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사회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서》(폴 풋, 핼 드레이퍼 지음):
초심자도 이해하는 사회주의의 핵심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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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미국 대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정치인 버니 샌더스의 ‘민주적 사회주의’의 인기가 지금도 식지 않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샌더스의 인기가 높다. 이런 흐름은 매우 반갑다. 옛 소련과 동구권의 스탈린주의 체제 붕괴 뒤 너도나도 사회주의라는 단어조차 내다 버리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 다시 사회주의가 대중의 관심사가 된 것이다.
한국에서도 지속되는 자본주의 위기와 사회 양극화 심화 속에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을 찾는 이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오늘날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새 세대 청년들에게 도움이 될 책이 나왔다. 《사회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서》(책갈피)가 그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영국의 인기 있는 탐사보도 기자였던 폴 풋(1937~2004)이다. 그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로서 영국의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오랜 당원이기도 했다.
저자는 “사회주의를 소련과 동유럽에서 이뤄진 끔찍한 왜곡에서 구해 내고 … 오늘날[1990년] 좌파를 마비시키는 패배주의적 냉소를 극복할 진정한 사회주의적 대안을 제시하려고” 이 책을 썼다.
소련과 동유럽 스탈린주의 체제에 의해 사회주의가 왜곡된 영향은 그 체제가 몰락한 지 30년이 됐는데도 남아 있다. 우리 나라 좌파들 중 기관지나 강령에 사회주의를 표방한 조직들도 어떤 사회주의인지는 대개 모호하다. 당연히 “어떻게?”라는 질문에도 구체적이지 않다.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주의의 의미를 분명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
1956년 헝가리 혁명부터 1980년 폴란드 연대노조 투쟁까지, 스탈린주의 체제 하 동유럽에서도 인류에게 희망을 보여 준 노동자 혁명들이 일어났지만, 좌파들은 길을 잃고 부르주아 국가를 재건하는 잘못된 길을 택하기 일쑤였다. 폴 풋의 책은 최상의 길잡이다. 그는 쉬운 언어로 진정한 사회주의의 의미를 찾는 여정으로 우리를 이끈다.
노동계급의 자력해방
인류가 계급으로 나뉜 후부터 해방 운동은 계속 존재해 왔다. 신·메시아·영웅 등 소수 엘리트가 불쌍한 민중에게 해방을 선사할 것이라는 생각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아래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전통도 있었다. 마르크스는 최초로 이를 체계적인 이론·사상과 결합시켰다. 자본주의에서 처음으로 사회 전체를 해방할 수 있는 규모의 부가 창출됐는데, 바로 그 부를 생산하는 노동계급의 자력해방만이 인류를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고 봤다.
선한 지배자들의 자비에 의지한 당대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과 달리,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의 해방은 반드시 노동계급이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1864년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 규약 첫 구절)고 강조했다. 노동계급이 “자신을 변화시켜 정치적 지배를 감당하기에 적합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자력해방이 꼭 필요하다.
폴 풋은 노동계급의 자력해방이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 지적한다. 이 책 부록에 실린 “사회주의의 두 가지 정신”의 저자인 미국의 사회주의자 핼 드레이퍼는 “《자본론》의 전체 내용도 이것에 비하면 부차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만큼 노동계급의 자력해방은 인류해방을 향한 투쟁의 역사에서 중요하고 새로운 사상이다.
노동계급 자력해방의 실천적인 의미는 1871년 첫 모습을 드러냈다. 1871년 파리 노동자들이 72일간 권력을 장악하고 어떤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훨씬 더 민주적으로 파리를 운영한 것이다. 선출된 공직자는 선출한 사람들에게 책임져야 했다. 대표자는 어떤 특권도 없이 노동자의 평균 임금만 받았고, 선출된 사람들이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않으면 즉시 소환될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이 파리 코뮌의 경험을 보고 자본주의 국가와 완전히 다른, 노동자 국가의 운영 원리를 이끌어 냈다.
혁명과 반혁명
마르크스를 계승한 러시아 혁명가 레닌은 1917년 러시아 노동자들의 권력 장악을 이끌었다. 최초로 부르주아 국가를 분쇄하고 노동자 권력 장악에 성공한 것이다.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가 새로운 권력기관으로 등장했다. 파리코뮌처럼 “소비에트의 대표들은 [자신이 대표하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져야 했고 어느 때고 ‘소환’될 수 있었다. 소비에트 대표자들의 보수는 그들이 대표하는 사람들의 임금과 똑같았다.”
노동자들이 꿈도 꿀 수 없는 높은 보수와 임기 보장 등 특권을 누리며 자신을 선출한 이들을 짓밟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자본주의 민주주의 하의 정치인들과 비교해 보라. 소비에트는 더 나아가 파리 코뮌이 이루지 못한 노동자 권력의 전국적이고 민주적인 네트워크를 건설했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러나 폴 풋은 러시아에서 수립된 노동자 국가가 어떻게 고립돼 질식당해 갔는지도 설명한다.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인 사회 중 하나였던 러시아에서 권력을 장악한 노동계급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러시아 혁명의 확산에 두려움을 느낀 여러 자본주의 국가들이 직접 군대를 보내며 러시아의 구 지배자들의 반혁명을 지원해 러시아 혁명의 목을 조른 것이다.
