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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초기, 사회주의자 앞에 놓인 전망

이 글은 최일붕 노동자연대 운영위원이 소속 단체의 한 회의에서 한 발제의 원고를 기사용으로 편집한 것이다

ⓒ사진 출처 코리아넷

문재인 등장의 경제 환경은 나쁘다

문재인 정부 등장의 맥락을 노무현 정부 등장의 맥락과 비교해 보면 몇 가지 의미심장한 공통점과 차이점이 드러난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했을 때는 한국 경제가 중국의 경제 성장 덕분에 1997~98년의 소위 ‘IMF 공황’에서 벗어나 회복되고 있을 때였다. 비록 회복은 제한적이고 불안정해, 2007년부터 위기에 직면하고, 2008년에는 공황에 빠지게 됐지만 말이다.(‘위기’와 ‘공황’의 구분은 고故 김수행 교수에 따랐다.)

반면 문재인 정부는 세계경제가 장기 침체 국면에 들어선 가운데 등장했다. 물론 지난달 1일 정부는 반도체와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호황으로 3월 수출이 13.7퍼센트 증가했고 “4월에도 회복 기조가 유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는 최근 몇 달 새 트럼프의 경기 부양 약속에 힘입어 미국의 주식시장이 상승하고 소비자신뢰지수(경기에 대한 소비자 견해를 보여 주는 지수)도 증가하고 있는 것에 대다수 자본가들이 재빠르게 반응한 결과인 듯하다.

그러나 미국의 실물경제는 전혀 다른 그림을 제시하고 있다. 1/4분기 미국의 국내총생산(GDP)은 겨우 0.5퍼센트 증가에 그쳐 지난 4년간의 추세를 답습했다.1 또한 제조업 활동(특히 자동차 판매)이 저하했고, 소매 판매도 (가계부채 부담 때문에) 감소했고, 소비자물가지수도 하락했다. 고용 관계 지수도 “실망스럽다.”2

금융시장은 실물경제를 한동안 반영하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주가수익률3이 높아도 기대에 따른 것일 뿐이다. 그런데 금융시장의 인수·합병 활동도 감소한 걸 보면, 경제에 대한 불확실성이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미국 재무부 발행 10년 만기 국채의 수익률(금리)도 사상 최저 수준인 2퍼센트대에 불과하다. 또한 IMF는 만일 트럼프 정부의 세금 감면이 경기는 부양하지 못하고 재정 적자와 차입 관련 재무비용이 증가한다면, 미국 기업이 보유한 총자산의 22퍼센트에 해당하는 거의 4조 달러의 자산이 부실해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미국 정부가 설사 내수 증대를 위한 조처들을 취한다 한들 빈부격차가 하도 심해 별 효과가 없을 것이다. 토마 피케티에 따르면, 미국민 하위 절반의 세전(稅前) 국민소득 비중은 1980년 20퍼센트에서 오늘날 12퍼센트로 하락했다. 반면 상위 1퍼센트의 비중은 12퍼센트에서 20퍼센트로 증가했다. 실질소득으로 말하면, 하위 절반 국민의 경우는 조금치도 늘지 않은 채 저조했고, 상위 1퍼센트의 경우는 갑절 이상(205퍼센트)이 늘었다. 최상위 0.1퍼센트 국민의 경우는 6백36퍼센트가 늘었다.4


세계 자본주의는 구조적 위기를 겪고 있으므로 원만한 해결책은 없다

세계 자본주의는 루카치의 제자인 이쉬트반 메사로쉬가 말한 ‘구조적 위기’를 겪고 있다.5 ‘구조적’이라 함은 경제의 세계화와 일국적(국민) 국가 사이의 기존 모순 심화가 위기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현재 구조적 위기의 증상을 일부만 열거하면 이렇다: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 방향 정책들이 탄력을 받지 못한 채 모순 속에 갇혀 있음; 브렉시트로 대표되는 유럽연합 와해 전망; 우익 포퓰리스트 정당들의 부상; 제국주의 열강의 군국주의 부상; 그리고 물론 세계경제의 계속되는 침체 전망.

