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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과 이상주의의 상징 체 게바라

지난 1월 브라질 세계사회포럼에서 《체 게바라와 쿠바혁명》(책갈피)의 저자 마이크 곤살레스를 만나 오늘날 체 게바라 부활의 의미를 들었다. 마이크 곤살레스는 스코틀랜드 사회당(SSP)내 ‘소셜리스트 워커 플랫폼’의 리더다.

체 게바라는 오늘날 세계적으로 저항의 상징이 됐습니다. 얼마 전에 상영된 월터 살레스 감독의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한국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체 게바라에 대한 관심이 부활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난 5년 동안 반자본주의 운동에서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다양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운동이 하나의 공통된 상징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인 듯합니다.

여기 포르투 알레그레 세계사회포럼에서도 두 명 당 한 명꼴로 체 게바라 티셔츠를 입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계사회포럼에서만이 아닙니다. 1990년대 중반 이탈리아에서 젊은 학생들이 투쟁했을 때, 그들은 체 게바라 티셔츠를 입고 로마 거리를 행진했습니다.

사람들이 [1999년에]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 아시아, 북미에서 시애틀로 갔을 때, 그들은 체 게바라가 그려진 초상을 갖고 갔습니다.

따라서 체 게바라는 매우 중요한 무엇인가를 대표합니다. 1990년대 동안 신세대를 대상으로 한 여러 권의 체 게바라 전기가 출간됐습니다. 나는 이 전기들이 또한 게바라를 기억하는 세대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책들은 나처럼 게바라와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을 위한 체 게바라를 담고 있습니다.

신문과 대중 매체는 게바라가 일종의 상표, 상업 상표라고 말합니다. 게바라 티셔츠를 입는 것은 나이키나 아디다스를 입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모임과 토론회에서 사람들이 그러한 말을 반복할 때마다 나는 그것이 완전히 잘못된 평가라고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체 게바라 티셔츠를 입을 때, 그것은 그저 여러 벌의 티셔츠 중에서 하나를 집어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저항과 이상주의와 희망에 관한 주장이며, 현존 질서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다시 말해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잘못됐고 변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나는 사람들이 체 게바라 티셔츠를 입을 때, 그들이 그러한 주장을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전 세계에서 〈모터 싸이클 다이어리〉가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나는 이 영화를 여러 곳에서 몇 차례 봤는데, 관객 대부분이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게바라 초상이 그려진 옷을 입고 있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나는 이 새로운 세대가 게바라와 관련된 실제 역사를 잘 알지는 못할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의 이미지를 재발견한 사람을 위한 체 게바라 전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게바라는 상징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상징을 더 심오한 무언가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이해와 교훈을 담고 있는 한 사람의 삶이 될 것입니다.

그 교훈은 우리가 혁명을 바랄 뿐 아니라 혁명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성공과 실패는 우리 전통과 역사의 일부분입니다. 나는 내 책이 1960년대 세대와 다른 정치적 언어를 사용하고 게바라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를 재발견하고 싶거나, 이미 재발견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그리고 내가 게바라에 관해 연설했던 모임들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이 점을 이해한 듯싶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언제나 쿠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고, 쿠바가 어떤 정책을 폈는지에 관해 묻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게바라가 혁명을 일으킨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를 존경했고,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이해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들은 게바라의 삶으로부터 배우고 싶어했습니다. 다시 말해,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우리가 지금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체 게바라는 그러한 논의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체 게바라는 쿠바 혁명의 영웅이자 상징이었습니다. 쿠바 사회는 어떤 성격의 사회이고,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습니까?

1964년에 게바라는 쿠바를 떠나 국제 운동을 건설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이 올바르게 여기는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그것의 핵심은 대중 운동이 아니라 소규모 혁명가 집단이 혁명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내가 속해 있는 전통은 이 방법에 비판적입니다.)