내전으로 나라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에서도 “새롭게 해방된 수많은 사람들은 그 사회를 자신들이 만든 자신들의 사회로 여겨 완강하게 방어했다. 문자 그대로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바칠 각오였다.” 유럽에 혁명의 물결이 일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특히, 독일 혁명이 패배하면서 러시아 혁명은 고립됐다.
이 속에서 부상한 당·국가 관료층의 우두머리 스탈린은 혁명의 국제적 확산이라는 어려운 길을 버리고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각축하는 지배계급으로 살아남기로 했다. 1928년부터 노동자들의 필요를 위한 생산을 포기하고 축적을 위한 생산으로 방향을 틀었다. 레닌을 미라로 만들고 신격화해 레닌의 이름으로 당내 반대파를 모두 제거했다.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를 입 밖에 내는 사람은 누구든, 작업장에서 매우 사소한 민주주의를 요구하더라도, 강제 노동 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처형당했다.” 러시아 혁명의 흔적은 국가 소유라는 빈 껍데기만 남기고 모두 말살됐다. 스탈린은 민간 기업이 존재하는 서방 자본주의와는 형태만 다른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반혁명을 수행한 것이다.
스탈린은 이에 그치지 않고 제2차세계대전 후에는 동유럽에서 소련과 똑같은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이식했다. 그 과정에서 나치 점령 시절의 탄압 기구를 인수해 노동자 조직들을 모두 파괴했다. 노동계급의 자력해방과는 정반대의 일을 벌인 것이다. 이제 한동안 아래로부터의 노동계급의 자력해방 사상은 스탈린주의에 의해 질식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서기장의 보복보다 역사의 보복이 더 무섭다”고 한 러시아 혁명 지도자 트로츠키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연이은 노동계급의 반란들은 자력해방을 향한 여정이 끝나지 않았음을 웅변했다.
폴 풋은 스탈린주의 체제 하의 동유럽 노동자들이 벌인 위대한 저항의 역사도 소개한다.
1956년 헝가리 혁명에서 노동자들이 창조한 자치기관은 러시아 혁명 당시 급속히 생겨난 “노동자, 농민, 병사 평의회와의 두드러진 유사성 등 모든 면에서, 놀라운 통일성을 보여줬다. … 무장한 민중이 신뢰하는 대중의 자치기관이었다.”
1980년 폴란드 노동자들이 건설한 연대노조는 폴란드 노동자의 80퍼센트인 1000만 명을 조직해 노동계급의 힘을 과시하며 스탈린주의 지배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스탈린주의 체제 지배자들은 이런 노동자 반란들을 어찌어찌 진압했지만, 마침내 1989년 갑작스럽고 매우 강력한 “대중행동의 폭풍이 일었다.” 1991년 소련의 몰락으로 진정한 사회주의의 목을 조르던 스탈린주의 체제는 붕괴했다.
그러나 ‘사회주의’라 불렸던 이 체제를 지키려 한 노동계급의 행동은 없었다.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로 불렸던 체제가 사회주의가 아님을 보여 주는 이보다 더 강력한 증거는 없다.
일당 독재와 3대 권력 세습을 이어 가고 있는 북한도 노동계급의 자력해방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체제는 해방 뒤 소련의 군대가 세운 것으로,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과 무관했다.
사회민주주의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도적 인물이었던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1898년 “투표권과 노동조합 덕분에 사회주의의 전망이 바뀌었다”며 개혁주의 노선을 천명했다. 독일의 혁명적 사회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대로, “같은 목표를 이루는 더 평온하고 안정적이고 느린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목표를 선택한 것이다.”
베른슈타인의 후예들은 1980년대에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며 더 우경화했다. 폴 풋은 노동당이 신자유주의를 수용한 결과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빈곤층의 어마어마한 증가, 민영화, 부자 감세, 복지 삭감, 노동자 임금에 대한 공격 등등.
근래 주류 사회민주주의의 위기를 배경으로 부상한 그리스의 시리자와 같은 좌파 개혁주의도 냉혹한 시험대에 올랐지만 실패했다.
“산업, 금융, 법, 군대가 전혀 선출되지 않고 책임지지 않는 소수의 수중에 남아 있다면” 투표로 기존 국가기구를 장악해 체제의 병증을 치료해 보겠다는 사회민주주의 프로젝트는 필패할 수밖에 없다.
유일하게 러시아 노동계급이 자력으로 쟁취한 노동자 국가는 인류 역사상 가장 진전된 민주주의와 해방의 전망을 짧게나마 보여 줬다. 피억압 민중의 삶을 파괴하는 경제 위기, 전쟁으로 이어질 제국주의의 격화, 인류 전체의 미래를 위협하는 기후 위기의 시대에, 자본주의를 끝장내기 위한 노동자계급의 자력해방, 진정한 사회주의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진정한 사회주의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