매우 잘 알려진 마르크스주의자와 급진주의자의 일부가 현재의 경제 위기를 구조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케인스적 해결책을 제안한다. 마르크스주의자 데이비드 하비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규칙들 내에서” “세계적 영향력을 가지는 새로운 뉴딜,” 말하자면 좀 더 “시혜적인 ‘뉴딜’ 제국주의”를 유일한 대안으로 거론한다. 비록 “일시적”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말이다.6 역시 마르크스주의자들인 뒤메닐과 레비도 케인스주의를 정치적 대안으로 여긴다.7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급진주의자 나오미 클라인도 케인스가 “더욱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공공의 부를 공동 관리하려” 노력해 그의 사후인 1950년대에 선진국의 케인스 학파는 “눈부신 성공담을 뽐냈다”며 거듭 케인스를 우호적으로 거론한다.8

그러나 1930년대 초에 뉴딜과 케인스주의는 효과가 없었다. 사실 1930년대 내내 서구의 지배계급들은 경제의 회복을 위한 핵심 조건, 즉 경제 위기를 통해 비효율적인 자본들이 파괴돼 시스템이 정화되는 것을 성취하지 못했다. 1937~38년에 다시금 심각한 공황에 빠진 사실이 이를 잘 예증한다. 마침내 군국화가 경제의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점이 드러났다. 소련과 일본과 나치 독일이 서방보다 먼저 경제가 활성화되는 것을 통해서 드러난 것이다. 세계경제가 이윤율을 회복하고 경제가 되살아나게 된 건 제2차세계대전으로 무기 생산이 급등해, 자본의 유기적 구성 증가율이 완만해지면서였다. 제2차세계대전 동안 이윤율은 급등했고, 이 높은 이윤율이 전후 장기 호황의 선행 조건 구실을 했다.

그러므로 메사로쉬 말대로 “구조적 위기에는 구조적 변화가 필요하”고 구조적 변화는 “가장 격렬하거나 폭력적인 경련도 배제될 수 없다.”9

전후 장기 호황이 붕괴하던 1970년대 초에 미국 등 서구 정부들은 케인스적 경기부양책을 사용했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그래서 1976년, 맨 먼저 영국 노동당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채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레이건과 대처 정부에 의해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됐다. 이를 두고 데이비드 하비는 “자본가 계급의 전면적인 반격”이자 “계급 권력을 되찾기 위한 정치적 프로젝트”라고 했다.10 한국에서 이 프로젝트 추진은 김대중과 노무현 같은 자유주의적 중도파 정부가 시동을 걸고 이명박근혜 같은 강성 우파 정부가 가속 페달을 밟았다.

하지만 세계 차원에서든 한국 차원에서든 변화가 충분히 ‘폭력적’이지 못했던 탓인지 구조적 위기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했다.

동해에서 훈련 중인 미국 항공모합 칼빈슨 호 ⓒ사진 출처 미 해군

한반도 주변 정세는 막간의 해빙이 있더라도 곧 긴장될 것이다

글로벌 경제 침체가 지정학적 갈등을 더욱 첨예하게 만들어, 동아시아 정세는 더욱 불안정해질 것이다. 특히, 남한에서 증대되는 미국의 군국주의는 문재인 정부의 최대 시험이 될 것이다. 낙방할 게 뻔하지만 말이다.

미국의 남한 내 군국주의는 또다시 한반도 전쟁 위기설을 만들어 냈을 정도로 급등하고 있다. 심지어 호사가들이 제3차세계대전 가능성 운운할 만큼 두드러지는 듯하다. 물론 이는 당장은 과장이지만, 한반도를 놓고 핵무기 경쟁이 점증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 각축전이 미국 대(vs) 중·러 ‘신냉전’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미국의 권력층 내에서는 중국이 주적인지 러시아가 주적인지를 놓고 견해가 엇갈리고 있는 가운데, 러시아에 “우호적인” 듯한 트럼프가 끼어들어 러시아 주적론자들은 트럼프를 맹비난하고 있다.

