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이 확대되는 미·중 무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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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취임을 앞둔 전 IMF 총재 크리스틴 라가르드는 무역전쟁을 “크고 어두운 구름”에 비유하며 세계경제의 최대 난관으로 꼽았다. 라가르드는 9월 23일 미국 CN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현재 위협을 받고 있는 무역이 세계경제의 가장 큰 난관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렇다”고 밝혔다. 그는 미국과 중국이 상호 관세를 주고 받으면서 세계경제 성장률이 0.8퍼센트포인트 깎이는 여파가 있었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그녀는 유럽연합(EU)과 일본에 대한 수입차 관세와 같은 트럼프의 보호주의 조치에 대해서는 그리 우려하지 않았다. 그는 “유럽과 미국은 수십 년, 수세기 동안 친구였고, 알다시피 자주 같은 편에 서서 서로를 도와 왔다”면서 “(대서양 동맹은) 결코 그 어떤 무역전쟁으로 변질돼서는 안 되는 관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트럼프는 중국과의 무역전쟁 외에도 일본과 유럽연합에 대한 관세 공세를 멈추지 않고 있다. 9월 25일 미국은 일본과 무역협정을 체결했다. 여기서 미국은 일본산 자동차에 관세 25퍼센트를 부과하지 않는 대신 일본은 70억 달러(약 8조 4000억 원)어치 미국산 농산물과 중국이 미국과의 무역전쟁 때문에 구매하지 않은 옥수수 전량을 구매하기로 약속했다. 아베는 대미 수출의 35퍼센트를 차지하는 자동차 관세를 폐지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추가 관세 부과를 막은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EU에 대한 트럼프의 태도는 라가르드의 말처럼 ‘우호적이지’ 않다. 트럼프는 유럽 자동차에 25퍼센트의 관세를 물리겠다고 경고하고서 유럽 항공사 에어버스의 불법 보조금에 대한 상계관세를 준비하고 있다. 10월부터 트럼프는 항공기와 항공기 부품 등 80억 달러(약 9조 6500억 원) 규모의 유럽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할 전망이다. 이렇게 된다면 지난해 유럽산 철강과 알루미늄에 관세를 부과한 데서 시작된 미국과 EU 사이의 관세 분쟁이 더 치열해질 전망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가장 뜨거운 곳은 미·중 무역전쟁이다.
대중국 투자 차단
미·중 무역전쟁은 상품에 대한 관세 부과에서 시작해 환율전쟁으로 이어지더니 이제는 자본시장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인다. 미국 정부는 뉴욕증시에 상장된 중국 기업들을 퇴출시키는 파격적인 안까지 검토하는 듯하다. 물론 당장 실행에 옮길지는 미지수다.
CNBC 방송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 기업들의 대중국 자본투자를 전면 차단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블룸버그 통신도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으로 유입되는 미국의 포트폴리오 투자를 제한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뉴욕증시에 상장된 중국 업체들을 상장 폐지하거나 미국 공적 연기금의 중국 투자를 차단하는 방안 등이 검토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대중 강경파인 백악관 무역·제조업 정책국장 피터 나바로는 이런 내용의 언론 보도가 가짜 뉴스라고 반박했지만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을 듯하다. 전문가들은 거론된 조치들이 조만간 13차 미중 고위급 무역협상이 재개되는 상황에서 나온 것임을 보건대 향후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하려는 포석일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중국 경제의 침체
케인스주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 교수는 “미·중 무역전쟁이 중국 경제에 더 큰 위기의 방아쇠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미·중 무역전쟁의 여파로 8월 중국 산업생산이 17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지면서 리커창 총리는 올해 중국경제의 6퍼센트 성장을 “매우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해 위기감을 드러냈다. 9월 30일 국가통계국은 9월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가 49.8이라고 발표했다. 이 수치가 8월의 49.5보다 높긴 하지만 경기 확대와 축소를 가늠하는 기준인 50을 밑돌아 여전히 경기가 위축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9월의 차이신 제조업 지수는 51.4를 기록해 중소 제조업은 숨통이 트이는 듯하다. 국가통계국이 발표하는 구매관리자지수(PMI)가 국유기업과 대기업의 지수라면 차이신 구매관리자지수는 민간 중소기업 비중이 높다.