게바라가 쿠바를 떠날 당시 그가 카스트로와 한 논쟁은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둘 사이에는 중요한 의견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쿠바가 고립된 채 생존할 수 있을까, 혹은 독자적인 사회주의 국가로 생존할 수 있을까, 소련에 점점 의존하게 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등이었습니다.

체 게바라는 소련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는 것에 커다란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쿠바의 정치적·경제적 고립을 걱정했습니다. 그는 혁명이 반드시 국제적 운동이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혁명은 한 곳에서 시작될 것이지만, 국경을 넘어 확산되면서 변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커다란 위험, 혹은 엄청난 거짓말은 고립된 채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즉 자본주의 바다에 둘러싸인 사회주의 섬을 건설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역사의 교훈은 혁명이 국제 운동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독재 국가나 비민주적인 질서나 캄보디아 같은 기아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가 말하는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없다고 가르쳐 줬습니다. 우리의 계급은 국제적인 계급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게바라는 이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방식은 게릴라 전쟁이었습니다.

체 게바라는 우리에게 어떤 유산을 남겼을까요? 나는 그가 겉모습은 사회주의이지만 내부에는 문제가 가득한 사회를 남겼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속한 전통은 한 가지 점에서 분명합니다. 즉, 스스로 사회주의로 묘사되는 사회와 스스로 사회주의적이라고 묘사되는 혁명에서 핵심은 대다수 대중이 자기 삶의 통치자이자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대중이 권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지도자를 다른 지도자로 바꾸는 문제가 아닙니다. 지배자가 더 점잖게 혹은 더 매력적으로 말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권력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쿠바나 다른 어떤 사회를 평가할 때 우리는 매우 간단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권력이 어디에 있는가? 누가 사회를 통제하는가? 사회의 지도자가 얼마만큼 아래로부터 통제를 받는가?

그리고 만약 그들이 아래로부터 통제를 받지 않는다면 그 사회를 사회주의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물론 그 사회가 제국주의에 대한 태도에서 사회주의적일 수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적 입장이 사회주의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쿠바 대중이 사회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면, 쿠바는 사회주의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현실의 쿠바는 예나 지금이나 아래로부터의 통제 구조와 민주적 구조가 없는 사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카스트로를 아이들을 돌보는 할아버지처럼 묘사합니다. 하지만 그는 46년 간 권좌를 지켰습니다. 카스트로는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일지 모르지만, 쿠바는 지난 46년 동안 선출되지 않은 사람이 강력하게 통제해 온 무언가 잘못된 사회입니다.

그리고 쿠바인들은 자기 삶에 대한 통제권을 갖고 있을까요? 저의 대답은 완전히 부정적입니다.

쿠바에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구조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종류의 아래로부터의 통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쿠바에는 노동조합, 학생 조직, 여성 조직 들이 있지만, 이 조직들은 위로부터 만들어졌습니다.

쿠바의 반대파는 매우 혹독하게 처벌받습니다.

물론 1959년 이래 미국은 쿠바 혁명을 봉쇄하고 파괴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습니다. 쿠바인과 우리는 모두 제국주의의 쿠바 파괴 기도에 반대해 쿠바가 생존할 권리를 절대적으로 지지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쿠바 체제에 비판적인 사람은 누구든지 제국주의의 협력자로 비난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불행히도 쿠바인들은 이러한 딜레마에 사로잡혀 있고, 이 때문에 쿠바에서는 상당히 흥미로운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쿠바에서 출간된 문학 작품, 특히 젊은 세대가 쓴 작품을 읽으면, 놀랍게도 바로 이러한 딜레마 때문에 그들이 매우 심각한 환멸에 빠져 있고, 대단히 냉소적이란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제국주의 부역자로 비난받지 않으면서도 카스트로를 반대할 방법이 없습니다. 또한 그들은 제국주의에 호소할 수도 없습니다. 제국주의가 쿠바에 잔인한 형태의 자본주의를 강요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은 이런 복잡한 감정을 표현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일종의 개인적 냉소주의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쿠바의 내부 현실과 사람들의 소외를 잘 보여 주는 한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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