미국의 군국주의는 미국 국내 정치의 극단적 분열 때문에 더욱 혼란스럽다. 옛 소련 붕괴 직후 “역사의 종말”(즉,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승리)을 선언하며 도취감을 만끽했던 그 유명한 우파 정치학자이자 헤겔주의자 프랜시스 후쿠야먀는 오늘날의 미국을 “실패한 국가”라고 부른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등을 가리켜 호칭했던 용어로 말이다. 미국의 정치 체제가 “제대로 기능을 하지 않고,” “잘 조직된 엘리트 계층들이 자기네 이익을 지키려고 지난 수십 년 새 비토 정치(vetocracy: 경쟁 정파의 정책과 주장을 모조리 거부하는 극단적인 파당 정치를 가리키는 후쿠야마 자신의 신조어)를 이용하는 바람에 퇴락을 겪었기 때문이다.” 후쿠야마는 심지어 “우리가 한 세대 전의 공산주의 붕괴와 비교될지도 모를 정치적 붕괴를 겪고 있을 수도 있다”고까지 말했다.11


문재인의 개혁은 더 첨예한 정치적 양극화에 직면할 것이다

경제와 외교의 난관에 직면해 결국 문재인의 어정쩡한 중도 개혁은 좌우의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킬 것이다.

결국 그는 처지가 어려워지면 연립정부를 제안할 것 같다. 아마 내년 지방선거 이후 개헌 시도와 맞물릴 것 같고, 국민의당이 우선적인 제안 대상일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저항이 강력하면 심상정의 정의당에도 제안할 수 있다. 비록 제안의 우선순위에서 국민의당에 밀리겠지만 말이다. 만약 뒤늦게라도 정의당에 연립 제의가 공개적으로 행해진다면 심이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정의당은 내홍을 겪을 것이다. 받아들이면 당내 좌파가 반발하고, 안 받아들이면 참여계 등 당내 우파가 반발할 것이다.

우리는 정의당의 연립정부 참여에 매우 강력하게 반대해야 한다. 그 자체가 배신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심상정을 지지한 사람들은 홍준표의 급부상과 사표 논리에 의해 압박 받으면서도 대부분 멀리 보아 진보 정당이라 해서 정의당을 지지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양당 정치 바깥에서 도전이 들어올 수 있다

문재인 정부가 양극화로 사면초가 신세가 될 때, 그때는 한국의 공식 정치도 유럽이나 미국처럼 기성 양당 체제의 와해로까지 나아갈까? 미국의 트럼프는 기존 양당제 바깥의 아웃사이더를 대표한다. 영국에서는 노동당 좌파 지도자 제러미 코빈이 기존 양당 구도의 아웃사이더여서, 노동당 주류인 당내 우파의 견제를 심각하게 받고 있다.(우익 포퓰리스트 정당 영국독립당이 기존 양당제를 위협했지만, 얼마 전 지방선거에서 크게 패배해 보수당이 우파의 주도권을 되찾았다.) 프랑스에서는 나치인 마린 르펜이 급부상했지만, 좌파적 개혁주의자 장뤽 멜랑숑도 부상했음을(아깝게 1차투표에서 탈락했어도) 잊지 말아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선에 출마했을 때 한국경제신문사는 《또라이 트럼프》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다. 그런가 하면 강준만은 《도널드 트럼프: 정치의 죽음》이라는 책을 출판했다.12 한편, 독일의 〈디 차이트〉 2016년 10월 16일치는 이런 제목의 1면 톱기사를 실었다고 한다. “미국인들이 미쳤나?”

그렇지 않다. 미국인들은 미치지 않았고, 트럼프도 “또라이”가 아니고, 트럼프의 부상(浮上)이 “정치의 죽음”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빈부격차가 격심하고 소외가 심화돼, 대중에게 절망감과 좌절감, 분노만을 안겨 주는 사회에서는 누군가가 대중의 그 심정을 대변한다면서 엉뚱한 방향으로, 애먼 대상에게로 분노와 좌절을 돌릴 수 있다. 특히, 이주자나 성소수자, 소수인종 등에게로 말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착실하게 자리 잡은 이제 한국에서도 국가 기구의 통제에서 벗어난 극우 정당이 성장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더구나 “헬조선”이라는 말이 폭넓은 공감을 얻는 나라에서 왜 그럴 수 없겠는가?

