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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봉준호의 〈기생충〉, 추천할 만한 영화인가?

* 이 영화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스포일러를 당하고 싶지 않은 독자는 거르시라.

〈기생충〉은 당연해 보이는 귀결을 향해 매끈하게 흘러간다. 또 평범한 노동계급의 삶과 계급 격차를 압축적으로 분명하게 표현한다. 대사 하나, 장면 하나가 전체 구성에서 군더더기 없어 보인다. 위와 아래로 구분되는 자본가 계급과 노동 계급의 공간적 대비 역시 영화의 기술적 측면을 잘 모르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직관적으로 이 두 계급의 삶이 천지 차이임을 보여준다. 박 사장 아이의 미제 텐트는 폭우 속에서도 끄떡없지만, 주인공 가족의 반지하 방은 물난리가 나는 장면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큰 틀에서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것의 강조점은 계급 적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노동계급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들을 개돼지도 아닌 기생충처럼 보는 자본가 계급의 그것인 것처럼 느껴졌다. 영화가 끝난 후 밀려오는 답답함과 먹먹함은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영화는 백수 가족 중 한 명이 과외 교사로 부잣집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된다. 이들은 그 집의 운전기사와 가사도우미를 내쫓고 그 일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실행한다. 이 장면에서 웃음이 나왔던 것은 이들이 어떤 큰 포부와 야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먹고 살기’ 위해 가족이 손발을 척척 맞춘다는 점에서다. 먹고 산다는 그 당연한 목적을 위해 온 가족이 용을 써야만 하는 그 과정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이 과정에서 가족이 박 사장과 그의 부인을 속이기는 했으나 그것이 통쾌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들의 입장에서도, 이 가족이 새로운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이기에 손해 볼 것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느낀 것은 온갖 술수와 책략으로 부당해고를 당한 운전기사와 가사도우미에 대한 동정과 연민이 한 편에 있었다. 박 사장의 부인은 가사도우미를 해고하겠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잘 에둘러서 말하겠다고 한다. 그것이 입증된 방법이라면서. 내가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숱하게 잘릴 때마다 학부모들은 문자로 ‘예의’ 있게 나에게 해고를 통보하곤 했다. 거기에 나는 어떤 항변을 할 수도, 이유를 물을 수도 없었다. 학생의 성적이 오르건 떨어지건 그것이 꼭 고용을 결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마 현실의 운전기사와 가사도우미라면 예상치 못한 해고에 당황하며 다음 달 카드 값은 어떻게 막아야 할지 막막해할 것이다. 자신을 밀어낸 음모가 있었음은 알지도 못한 채.

이 영화에서 주되게 갈등하는 것은 박 사장 가족과 주인공의 가족이 아니라 밀려난 가사도우미의 가족과 주인공 가족이다. 영화 〈장고〉의 흑인 집사가 백인 주인에게 순종하고 다른 흑인을 오히려 천대하듯, 가사도우미의 남편은 일면식도 없는 박 사장을 숭배하고 주인공 가족을 공격한다. 가사도우미 역시 적대국을 향한 북한의 선전포고를 흉내 내며 주인공 가족을 조롱한다. 주인공의 가족도 자신들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가사도우미의 가족을 밀어내려고 고군분투한다. 이들 사이의 적대는 단지 살기 위해, 그들의 조건상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마치 한 숙주를 두고 서로 다른 두 기생충이 경쟁하고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것처럼.

이들은 서로 비슷한 불쾌한 냄새가 나고 비슷하게 비참한 삶을 살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조건이 이들이 연대하고 단결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이들의 존재에는 무관심하며 사람들 사이에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고 생각하는 박 사장과 그 가족에게 대항할 생각을 하지도 못한다. 물론 다른 해석을 위한 결말이 후반부에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JTBC의 뉴스룸 브리핑에서는 이 영화에서 ‘진짜 기생충은 누구인가, 자신의 생활을 위해서는 청소도 요리도 하지 못하는 이들이 기생충이 아닌가?’ 하고 수사적 질문을 던졌지만, 영화의 초점은 그보다는 못사는 사람들이 살기 위해 서로 싸우는 부분에 있다. 물론 그 역시 자본가 계급과 노동계급 간의 격차 때문에 일어나는 비정한 현실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 영화는 우리의 비참한 삶을 보여주고 사회 비판적인 부분을 담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의 이전 영화와 비교하여 이 영화는 후퇴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무능한 국가 기관인 경찰을, 〈괴물〉에서는 한국 정부와 미군을 비판했고 〈설국열차〉에서는 시스템에 대한 도전을 보여줬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시스템이 아니라 박 사장 개인으로 표상되고, 어느 누구도 체제에 도전할 생각을 끝까지 하지 못한다. 또 그것이 내 옆에 있는 ‘냄새나는’ 타인과 같이 행동했을 때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어느 누구도 품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일이 발생해도 시스템은 그대로 운영된다.

박 사장은 주인공 가족의 아버지에게서 나는 냄새를 “왜 있잖아, 그거, 오랜만에 지하철 타면 나는 냄새”라고 표현한다. 실제로 지하철을 이용할 때마다, 특히 무더운 여름에는 낯선 타인의 무례한 행동뿐만 아니라 체온과 체취, 숨결, 그의 존재 자체에 대해 불쾌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면서 왜 나는 사소한 것에 분노하는가, 하며 스스로에게도 짜증스러움을 느낀다. 그러나 한편 박근혜 퇴진 집회 때 광장에서 나는 그토록 많은 사람의 존재에 감격스러웠고 고마움을 느꼈다. 나보다도 작아 보였던 한 할아버지가 신문 파는 나에게 고맙다고, 수고했다고 인사를 건넸을 때 거의 대부분의 노인은 우익이고 냄새날 것이라는 나의 편견은 도전받았다.

〈기생충〉에서 느껴지는 불편한 감정은 이런 것 때문일 것이다. 하층민들은 절대 단결할 수 없고, 불평등한 이 사회에 도전할 수 없으며, 낙수효과의 콩고물을 주워 먹기 바쁘다는 것. 노동자들은 개돼지이고 자기들 이해관계 때문에 연대해서 사측에 저항할 수 없을 것이라는 지배계급의 오만함이 묻어나와 불편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봉준호 감독이 JTBC 뉴스룸에서 손석희와의 인터뷰에서 그에게 “2016년 10월 24일(최순실 태블릿 PC 첫 보도) 어떤 생각이 들었나” 물었던 것의 의미를 곱씹게 되었다. 그는 아마 박근혜 퇴진의 근원을 노동계급 대중의 누적된 분노와 운동으로 보기보다는 능력 있는 개인의 역할이라고 본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것이 역사를 보는 자유주의자의 관점이 아닐까.

영화의 예술성에 대해 평을 내리는 부분에 있어서 나는 문외한이다. 그렇지만, 노동계급의 비참한 삶을 잘 그려내나 이들의 투쟁의 가능성은 일소하는 영화를 정치적으로 추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