치수를 방어한다고 비판하면서, 그 정치수들이 페미니즘을 대하는 태도가 고약하다고 말한다. 설사 그렇더라도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은 논쟁하면 되는 문제이다.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감된 정치수들이 겪는 고충을 밝힐 기회조차 주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예컨대 독일 녹색당의 많은 당원들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여성을 해방시킬 것이므로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제 진실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제2차세계대전이 히틀러에게서 유대인들을 해방시키는 전쟁이 아니었듯이, 아프가니스탄 전쟁도 여성을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이 아니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여성을 해방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서방의 이익을 지키고 방어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물론 나라마다 무슬림 혐오의 상황은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유럽 상황은 알고 있다. 독일은 이민자들을 ‘손님 노동자’라고 부른다. 이 말은 괜히 쓰는 것이 아니다. 손님이라면 언제든 떠나라는 요구를 받을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이민자들이 프랑스 시민의 권리를 모두 보장받는다고들 한다. 그러나 일자리를 구할 때는 차별받는다.

프랑스에서 경찰이 이민자들을 공격하고, 때로는 그 공격이 살해로 이어질 때, 프랑스에 잘 통합된 젊은 이민자들은 다른 프랑스인들이 탄압당할 때 하는 행동을 따라한다. 그들은 재산을 공격하고 바리케이드를 쌓고 스스로를 방어한다. 프랑스 역사는 이런 행위들을 빼고 논할 수 없다.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다. 오늘날 미국에는 히스페닉과 무슬림이라는 두 종류의 새로운 이민자 집단이 있다. 그러나 무슬림 혐오는 9·11 공격 이후에 크게 강해졌다.

FBI는 이민자 사회에 첩자를 심어 이민자들을 늘 감시한다. 젊은 이민자들은 툭하면 검문을 당한다. 이 모든 것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똑같은 일이 영국에서도 벌어진다.

영국에서는 의회에도 무슬림이 있고 좌파 단체에도 무슬림이 있다.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하는 일이다. 그 어떤 집단도 내부에 차이가 없이 균질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2005년 6월 런던 폭탄 테러 후에 우리는 ‘이슬람, 이슬람, 이슬람, 이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 신노동당의 네오콘 추종자들은 이슬람에 폭력이 내재해 있다고 주장했다. 테러가 난 바로 다음날, 나는 테러를 옹호할 수는 없지만 테러의 원인을 이해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테러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테러의 원인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을 돕기로 결정한 블레어의 외교 정책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영국과 미국의 정보 기관들도 모두 비슷한 지적을 한다.

무슬림 혐오는 정부 당국자들에게 유용하다. 국민들을 계속 불안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무슬림 혐오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자행되는 잔혹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수감자들이 말하듯이, 관타나모 수용소의 상황도 끔찍하지만, 아프가니스탄 카불 외곽에 있는 바그람 감옥의 상황은 훨씬 더 끔찍하다.

무슬림 혐오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무슬림 혐오는 끔찍하지만 당신은 우리가 그리 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당신도 무슬림이 어떤 자들인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주류 언론은 이런 주장을 받아들여 꽤나 공개적으로 이용한다. 미국의 전쟁과 점령, 그리고 유럽 지배자들이 이를 지지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말이다.

버락 오바마는 전 세계에서 부시의 정책을 계속 따라하고 있다.

무슬림 혐오가 영원히 계속될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무슬림 혐오는 위로부터 생겨난 것이고 적절한 때가 오면 다시 사라질 것이다.

무슬림 혐오는 현재 미국이 중동의 넓은 지역을 점령하고 있다는 점에 정치적 근거를 두고 있다. 이 나라들을 점령하려면 무슬림 혐오가 필요하다. 미국에게는 ‘테러와의 전쟁’이 ‘악’에 맞선 전쟁이라는 관념이 필요하다.

무슬림 혐오에 맞설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 사회주의자는 무슬림 혐오라는 현상에만 맞서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또 다른 임무도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는 비합리적이고, 소수의 이익을 위한 것이고, 위기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사람들에게 설득해야 한다.

우리는 사회민주주의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굴복한 것이 재앙이었다고 주장해야 한다. 사회민주주의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굴복하며 생긴 공백에서 다양한 대안적 경향들이 자라나고 있다. 우리는 오늘 우리가 심은 나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공장, 농장, 마을, 지역, 나라 등 모든 수준에서 대중이 진정으로 주권을 행사하는 사회를 바란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사회주의다. 그리고 이런 사회를 통해서만 옛 사회의 낡은 것들이 일소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