물론 광범한 대중은 박근혜를 쫓아낸 성공적인 대중 투쟁을 통해 자신의 잠재력과 자신감을 느꼈음직하다. 마르크스주의자인 우리도 정말 “사이다 같은” 사건이었다. 그런데 박근혜 퇴진 운동을 통해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다시금 착실하게 자리 잡았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20세기 역사를 통틀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핵심 행위주체는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이들에 기반을 둔 개혁주의 정당이었다. 박근혜 퇴진 운동에서도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중요한 구실을 했다. 특히, 철도 파업과 전국노동자대회, 실질적이지는 않았지만 정치적 상징 구실은 한 11월 30일 민주노총 하루 파업 등을 통해 노동자들은 박근혜를 탄핵시키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 그러나 12월 중순부터는 상층의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주도성을 발휘한 기간이었다. 그리고 이 힘을 공식 정치에서 대표할 수 있었던 건 문재인의 민주당과 심상정의 정의당이었다.

그러나 20세기의 역사는 또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착실하게 자리 잡는 순간부터 그 한계성과 본질이 드러나고, 심지어 매우 빠르게 위기에 직면하기도 한다는 점도 보여 준다. 1929년 대공황 직후 나치당과 공산당 사이에 양극화된 바이마르공화국의 운명이 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 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현재 서구 나라들에서 부상하고 있는 파시스트들의 존재도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위기를 반영한다. 경제와 사회의 위기, 지정학적 위기, 기성 정치의 위기 등으로 점철된 한국 상황도 비슷하다. 다른 나라에서처럼 이 나라에서도 자본주의의 위기 수준과 노동계급의 정치 의식 사이에 격차가 있다.


개혁주의가 성장하겠지만, 동시에 그 “지도력의 위기”라는 문제가 있다

이 격차를 메우고자 각종 개혁주의 세력이 달려들고 있다. 이 격차를 다양한 개혁주의 세력이 메울 것이다.

그러나 그러자마자 그 지도력의 한계가 속속들이 드러난다. 가장 최근 사례는 시리자이다. 하지만 정부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다양한 기층 투쟁에서도 트로츠키가 1930년대에 말한 노동계급 “지도력의 위기”는 거듭거듭 입증되고 있다. 물론 트로츠키는 개혁주의 “지도력의 위기”만을 말하지 않고 스탈린주의, POUM 같은 중간주의, 스페인 아나키즘 등 노동자 정당 일반의 “지도력의 위기”에 대해 말했다.

독일 혁명 패배(1923년 10월) 1년 뒤에 출판된 트로츠키의 《10월의 교훈》이 “지도력의 위기” 문제를 가장 잘 다루고 있다. 트로츠키는 독일 혁명 패배의 주된 요인이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들의 준비 부족이라고 지적했다. 패배의 결과는 재앙이었다. 노동자 운동이 붕괴했고, 파시즘 운동이 성장했다. 오늘날 《10월의 교훈》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구조적·유기적이 돼 있고, 지배계급이 노동자 계급을 더욱 쥐어짜려 하고, 핵무기 경쟁이 점차 심해지고, 서구에서 우익 포퓰리즘과 파시즘이 등장하는 한편, 한국에서는 우파 정권이 부패 스캔들로 무너지고,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부상하고, 여성 운동이 부상하고, 노동자들이 저항할 것임이 거의 틀림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만도, 그리고 한국에서만도 도대체 얼마나 많은 크고 작은 투쟁들이 지도력의 불충분함이나 부적절함 때문에 불가피하지 않은 패배를 겪었던가. 또는 더 큰 승리를 얻을 수 있었는데도 알뜰살뜰 조리차한 음식에 만족해야만 했던가.