지금까지 제조업에 국한돼 있던 미·중 무역전쟁의 영향이 금융, 운송, 건설, 정보통신 등 서비스 무역에도 미칠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세계무역기구(WTO)는 지난 6월 서비스무역지수가 98.4로 기준점인 100을 밑돌았다고 발표했다. 서비스무역지수는 여객항공, 건설, 글로벌 서비스, 금융 서비스, 정보통신기술, 컨테이너 운송 6개 지표로 구성되는데, 그중 여객항공 지수가 95.6으로 가장 부진했다고 한다. 국제항공운송협회는 “지난해보다 더 취약한 수요 환경에 미·중 무역전쟁과 브렉시트라는 불확실성이 더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비스 분야가 취약해지면 서비스 부문이 국내 경제의 80퍼센트를 차지하는 미국에 적잖은 영향을 줄 수 있다. 유럽연합 또한 서비스 부문이 7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어서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독일로 번진 불똥
블룸버그 통신은 지난 10년간 유럽 경제를 견인해 온 독일이 미·중 무역전쟁의 최대 피해자가 돼 세계적인 위기를 촉발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미·중 무역 갈등이 심화하면서 독일 경제가 위축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시장정보업체 IHS마킷은 9월 23일 독일 제조업 PMI가 41.1로 2009년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유로존 PMI도 50.4를 기록하면서 6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독일은 지난 2분기 마이너스 성장(-0.1퍼센트)을 기록한 데 이어 3분기에도 암울한 전망이 쏟아지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의 직격탄을 맞으면서 독일 경제를 지탱하던 자동차 산업이 급격하게 위축되고 있다. 벤츠, 폭스바겐, BMW 등 독일 자동차 제조사들은 중국 경기 둔화에 시달리고 있다. 올해 상반기 독일 자동차 생산과 수출은 각각 전년 대비 12퍼센와 14퍼센트 감소했다.
독일은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제조업과 수출 의존도가 높다. 독일 수출액은 국내총생산의 46퍼센트(한국은 42퍼센트)나 된다. 그런데 독일 정부는 부채를 줄여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경기부양책에 적극 나서지 않고 있다. 폴 크루그먼은 “부채에 대한 독일의 지나친 집착은 전 세계 경제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노딜 브렉시트 — 또 하나의 난관
지난 9월 3일 미국 상공회의소가 주도해 한국, 일본, 캐나다, 호주 등 8개국 경제 단체가 함께 ‘노딜 브렉시트’(No deal Brexit: 영국이 협상 없이 EU를 탈퇴하는 것)를 우려하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이 10월 31일로 예정돼 있는 브렉시트를 강행할 의사를 거듭 밝히고 있어 노딜 브렉시트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노딜 브렉시트가 될 경우 영국은 EU 단일시장과 관세동맹에서 빠지게 돼 국경 검문과 통관 절차가 부활한다. 기업들에게는 관세 등 물류비용이 증가한다. 많은 기업들이 생산과 물류 거점 등을 영국에서 대륙으로 옮길 것이기 때문에 영국 경제가 침체에 빠지고 파운드화가 폭락할 수 있다.
유럽자동차제조사협회 등은 노딜 브렉시트가 현실화되면 수십억 유로(수조 원) 규모의 관세가 발생해 엄청난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노딜 브렉시트에 따라 상호 간 관세를 부과한다면 그 규모는 57억 유로(7조 5천억 원)일 것이라 예상되고 있다.
브렉시트가 결정된 뒤부터 금융 기업들이 본사를 영국에서 유럽 국가들로 옮기기 시작했다. EU 당국이 노딜 브렉시트 때에는 EU 기업들의 주식거래를 역내 플랫폼을 통해서만 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미 국제금융 중심지로서 런던의 위상이 금이 가기 시작했는데, 그 어떤 브렉시트라 할지라도 금융부문의 혼란과 비용 증가는 피할 수 없을 듯하다.
이미 영국 경제는 지난 2분기에 마이너스 0.2퍼센트의 역성장을 경험했는데, 브렉시트는 영국 경제를 더 침체에 빠뜨릴 수 있다. 영국 경제의 침체는 EU 전체에게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EU의 성장 동력인 독일 경제가 침체에 빠져 있다.
노딜 브렉시트는 국경 통제 강화, 이민자 단속, 우익 포퓰리즘 강세 등으로 이어질 수 있고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같은 국가들이 영국처럼 EU에서 분리하는 일들도 벌어질 수 있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노딜 브렉시트는 그 파장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불확실성을 증대시킬 것이다.
이런 불확실성이 낳은 자본주의 경제 위기의 대가를 지배자들은 노동계급이 치르게 할 것이다. 지배계급의 협박과 공격에 맞서는 노동계급 투쟁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