정부의 공무원노조 불인정 공격에 뒤이은 연금 삭감 공격에 대처하는 노조 지도자들과 정치적 개혁주의자들의 회피 또는 기피는 가장 생생하게 기억나는 사례일 뿐이다. 도대체 그들은 알랭 쥐페 총리의 연금 공격에 저항해 1995년 말 분출한 프랑스 공공부문 노동자 파업은 어떻게 볼까? 내가 기억하기로 그들은 당시에 그것을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옳게 보고 크게 반겼었다. 20년 새 변한 것이다. 자유주의적 개혁 정부 10년과 매우 보수적인 수구 정부 10년을 겪으며 사기가 저하하고 고달픈 것이다.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변혁한다는 희망을 잃고 오직 점진적인 변화를 통해 시스템을 다소 ‘인간적’으로 만든다는 실용주의와 (근시안적 의미에서의) ‘현실주의’에 안주하기로 한 것이다.


노동자들이 다수를 차지한 박근혜 퇴진 촛불 운동 2017년 2월 25일 17차 범국민행동 ⓒ사진 조승진

문재인 개혁이 시시하고 보잘것없다 해서 반드시 우익만 득 보는 것은 아닐 수 있다

파시스트나 우익 포퓰리스트는 개혁주의(그리고 개혁주의 노선을 걷는 스탈린주의 정치조직들도)의 약점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와 결함을 치고 들어온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한국에서는 파시즘보다는 우익 포퓰리즘이 더 전도 유망하다. 역사적으로 정치 운동에 대한 국가의 간섭이 강력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오래지 않아 그의 지지자들에게 실망과 환멸을 안겨 줄 것이다. 그러면 우익은 이 약점을 비집고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이 일면적으로 우려하는 것처럼 우익만 득을 보게 돼 있는 것은 아니다. 좌파도 문재인의 약점을 이용해 반자본주의적 노동자 운동을 키울 수 있다.

위에서 필자는 “경제와 외교의 난관에 직면해 결국 문재인은 자기 좌우의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킬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했다. 이 전망은 확실하다. 하지만 우익만이 그 수혜자가 될 것이라는 건 예정돼 있지 않다. 대중 운동이 강력하면 진보·좌파 진영도 기회를 잡을 수 있다. 2004년 봄 우파의 노무현 탄핵 시도가 대중 항의로 좌절된 덕분에 열린우리당 같은 자유주의 중도정당도 큰 수혜자가 됐지만, 당시 진보정당 민주노동당도 10석이나 얻으며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문재인은 배신할 것이고, 노동자들은 결국 싸울 것이다

세계경제의 계속되는 침체 전망은 문재인이 자기를 지지한 다수 노동자들을 공격하고 배신할 것임을 예고한다. 노무현도 자기 지지자들을 배신했다. 둘 다 자본주의를 확고히 지키면서 자본주의를 더 효율적이고 더 생산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부르주아적 개혁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물론 집권 초기에는 문재인은 비교적 덜 부담스런 약간의 개혁 조처를 실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개혁 조처들은 불충분한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문재인 시대도 개혁과 억압이 어설프게 혼합된 똑같이 모순된 상황으로 점철될 것 같다.

다음과 같은 식으로 추론해 볼 수도 있다.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는 모두 대선 직전에 분출한 대규모 운동의 결과로 등장했다. 하지만 그 운동의 사회적 구성과 성격이 사뭇 다르다. 노무현을 권좌에 올려 놓은 촛불운동은 참가자 대다수가 청년·학생이었고 정치적 경험이 일천했다. 그들은 노무현에 대한 착각과 환상, 기대가 컸고, 대통령 취임 후 두 달도 채 안 된 때 노무현이 이라크 파병 계획을 밝히자 크게 환멸감을 느끼며 급속히 탈정치화했다.

반면 문재인의 부상(浮上)에 결정적으로 일조한 촛불운동은 세대와 계급을 초월해 민중적(또는 심지어 국민적)이었지만, 그 다수는 (미조직·비정규) 노동계급 소속이었다. 그리고 조직 노동계급(특히 철도노조)이 운동의 초기 고양에 상당히 기여했다. 그러므로 노무현 초기보다 문재인 초기에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저항 잠재력에 대해 좀 더 희망적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노동계급과 그 지도자들이 견인차 구실을 했지만 정치적 헤게모니(주도권, 지도력)를 행사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제 이들은 이명박근혜의 강성 우파 정부를 10년 가까이 겪어서인지 문재인에 대한 약간의 환상과 착각, 기대를 갖고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이 다수를 차지한 촛불운동으로 박근혜 정권이 물러났고, 이는 분명한 승리다. 승리를 거둔 노동자들이 자기들 덕분에 권좌에 올라선 대통령이 자기들의 염원을 배신하는 것을 저항하지 않고 보기만 할 리는 만무하다.

물론 그 투쟁이 반드시 이기고야 말 것이라는 예측은 할 수 없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불필요한 온건함 때문에 투쟁은 우여곡절을 겪을 것임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투쟁의 패배를 예측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람시는 이렇게 강조한다. 투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그리고 그 승패가 어떻게 갈릴지를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투쟁이 일어날 것임을 예측하는 건 가능하다. 그리고 예측 가능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의 저항이 일어날 때 혁명가들이 뒷짐 지지 않고 그 한가운데 있는가 하는 점이다. “실천의 철학[마르크스주의]은 헤게모니의 계기를 요청한다.”13


맺음말 ― 문재인 정부에 대한 환상을 조장해선 안 된다

그람시는 또한 이렇게 지적한다. “헤게모니의 계기”는 단지 경제와 정치의 위기에서뿐 아니라, 또 단지 좁은 의미의 계급투쟁에서뿐 아니라 윤리적 쟁점이나 지적 쟁점을 둘러싼 논쟁으로부터도, 또 정치적 대표성과 정당 문제들과 관련된 논쟁으로부터도 등장한다.14

몇 달 전에만 해도 집권당이던 정당이 순식간에 쪼개진 상황, 군소 정당인 사회민주주의적 정의당의 차기 집권 가능성이 점쳐지는 상황, 성폭력 문제를 주제로 한 토론에도, 문재인의 동성애자 관련 발언에 대한 항의에도 수백 명이 스스로 동원되는 상황은 바로 그람시가 말한 “권위의 위기”, “헤게모니의 위기” 상황이다. 이런 위기는 “유기적 위기”이므로 위로부터의 점진적 개혁으로 해결될 성격의 것이 아니다.15

그러므로 문재인 정부가 잘되길 바란다는 덕담 행렬에 동참해선 안 된다. 물론 “문재인 정부가 실패하길 바란다”고 초좌파적으로 말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잘되는 것이 불가능한 데다, 설사 잘돼 봤자 한국 자본주의가 노동계급을 더 효과적으로, 또 덜 낭비적으로 착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정부를 격려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물론 2004년 우파가 노무현을 국회에서 탄핵했던 것처럼 문재인을 우파가 공격할 때는 우파의 공격을 반대해야 한다. 당시든 지금이든 문재인은 민중주의자(물론 중도 포퓰리스트)로서 노동자 운동의 일부(물론 온건파 지도자들) 및 시민단체 간부들과 연계가 있다. 그리고 이들은 그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므로 우파를 반대한다는 것은 노동자 및 피차별자 대중과 관계가 끊어지지 않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다만, 사회주의적 좌파로서 우리의 대의명분이 개혁주의자들의 그것과 혼동되지 않도록 원칙에 입각한 비판을 필요한 만큼 해야 할 것이다.

한국과 같은 압축 성장과 고속 산업화가 일어난 사회에서 조직 노동자 운동의 좌파는 노동조건과 생활조건 문제에는 투쟁적인 자세(노동자주의)를 보이는 한편, 국가 권력과 사회 변화, 다른 형태의 천대 등의 문제에는 민중주의자들의 개념들을 (때로 약간 왼쪽으로 비틀어)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노동자주의와 민중주의의 이런 상호작용을 통해서 개혁주의 경향이 성장하기 쉽다.(문재인을 무비판적으로 또는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노동운동가들은 과거 한때 전투적 노동조합주의자였으나 지금은 민주당이나 정의당, 심지어 노동당을 지지하며 노조 안팎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는 여성주의 운동 같은 새로운 사회운동이 등장해, 개혁주의 정치와 경쟁과 협력의 관계를 가지면서 성장(때로 급부상)한다.

그래서 필자는 위에서 그람시 헤게모니 이론을 요약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헤게모니의 계기’는 단지 경제와 정치의 위기에서뿐 아니라, 또 단지 좁은 의미의 계급투쟁에서뿐 아니라 윤리적 쟁점이나 지적 쟁점을 둘러싼 논쟁으로부터도, 또 정치적 대표성과 정당 문제들과 관련된 논쟁으로부터도 등장한다.”

새로운 사회운동들은 흔히 노동계급과 계급투쟁, 혁명적 좌파,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람시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에게 노동계급 투쟁의 결정적 중요성은 전제에 해당한다.16 그러나 이는 사회주의적 원칙과 전략의 전제라는 뜻이지, 천대받는 다른 사회집단의 차별 반대 투쟁에도 전제로 제시될 수는 없다.17 입증돼야 할 것을 전제로 제시하는 것은 대화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다.

혁명적 좌파는 노동자 계급과 그 일상적 투쟁에 자리를 잡는 한편, 새로운 사회운동, 특히 여성 운동과 성소수자 운동에 관여해야 한다. 그 리더들이 아무리 배척하려 해도 혁명적 좌파는 여성 운동을 지지하는 다수 여성 노동자에게 책임감을 느끼며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

물론 대세 추수주의는 혁명가의 존재를 무(無)로 만드는 것이라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1.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란타 시 소재 연방준비은행의 보고.

  2. 같은 글.

  3. 주식의 시가를 1주당 세후(稅後) 이익으로 나눈 것.

  4. Thomas Piketty, Emmanuel Saez, and Gabriel Zucman, ‘Economic growth in the United States: A tale of two countries’, December 6, 2016

  5. István Mészáros, ‘Structural Crisis Needs Structural Change’, Monthly Review, Volume 63, Issue 10, March, 2012.

  6. 데이비드 하비, 《신제국주의》(한울아카데미, 2005), 197~198쪽.

  7. 제라르 뒤메닐 & 도미닉 레비, 《신자유주의의 위기》, 후마니타스, 2014년, 38, 349, 396~397, 459쪽. 또한 같은 저자들의 《거대한 분기》, 나름북스, 2016년, 66~82쪽.

  8. 나오미 클라인, 《쇼크 독트린》(살림Biz, 2008), 30, 76쪽.

  9. 이쉬트반 메사로쉬, 앞서 언급한 글.

  10. 데이비드 하비, 《신자유주의: 간략한 역사》(한울아카데미 2007년).

  11. Francis Fukuyama, ‘America: the failed state’, Prospect, January 2017.

  12. 인물과사상사, 2016년.

  13. Quaderni del carcere, Torino, 1975, p. 1404. Antonio A. Santucci, Antonio Gramsci, Monthly Review Press, 2010, p. 153에서 재인용.

  14. 같은 책.

  15. 그람시는 “유기적(organic) 위기”와 “국면적(conjunctural) 위기”를 구별한다. “국면적 위기”는 특정 맥락이나 특정 조건들 때문에 제 기능을 못 하는 상황인 데 비해, “유기적 위기”는 생산양식이라는 근본적 토대와 관련되고, 특히 “기본 계급들[가령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지배와 종속 관계와 관련된 상황을 말한다. “유기적 위기”는 위에서 언급된 이쉬트반 메사로쉬가 말한 “구조적 위기”와 대강 비슷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16. 1919년 6월 21일치 L’Ordine Nuovo 신문에 실린 그람시의 논설, ‘Workers’ Democracy’. Antonio Gramsci, Selections from Political Writings 1910-1920 (London, 1977), pp. 65-67에서 재인용.

  17. Daniel Bensaïd, ‘Working class, social movement, alliances - and the limits of radical democracy’, 2007년 8월 27일. http://danielbensaid.org/Hegemony-and-United-Front?lang=f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